[메모] 트랜스젠더와 장애 차별: 스페이드의 경우

*어제 있은 강의에서 말하려고 작성한 원고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원고가 아니라 제가 참고하려고 작성한 것이고요. 오탈자, 비문, 무슨 소린지 당최 알 수 없는 번역문으로 가득합니다. 문장도 완결형이 아니고요. ㅠㅠㅠ 수정하는 것 귀찮아서 그냥 올려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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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이 일은 트랜스젠더인 변호사 딘 스페이드가, 트랜스젠더란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고객을 대리하여 소송을 제기하면서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함. 스페이드는 기본적으로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했고, 의학경험과 의료 진단서로 트랜스젠더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방식에 비판적 입장을 취함. 이를 테면, 의료적 조치를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의사가 “당신은 어릴 때 어떤 점이 달랐나요?”라고 질문함. 이 질문은 통상 당신의 어릴 때 젠더 경험이 어땠는지를 묻는 것. mtf/트랜스여성이라면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고, ftm/트랜스남성이라면 어릴 때부터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했다는 식의 서사를 요구하는 것. 아울러 자신의 몸을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증언이 필수로 곁들여져야 함. 하지만 스페이드는 의사에게 “난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배가 고팠고, 집은 사회복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내가 사는 동네는 빈민촌이었는데..”와 같이 계급 경험을 중심으로 기술함. 의사는 당황했고 스페이드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설명한다면 진단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얘기함.
스페이드의 이런 입장에 따라 트랜스젠더의 젠더 차별 경험 관련 소송을 제기하면서 장애 차별을 주장함. 여기엔 젠더 차별을 주장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트랜스젠더라는 어떤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이를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 법원이 인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GID 진단서를 제출하는 것. 나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방식이 나의 진술, 나 자신이 아니라 의료 진단서란 점은 젠더가 의료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증명하는 것이기도 함. 암튼 스페이드는 이런 맥락에서 장애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 대안일 수 있다고 판단함.
미국장애인법ADA에서 장애 차별을 주장하기 위해선 “규범적 몸 기능을 실천하는데 방해하거나 의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료소나 병원의 진단 기술로 증명할 수 있는 해부학적, 내과적, 유전적 혹은 신경과적 조건에 따른 육체적, 정신적, 혹은 의료적 손상”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며 연방법은 “일상의 주요 활동이 본질적으로 제한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함. 하지만 뉴욕 주의 장애 관련 법은 “일상의 주요 활동이 본질적으로 제한된다”는 요건이 없음. 대신 “장애”로 고려하기 위해 진단할 수 있는 손상만 있으면 된다고 규정함. 이런 규정을 활용하여 스페이드는 트랜스젠더 원고가 겪은 일을 장애 차별로 해석해서 이 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 들였고 최종 승소함.
이 소송 결과에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는 다양한 입장을 표현했고 장애차별을 적용하는 것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기도 함. 하지만 이 결과는, 스페이드도 지적하듯 장애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의 교차점을 모색할 수 있고 장애 범주와 젠더 범주의 논의를 몸이란 측면에서 재해석할 수 있음. 즉, 장애 범주와 트랜스젠더 혹은 젠더 범주 논쟁은 몸이라는 장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대체로 몸과 정신의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형태만을 특권화하고 다른 여러 형태는 배제하는 인위적 조건, 지배규범을 위반하거나 도전하면서 발생함. 두 운동은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과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개념을 놓고 논쟁하며, 특정 시설에 동등한 접근권을 갖는지, 편견과 차별에서 동등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를 놓고 싸우고 있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장애는 기본적으로 장애로 진단된 사람만으로 한정한다고 들었는데, 장애 개념을 어떤 식으로건 바꿀 수 있다면 장애 이슈와 트랜스젠더 이슈는 별개가 아니라 겹치면서 진행될 수도 있겠다 싶음. 물론 이런 아이디어와 논의는 더 많은 검토와 비판과 논쟁이 따르는 것이지만 규범적 몸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의 경험이란 측면에서 어떤 다양한 가능성이 발생할까를 고민할 수는 있음.

