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기.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 ftm/트랜스남성, 트랜스젠더 소설

임혜기.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 서울: 고려원, 1995.

01
정말 우연이었다. 얼추 열흘 전, 그냥 새로 들어온 책이 뭐가 있나 싶어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란 제목을 발견했다. 새로운 제목은 아니다. 1990년도 소설 중엔 ‘~보고서’란 식의 제목이 종종 있으니까. 어떤 내용인지 확인할 겸 해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책 뒷장에 적힌 소개글을 읽었다.

자궁을 가진 남자, 페니스를 가진 여자,
제 3의 性을 가진 그들이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어…?!?!?!?! 설마 하며 서문을 찾았다.

한 젊은 남자와 우연히 병원에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앉았다. 흰 와이셔츠에 카키색 반바지를 단정하게 입은 그는 조각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중략…]
이튿날 남자가 아기를 안고 아내와 함께 퇴원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남자의 아내는 방금 아기를 낳은 산모로 볼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황홀만 미모의 부부를 바라보는 내 옆에서 누군가가 소곤거렸다. 여자는 전남편의 아기를 낳은 거야. 믿을 수 있겠어?
그날 내가 얻어낸 정보들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 남편과는 아기를 낳을 수 없어 전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여자는 이왕이면 친 동기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양쪽 남자의 동의와 후원으로 인공수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불임인 이유가 나를 경악케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자였다. 모르고 볼 때는 전혀 의심이 안 가는 완전한 남자였건만.
[…중략…]
1995년 7월 뉴욕에서
임혜기

몇 가지 이유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이 1995년에 나왔다는 것, ftm/트랜스남성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번역 소설이 아니란 점! 이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고, 곧장 읽었다. (지난주에 읽고 독후감은 이제 쓴다는;;)

02
작품의 내용을 살피는데 저자의 이력을 반드시 들먹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자의 이력이나 역사를 안다면 작품의 내용을 좀 더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임혜기가 ftm이란 뜻은 아니다. 임혜기가 1980년대부터 미국에 이주해서 살았으며, 이 책이 1990년대 중반에 나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은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이 상당한 파급력을 지니고 등장한 시기다. 이론의 발달, 운동의 증가, 개인의 ‘가시화’가 활발했다. 임혜기가 1990년대 중반, ftm/트랜스남성과 관련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소설에선 ftm/트랜스남성의 수술 방법, 부치와 ftm의 구분 등을 심심찮게 언급하는데 이런 논의 자체가 미국 논의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1990년대 한국소설이 이 정도의 논의까지 다뤘단 말야, 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놀라움, 1990년대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에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여실히 반영한다. 혹은 그 시대에 대한 나의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잊혀진 작품을 (재)발견한 기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무척 만족스럽냐면, 그렇진 않다. 이 소설은 ftm/트랜스남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적잖은 부분이 놀랍지만,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전체 분량으로 따지만 ftm/트랜스남성과 관련한 내용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아울러 ftm/트랜스남성인 세욱이, 자신과 결혼한 진주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는 장면은 어물쩍 넘어간다. 내가 가장 기대한 장면은, 트랜스젠더인 걸 결혼 후에 밝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얘기를 할까 인데, 작가는 이 장면을 암시만 할 뿐이다. 읽기에 따라선 세욱이 주인공이 아니라 세욱과 결혼한 진주가 주인공 같다. 저자의 한계는 명백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그중 일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길어서 more/less 기능으로;;)

[#M_읽기..|..| 세욱은 머리끝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고통을 의식한다. 이 복잡한 과정과 미친 노릇을 거칠 만큼 남근은 탐나는 물건일까. 꼭 있어야 하는가. 모든 남성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자신이 소유하지 못했음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는 걸까. 그는 머리를 떨구고 생각에 잠긴다.(15)

