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올란도]

모로코였던가. 카사블랑카와 함께 떠올리면 되니, 맞는 것 같기도 하나. 1970년대 즈음의 미국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모로코로 갔다고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엔 덴마크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Go to Denmark”(덴마크에 가다)는 성전환수술을 하러 간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덴마크의 법이, 외국인은 덴마크에서 성전환수술을 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바뀌면서, 모로코로 가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들은 며칠 정도 입원했을까.

하지만 굳이 미국의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의 한국에 살고 있는 트랜스들은 태국에 가서 수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태국영화, [샴]엔 한국의 의학기술이 상당해서 태국에선 고칠 수 없는 병은 한국에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정작 한국의 재벌들이나,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은 미국으로 가던가.) 영화 초반의 공간이 한국이니 이런 식으로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다른 한 편, 한국에 있을 땐 “귀신”이 안 나왔으니까), 적어도 성전환수술에 있어서만은 태국의 기술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한국에서 성전환수술의 “권위자”(혹은 자처하기를 “트랜스젠더들의 아버지”)들이 아무리 수술을 잘 한다고 광고를 해도, 현재로선 태국의 몇몇 병원들이 더 잘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대충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한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를 읽으면서 엄청난 작품이라고 느꼈다. 아는 사람은 대충 내용을 알겠지만, 대략 400년이란 시간을 36살이란 나이로 살아가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change of sex”)을 경험한 올란도란 사람의 전기소설이다. 근데 이 소설에서 성을 전환하는 장면이 재밌다. 러시아 공주에게 퇴짜 맞고 앓다가, 올란도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사로 간다. 그곳에서 여러 날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일주일간의 깊은 잠에 빠지고 그 사이에 “여성”으로 바뀐다. 이 장면, 올란도가 살았던 영국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것도 일주일간의 잠에서 깨어나자 성이 바뀌어 있는 장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트랜스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지만, 단지 우연의 일치지만(일주일간의 입원과 일주일간의 잠이라니!), 이 장면에서 만큼은 이 소설을 트랜스젠더 소설로 읽고 싶었다.

물론 울프가 이 소설이 나왔을 즈음, 화제였던 성전환에 대해 몰랐을 리 없다고 상상한다. 울프부부가 세운 출판사에서 프로이트의 책들이 번역되었고, 프로이트와 만난 적도 있다고 하니, 그 심증은 굳어진다. 물론 울프는 전혀 몰랐을 수도 있지만, 성전환수술이 가능하고, 실제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기사로 떠들썩했던 시대에 울프가 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상상하기도 했다, 어쩌면 울프는 이런 성전환수술과 관련한 정보를 들었던 건 아닐까 하고, 이런 정보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하고.

울프가 쓴 작품의 맥락에서 [올란도]를 통해 말하려한 내용은 “양성성”이지만 때로 작품의 맥락을 무시하는 상상은 재밌으니까. “여성”으로 변한 올란도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장면도 자주 나오고, 결혼한 파트너 쉘과는, 서로의 성별을 바꿔 부르기도 한다(쉘은 올란도에게 “남성”이라고, 올란도는 쉘에게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더구나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이르면 2,000개 정도의 자아들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불러들이는 멋진 장면도 있고.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게 2000년인가 2001년 즈음이니, 정말 오래 되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내용들이, 너무도 짜릿하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소문만큼 그렇게 어려운 작가도 아니고, [올란도]는 그 중에서도 무척 수월하게 읽을 수 있으니, 퀴어와 관련해서 관심 있는 분이라면(이미 레즈비언 소설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더더욱, 한 번 정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 미녀는 괴로워, 트랜스젠더

01
필수 한 과목에 선택 두 과목(인문학+사회학)으로, 총 세 과목의 종시과목 중, 인문학으로 선택한 과목은 당연히 루인의 지도교수에게서 들은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두 문제를 출제했는데, 하나는 페미니즘 문학 비평사를 개괄하는 것으로, 영미페미니즘 논의와 프랑스 페미니즘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별 작품을 분석하는 것. 두 번째 문제의 작품들은, 루인이 직접 선택하고 선생님께 승인받는(괜찮은지 안 괜찮은지의 여부) 걸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쟈넷 윈터슨의 [육체에 새겨지다]였다.

의도하지 않게 세 작품 모두 영국출신의 작가들이었고, 그 중 윈터슨은 다른 작품을 선생님 수업시간에 다룬 적이 있고, 울프는 직간접적으로 수업 내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가였고, 매리 셸리는, 뒤늦게 깨달았는데, 선생님의 전공인 낭만주의 작가였다. -_-;; 아무려나 각각의 작품에서 젠더수행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분석을 했고, [프랑켄슈타인]은 트랜스젠더 혹은 신체변형/외과수술을 통해 구성한 몸이란 주제로 접근했다.