메모: 트랜스젠더, 장애, 인터섹스

01

스페이드는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접점을 모색한다.
젠더는 인간을 인식하는 장치인 동시에 의료 진단 범주다. 젠더는 의학의 진단 범주로 등장했고, 병리현상 혹은 이상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처음 쓰였다. 즉,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란 범주가 필요했다. 타고났다고 여기는 몸과 일치하지 않는 자기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내적 자기 인식을 명명하기 위해 젠더를 사용했다. 그래서 젠더는 언제나 의료병리화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일으키는 ‘트러블’은 사회적 인식 뿐만 아니라 몸의 형태를 포괄한다. 누가 여성인가, 누가 남성인가와 같은 질문은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을 가르는 기준 자체를 흔든다. 하리수 씨가 여성이라면 여성의 몸을 이루는 ‘생물학적 공통 경험’은 무엇일까? 하리수 씨가 여성이 아니라 여전히 남성이라면 하리수 씨가 재현하는 여성성(혹은 어떤 다른 방식의 성성)의 물적 토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트랜스젠더는 그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몸과 젠더의 관계를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변호사인 스페이드는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하면서,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을 법적으로 풀어가는 방법 중 하나로 미국장애인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장애인법에서 정의하는 장애 개념을 확장해서 적용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선 불가능한 전략이다.
이 전략으로 승소한 스페이드는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한 가지 제시한다. 그것은 단 한 가지의 몸과 정신만을 규범으로 특권화하고 그 외의 몸과 정신은 모두 배제하는 인위적 조건을 ‘위반’한다는 점이다.
02
드레거는 몸을 규범화하는 장치 중 하나인 인터섹스의 수술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인터섹스가 태어나면 의학은 이 태아를 여성 아니면 남성에 적합한 몸이 되도록 수술한다. 이 수술은 현재 의학의 표준 처방이다. 드레거에 따르면 의사들은 인터섹스나 그 부모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때때로 엉뚱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본인이나 자식이 인터섹스란 얘기를 들으면 본인이나 부모는 그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고 혼란만 느낄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사들/의학계의 믿음이다. 많은 인터섹스 당사자와 지지자는 이를 비판한다. 이를 테면 암에 걸린 사람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 환자는 혼란을 겪을 테니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의사가 수술을 한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의료 윤리의 문제인데도 인터섹스에겐 기본적 의료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드레거는 비판한다.
인터섹스 관련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의사가 얘기하는 혼란(당사자나 부모, 가족이 겪을 것으로 예상하는 혼란)이 사실은 의사 자신의 것이란 의심이 든다. 인터섹스란 존재 자체가 의사에겐 혼란스러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인터섹스 조건은 당사자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사자의 문화를 위협한다.”(30)는 케슬러와 드레거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규범적 몸을 만들려는 기획이 인터섹스를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 수술을 최상의 처방으로 만든다.
03
이것은 며칠 후에 있을 강의를 위한 메모. 더 자세한 것은 강의 때. 🙂
주제는 ‘의료기술과 비규범적 몸’이며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장애, 그리고 의료기술의 관계를 모색할 예정이나 실패할 가능성이 97.5%라 남은 2.5%에 희망을 걸어야 함… ㅠㅠ

크리스틴 조겐슨Christine Jorgensen: 이성애 가족 구조

요즘 How Sex Changed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진작 읽어야 했는데 이제야 읽는 게으름이라니!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으잉?’이란 표정으로 절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당황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얼 상상한 것일까요? 😛
이 책은 미국 트랜스섹슈얼의 역사를 다루면서 ‘섹스’의 개념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크리스틴 조겐슨이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 등장한 조겐슨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한국의 하리수 씨를 떠올리면 됩니다. 당시 미국에 정말 센세이션하게 등장했거든요. 존겐슨이 신문에 자서전을 연재하자 평소보다 몇 배 더 많이 판매되었죠. 엽서에 “To Christine Jorgensen”이라고만 적어도 배달이 될 정도였고요.
조겐슨이 등장한 직후, 조겐슨에 엄청난 관심과 함께 조롱과 비난도 쏟아 집니다. (물론 대세는 조겐슨을 수용합니다, 한국 사회가 하리수 씨를 수용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 비난 혹은 조롱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Christine’s sister will have a baby,” one joke opened. “Does that make [her] an aunt, an uncle or an ankle?”(77)
크리스틴의 자매가 아이를 가진다면, 크리스틴은 숙모가 될까, 삼촌이 될까, 발목이 될까?
처음 ankle을 읽었을 때 전 aunt의 a와 uncle의 nk(c)le의 합성어인 줄 착각했습니다. 이 구절을 소개하기 전엔가, 크리스틴을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그런 존재로 얘기하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런 맥락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단어 뜻이 발목, 복사뼈니까요. 무슨 의미인지를 잠시 고민했습니다. 저자도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거든요. 그냥 넘어갑니다. 근데 순간 퍼뜩 떠올랐습니다. 아, 발목…
‘부은 발목’을 알고 계시죠? 네, 오이디푸스가 ‘부은 발목’입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ankle은 조겐슨을 오이디푸스와 같은 존재로 미국 사회에 등장했다는 것을. ankle이란 조롱은 조겐슨이 가족 질서를 흔든다는 불안을 반영합니다. 조겐슨은 누가 여성이고 누가 남성인가를 질문하는 동시에 가족 관계 자체도 흔들었습니다(아들에서 딸로).
지난 9월 2일 대법원이 미성년 자식이 있는 트랜스젠더는 법적 성별을 정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http://goo.gl/5QWWE ).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1950년대 조겐슨을 ankle로 조롱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성애 가족의 취약한 구조가 폭로되었기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불안, 이성애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불안, 이성애 가족 구조가 결코 자연스러운 형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거죠. 이 불안과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법은 금지를 선언하고, 언론은 어떻게든 조롱하려고 합니다.
규범이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살얼음보다 취약한 구조인 지배 규범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