“자매는 사춘기를 보내면서 심한 병을 앓기 시작했어요. 아이덴터티에 대한 갈등이었죠. 언니는 핏줄과 뿌리의 의문에 시달렸고 동생은, 동생은 브레인 섹스에 관한 고민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은 브레인 섹스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 의문의 시선을 교환했다.
“브레인 섹스가 뭡니까?”
재만이 물었다. 세영은 그를 바라보며 입끝을 올리고 웃었다. 설명하기 복잡해요, 하는 것처럼.
“타고난 성과 정신이 원하는 성이 맞지 않는 걸 말해요. 동생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정신적으로 자신이 여자라는 걸 인정 못하는 거죠. 남자에겐 동지의식을 느끼고 여자에겐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거죠.”
[…중략…]
‘알겠어. 레즈비언의 이야기겠군.’(125-126)

“세욱 씨는 어떻게 남자 구실을 합니까?”
세영은 교묘한 웃음을 띄우며 앞에 앉은 얼간이 남자 둘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알기론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따르는 여자가 많았으니까요.”
“성생활이 됩니까?”
두 남자는 방금 꺼 버린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다. 박 감독의 심장 속을 한바탕 역류하는 피돌기가 그의 얼굴빛을 희고 붉게 변모시켰다. 쿵닥쿵닥하는 박동이 제 귀에까지 울린다.
“그의 남성이 완전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임신은 불가능하겠죠. 허지만 더 버라이어티가 있다고 봐야겠죠.”(135)

씬 101/오피스
[…중략…]
욱이: 남들이 무슨 문제야. 넌 결국 니 입장을 생각하는구나. 어차피 네 친구들은 날 남자로 안다며?
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톰보이로 생각하는 것과 남자는 달라. 그냥 그 상태로 살면 표면적으로는 달라지는 혼동 없이 살 수 있어.
욱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흥분을 누른다) 이거 봐 어려서부터 난 한 번도 내가 여자로 생각된 적이 없어. 정신과 육체는 일치해야 마땅해. 난 남자가 싫고 두려웠어. 이젠 아냐. 그것도 수확의 하나지.(171)

영: 꼭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까? 여자가 여자랑 사는 거 이젠 숨기는 시대도 아냐.
욱: 레즈비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꿈에도 안 했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남성이야. 해부학적으로 맞춰 주는 거뿐이야.(203)

“좋아요. 그럼 조건이 있어요. 어떤 식으로 변경할 것인지는 저와 의논하면서 하기예요. 난 진실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당신들은 허위를 팔아먹으려고 하니까요.”
세영은 맥이 빠진 듯했다.
“성전환자는 주인공으로 탐나는 대상이 아니죠. 게다가 당신들은 레즈비언 관계처럼 보여요. 우리 관객들은 구토를 느낄 거예요.”
“인간을 보여 주세요. 성 이전의 인간을 말하세요.”
세영은 얼굴을 붉히며 악을 썼다. 더듬기도 했다.(213)

마침내 긴 탐색이 지나간 후 진주의 곁에 엎드린 세욱은 끊겨진 대화를 이어 가듯이 입을 열었다.
“성은 잡히지 않는 거요. 한계나 조건을 붙이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할 수도 당신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소.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오.”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남자예요.”
진주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허공을 보며 혼자말 하듯 한다.
“난 당신이 원하면 수술을 받겠소. 결혼하기 전에 의사에게 간 적이 있었어.”(266)_M#]

03
소설 뒤엔 문학평론가라는 김미현의 해설이 실려 있다. 해설을 잘 안 읽는 나지만, 이 소설의 해설은 읽지 않을 수 없다. 근데 이 해설이 대박이다. -_-;; 말이 필요없다. 그냥 확인하자.

임혜기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는 충격적인 성에 대해 과격하게 말하는 소설이다. 그렇게 말하기를 선택한 소설이다. 임혜기는 이 소설에서 「제3의 성」에 대해 말한다. 시몬느 드 보봐르에 의하면 남성에 비해 부차적이고 종속적이며 타자화된 여성은 「제2의 성」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의 소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1의 성도 아니고 제2의 성도 아니기에 이중적으로 고통받는 제3의 성을 소유한 소수집단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게이나 레즈비언, 성전환자들이다. 그들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그 둘 모두이거나 그 둘 모두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을 구분할 수 없다.(290)

그녀는 동성애자들이나 성전환 수술자들 같은 음습한 성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도록 요구한다.(291)

이것 말고도 많다. 그럭저럭 괜찮은 소설에 실린 당혹스러운 해설이랄까. 글쓴이의 인식론이 만들어낸 비극이랄까. 뭐, 이경의 글 이전에 등장한, 언급할 만한 글을 발견했다는 게 나름 의의라면 의의다.

줄리 앤 피터스. 『루나』: 트랜스/젠더 성장 소설 혹은 관계 맺는 방식

줄리 앤 피터스. 『루나』. 정소연 옮김. 출판예정.

거리를 오가다 보면 아주 가끔 ‘아, 저 사람 mtf구나’란 걸 눈치 챌 때가 있다. 그에게서 어떤 티가 유난히 나서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생티”가 나서도 아니다. 그냥 어떤 느낌이다. (즉, mtf가 아닐 수도 있다. -_-;) 그이가 mtf란 걸 깨달을 때마다 난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서로 모르는 척 마주쳤지만, 앞으로 다시 마주칠 가능성 없이 지나쳤지만 그래도 조금은 반갑다. 그런데도 슬픈 건 어떻게든 눈치를 챘기 때문일까?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로 노출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통하길 원하는지 알 수 없거니와 드러나는 게 좋은지 드러나지 않은 게 좋은지도 판단하기 쉽지 않다. 어떤 mtf는 ‘비트랜스여성’으로 통하길 원할 테고, 어떤 mtf는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할 테고, 어떤 ftm은 ‘비트랜스남성’이 아니라 ftm으로 통하길 원할 테다. 개인마다 다 다르다. 상황마다도 다르다.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는 mtf라고 해서, 매 순간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대중 속으로 사라지길 원할 테고, 어떤 자리에선 트랜스젠더로 드러나길 원할 테다.

그러니 통과한다는 것, 패싱(passing)한다는 건 동화하여 사라진다는 의미도 아니고, 자신을 숨긴다는 의미도 아니다. 패싱은 특정 코드를 인용하며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한 공간에서도 몇몇 사람들에겐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비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할 수도 있다. 익숙한 사람들에겐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지만, 낯선 사람들 중 몇몇에겐 트랜스젠더로, 몇몇 사람들에겐 헷갈리는 상태로, 몇몇 사람들에겐 비트랜스젠더로, 몇몇 사람들에겐 무관심한 존재로 통하길 원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자리에서 통하길 원하는 방식이나 욕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난 언제나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지만, 사람들이 날 트랜스젠더로 인식하길 원하지만, 트랜스젠더로 드러나는데 일말의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로 드러나는 동시에 드러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일까? 아니,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반갑고 조금 기쁘면서도 슬픈 이유는.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그이가 어떤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것 정도다. 그 이상, 내가 무얼 바랄 수 있으랴.

지난주에 『루나』란 소설을 읽었다. 출간된 책은 아니다. 미국 10대 mtf/트랜스여성을 다룬 소설인데, 옮긴이가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에 감수를 요청해서 초벌번역을 받아 읽었다. A4로 15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인데도, 단박에 읽었다.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불안해서, 너무 궁금해서.

주인공 혹은 화자는 mtf/트랜스여성이 아니라 그의 여동생, 레이건이다. 소설 제목 『루나』는 mtf/트랜스여성의 이름. 법적 이름은 리암이지만, 한땐 리아 마리로 자신을 불렀고, 현재는 루나로 부르고 있다. 달빛이 비치는 어둠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루나(luna). 학교에선 천재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어, “미국 A급 대학”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로비를 벌일 정도다. 알바로는 출시예정 게임의 난도 테스트를 하는데, 게임회사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그를 고용하려고 한다. 뭐, 이런 인물이지만 주변에선 그를 ‘남자’이자 ‘아들’로 인식하고, 그 자신은 자기를 ‘여성’ 혹은 mtf/트랜스젠더로 인식하고 있어 갈등한다.

소설 속 화자인 레이건은, 루나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루나를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괴롭고 힘들다. 레이건도 사실은 리암/루나가 성전환수술을 한다거나, ‘여성의 옷’을 입는 게 내키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싫은 내색 못 하고, 모든 걸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혹은 행동해야 한다). 아울러 루나에게 온 신경을 다 쏟다 보니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원하는 걸 놓칠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럼 부모님들은 전혀 모를까? 아빠는 리암/루나에게 ‘씩씩하고 활동적인 아들’ 역할을 강요한다. 리암/루나가 ‘사내답길’ 바라고 항상 운동을 하길 바란다. 물론 아빠는 리암/루나 몰래 레이건에게, 리암이 혹시 게이냐고 묻긴 한다. 게이는 아니기에, 레이건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일단은 회사 일에 바빠 루나(뿐만 아니라 여타의 가족 모두)에게 무관심한 것으로 나온다. 더 쓰면 스포일러라 생략하지만, 이런 가족 구성원들 속에서 루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소설이 좋았던 건, 루나가 아니라 레이건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어서다. 트랜스젠더 개인들이 읽어도 좋을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비트랜스젠더들에게 권하기에도 좋을 책이랄까. 트랜스젠더의 갈등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비트랜스젠더들의 고민 혹은 어려움에 조금은 관심이 있어서일까, 난 이 책의 구성이 상당히 괜찮았다.

이런 전반적인 흐름과는 별도로 내가 유난히 끌린 부분은 두 곳.

하나는 아빠가 레이건에게 리암/루나가 게이냐고 묻는 장면. 게이는 아니니, 레이건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나중에 아빠는 레이건에게 화를 낸다. 난 이 장면에서 예전에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친척들과 있던 자리에서 내게, “혹시 남자에게 관심 있어?”라고 물었던. 질문을 한 사람은 게이냐는 의미였을까? 혹은 이성애-mtf/트랜스젠더냔 의미였을까? 확인하지 않았으니 예단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어느 의도였건, 난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단 사실이다. 그리고 곤혹스러웠다. ‘아니’라는 대답의 복잡함을 그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여성스럽지만 이성애 남성’이란 의미로 이해했을까, ‘레즈비언 트랜스’로 이해했을까? 물론 후자의 이해를 기대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니 그럴 가능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아니다’는 부정 혹은 부인의 대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종종 간단하게 이해되어 곤혹스럽다.

다른 하나는 호르몬 투여 등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루나가 ‘여성의 옷’을 입고 레이건과 외출하는 장면. 읽는 내가 더 불안하고 흥분했다. [약간의 스포일러이니 읽을지 말지 잘 판단하세요.] 첫 외출에서, 레이건은 루나가 너무 평범해 보인다며 결코 들키지 않을 거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하지만 루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눈치 챈다. 어떤 이들은 뒤에서 좇아와 놀리기도 하고,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조롱하기도 한다. 일부 트랜스젠더들은 ‘가장 평범한 여성’ 혹은 ‘가장 평범한 남성’으로 통하길 원한다는 점에서(한채윤 님의 예리한 분석에 고마움을!) “여자처럼 보여”보다는 “평범해 보여”란 평가를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노출되고 ‘평범함’으로 통하는데 실패한다.

이런저런 감상을 다 떠나서 성장소설로도 좋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도 괜찮다(소설은 레이건의 ‘표면적 이성애 관계’를 기술하는데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얼른 나오기만 바랄 뿐이다.

아그네스, 어느 트랜스젠더의 생애를 재해석하기.

#국내 포털 기준, 성인인증을 거쳐야 하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ㅡ_ㅡ;;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 조금은 불편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단 소리죠.

Garfinkel, Harold. “Passing and the Managed Achivement of Sex Status in an “Intersexed” Person Part 1.” Studies in Ethnomethodology. By Garfinkel.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967. 116-185.

1950년대 말이었나. 미국의 한 ‘여성’이 한 명의 정신과 의사(혹은 정신분석학자)와 한 명의 사회학자를 찾아갔다. 그는 두 명의 ‘전문가’에게 자신을 간성으로 소개하며, 남자아이로 자랐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면 트랜스젠더, 간성 관련 연구를 막 시작하던 무렵이다. 정신과 의사와 사회학자는 트랜스젠더와 간성 관련 해서 어느 정도 지명도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다른 의사의 추천으로 이 둘을 찾아갔다.

아그네스(Agnes)란 이름으로 불린 그 ‘여성’은 당시 의학에서 상당히 새로운 존재였다. 고환과 음경이 소위 규범적 형태로 불리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가슴이 상당히 발달한 상태였다. 머리는 금발로 길었고 손이나 발이 조금 크긴 했지만 체형 역시 여성형이었다. 전문가라 불리는 두 명의 표현을 빌리면, 아그네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냥 여성’이란 점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문가라 불리는 두 인물의 이름은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와 해럴드 가펑클(Harold Garfinkel).

아그네스는 스톨러와 가펑클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생애사를 얘기했다. 가족들과 주변 이웃들 모두 자신을 소년으로, 남자아이로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으며, 항상 여성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괴리감을 느끼며 자라다 어느 순간 이차성징으로 소위 남성형 성적 특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0대 중반이 될 무렵, 여성형 성적 특질도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의료적 조치도 취한 적이 없는데 에스트로겐이 고환에서 분비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그네스는 기뻤다고 한다.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로 변하면서 여성의 성역할을 새롭게 배웠고 남들에게 여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그네스의 고민은 외부성기형태였다. 남성형 외부성기는 그에게 상당히 불편했다. 이성애자인 아그네스는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때때로 성관계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외부성기형태를 말하길 원치 않았다. 외부성기형태 뿐만 아니라 소년으로 자라야 했던 역사도 말하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아그네스의 욕망은 실현하기 힘들었다. 외부성기형태 재구성수술은 그에게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여성처럼 보이길, 여성으로 통하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normally, naturally”) 보이길 원했다. 남자로 자랐다는 역사, 간성이라는 몸의 조건, 십대 후반에야 여성다움을 배워야 하는 상황을 다른 이들이 알지 않길 바랐다. 아그네스는 이런 저런 고민을 스톨러와 가펑클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스톨러와 가펑클은 각각 아그네스와의 인터뷰에 뿌리를 둔 연구결과물을 출판했다.

첫 연구결과물이 출판되었거나 출판되기 직전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스톨러와 가펑클은 아그네스가 간성이라고 믿었다. 의료 조사 역시 아그네스가 간성이라고 판정했다. 아그네스는 에스트로겐이 자연스럽게 분비되었다고 증언했고, 이에 의사들은 분비기관이 고환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첫 만남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아그네스는 스톨러에게 자신은 10대 중반 즈음부터 에스트로겐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에스트로겐의 출처는 어머니였다. 아그네스의 어머니는 에스트로겐 약을 복용해야 하는 처방전이 있었다. 아그네스는 약국에 가서, 어머니의 처방전으로 약을 대신 사는 것처럼 말하며 약을 샀고, 그 약을 먹었다.

비록 4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이 일화는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아그네스의 경험은, 이차 성징이 발생하기 직전부터, 혹은 그 즈음부터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신체 외형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10대에 호르몬 투여를 원하는 경험적/’생물학적’ 근거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의료적 조치에 반대하는 적잖은 논리 중엔 “10대는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이니 성인이 되면 그때 시작하도록 하자.”란 주장이 있다. 문제는, 20대에 호르몬을 시작하면 10대에 시작하는 것보다 효과가 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mtf/트랜스여성이면 남성형 성적 특질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상당하고, ftm/트랜스남성이면 여성형 성적 특질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는 시기가 늦을 수록 사회에서 ‘이질적이고 어색한 존재’로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10대엔 호르몬을 비롯한 의료적 조치를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란 티가 나야 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차 성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후 의료적 조치를 시작할 경우, 더 많은 수술을 해야할 가능성이 크단 점에서 ‘성’을 바꾸려면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기도 하다. 그럼 언제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10대는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란 식의 언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점이다. 10대에만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혼란은 평생 경험한다.

아그네스와 인터뷰한 가펑클의 글을 읽으면 음경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음경에서 어떤 성적인 감각을 느끼지 않으며 결코 발기하지 않는다고 가펑클에게 말한다. mtf/트랜스여성과 음경/페니스의 관계는 대체로 이와 같다. 적잖은 자서전, 공적 인터뷰와 같은 글에서 음경은 부인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너무너무너무 끔찍할 뿐이라 쳐다도 보기 싫다는 식이다. 자신의 외부성기를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반응은 트랜스젠더의 자기 몸 인식에 있어 널리 알려진 방식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는,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할 때 음경 혹은 페니스를 뒤집는 기술을 선택하면서 발생한다. 소위 여성형 외부성기형태를 갖추기 위해 음경 혹은 페니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하지만 너무도 필요한,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또한 항상 존재하는 “아이러니.”

“아이러니”란 단어는 가펑클이 아그네스를 평가하며 사용했다. 이것은 가펑클의 한계이자, 가펑클과 아그네스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다. 공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개개인들의 관계에서 나누는 얘기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음경 혹은 페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공적으론 끔찍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성적인 쾌락을 포기하길 꺼리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음경 혹은 페니스에 부여하는 통상적인 의미(남자의 상징)가 아니라 단순한 신체기관, 살덩어리, 성적 기관으로만 이해하기도 한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해들이 모든 자리에서 통용되는 건 아니다. 트랜스젠더, 성전환의 진정성 혹은 완성을 측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의 여부인 문화에서 외부성기는 끔찍해서 없애야만 한다. 여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성적 감각에서 중요하다는 식의 언설은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 “너 진짜 트랜스젠더 맞아? 너 가짜지?”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한국에선 “군대 가기 싫어서 트랜스젠더인 척 하는 거지?”라는 반응을 유발한다. 이런 문화적인 상황에서 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내용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스톨러와 가펑클에게 자신의 음경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걸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펑클에겐 “아이러니”겠지만 아그네스에겐 전략적 발화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아그네스가 가펑클과 스톨러에게 자신을 간성으로 소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전략적 발화라고 해서, 음경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고민은 ‘여자’와 ‘규범’이다. 가펑클은 아그네스에게 여자로 보이고 통하길 원하는 거냐고 질문한다. 아그네스는 가펑클에게 자신은 여자로 보이거나 여자로 통하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길 원한다고 말한다. 가펑클은 아그네스의 이 말이 혼란스러운 듯 하다. 나는 아그네스의 이 말이 상당히 멋지다고 느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펑클이 정의하는 여자와 아그네스가 정의하는 여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펑클에겐 여자라는 어떤 원본, 진짜 여자라는 상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가펑클이 ‘여자처럼 보인다’라는 말은 ‘진짜 여자,’ ‘생물학적 여자’를 모방하고 따라하길 원한다는 말과 같다. 가펑클의 말은 아그네스가 ‘여자’도 ‘여성’도 아니지만 어쨌든 ‘여자처럼’ 보일 수는 있다는 걸 암시한다. 아그네스는 여자처럼 보이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길 원한다고 답하는데 이때 여자는 이미 결정된 요소가 아니다. 누구나 여자처럼 보일 수 있고, 트랜스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얼마나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느냐이다. 이럴 때 핵심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한 사회의 젠더 규범을 얼마나 잘 인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소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는 데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했을 때 받는 타격의 정도는 각자가 다를 것이다. 아마도 아그네스, 혹은 트랜스젠더라면 그 타격은 훨씬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통하는 게 중요한다. 아그네스의 이 말은 젠더 이론에서 30년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하는 말들을 암시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 속상한 건 하나다. 아그네스의 본명도, 그가 남긴 글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러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분석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