02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의 전신성형을 집도한 의사, 이공학은 아내와 잠자리에 드는 걸 두려워하는 인물로 나온다. 아내 역시, 한나처럼, 이공학에게서 전신성형수술을 받았고, 바로 이런 이유, 즉 전신성형수술을 한 몸이란 이유로 이공학은 아내와 접촉하는 걸 무척 두려워한다. 성형수술의사이지만 성형한 몸-외과적으로 구성한 몸을 두려워하거나 끔찍하게 여기는 셈이다. 신체변형과 관련한 두려움은 역사적으로 오래되었지만, 특히나 근대에 들어 사회에 적합한 노동하는 몸을 만들면서 신체를 훼손하는 것 자체가 범죄가 되고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 신체훼손이나 자해는 정신병 진단목록에 올라 있고,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의 상당 부분도 이러한 신체변형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런 혐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꼭 수술을 해야 하나요?”, “왜 멀쩡한(건강한) 몸을 바꾸느냐”와 같은 말들에서 읽을 수 있다. 인터넷리플을 통해 드러나는 하리수를 향한 혐오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있고.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물/괴물을 향한 공포와 혐오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있다고 느꼈다. 셸리가 이 소설을 쓴 시기는 근대합리성과 이성중심주의, 동시에 낭만주의가 공존하던 시기였고, 창조물/괴물은 여기저기서 모은 재료로 덕지덕지 “땜질”해서 만든/구성한 존재이다. 이렇게 외과적으로 구성한 몸이란 것,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인식이 창조물/괴물을 공포로 여기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을 “공포”소설로 부른다면, “공포”가 발생하는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창조물/괴물의 탄생 배경일 거라고.

03
종시를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깨닫고 감동한 구절은, 다름 아니라, 창조물/괴물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단 한 가지는 “행복”이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행복해지기 위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의 파트너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저 행복해지길 바랐을 뿐이지만, 이런 바람이 창조물/괴물에겐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슬펐다.

04
선생님과 구술시험을 보다가 배운 것 하나.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면에서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시,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와 닮았다고 한다. 콜리지 시의 내용을 인용/차용하고 있기도 하단다. 그래서 현재 복사한 상태. 언젠간 읽겠지. 흐흐.

양성애/bisexuality와 관련한 논문 몇

Ruth Goldman, “Who is that Queer Queer? Exploring Norms around Sexuality, Race, and Class in Queer Theory”
Amber Ault, “Hegemonic Discourse in an Oppositional Community: Lesbian Feminist Stigmatization of Bisexual Women”
Christopher James, “Denying Complexity: The Dismissal and Appropriation of Bisexuality in Queer, Lesbian, and Gay Theory”
in Brett Beemyn and Mickey Eliason eds. Queer Studies: A 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Anthology, New York and London: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6

지난주에, Queer Studies에 실린 논문 중, 몇 편을 골라서 읽었는데, 그 중 세 편은 양성애/바이섹슈얼과 관련한 글이었다. 양성애와 관련해서 읽은 글이라면, 아마 작년에 읽은 퀴어이론과 관련한 개론서에서 언급한 부분이 전부일 듯. Queer Studies와 작년에 읽은 책의 출간 시기가 얼추 비슷해서인지, 핵심 주장은 크게 많이 다르진 않다. 다만, Queer Studies에 실린 논문들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좋았달까. 세 편의 논문을 좋았던 순서로 꼽으라면, Goldman-James-Ault 다.

Goldman의 논문은 제목이 좀 헷갈렸는데, 첨엔 저 제목을 “누가 퀴어를 퀴어로 만드는가(누가 퀴어를 퀴어화하는가)”로 해석했달까. 기본적인 영어문법도 무시하는 이런 해석에 찬사를-_-;;; 두 개의 퀴어(queer) 중에서 앞의 퀴어가 주어고 뒤에 나오는 퀴어가 동사라면 후자에 s/es가 붙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건, 주어-동사 관계가 아니란 의미이다. 그런데도 주어-동사로 해석했으니, 이 무식함을 어쩔 거야. ㅠ_ㅠ 그러니 다시 해석하면, “그토록 퀴어한 퀴어는 누구인가?” 정도랄까. 앞의 퀴어는 뒤에 오는 퀴어의 수식어인 셈.

아무튼 세 편의 논문을 무식하게 요약하면, 양성애는 박쥐처럼 “남성”과 “여성”을 모두 좋아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오직 한 젠더만을 좋아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양성애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로 가는 일종의 중간 단계가 아니란 것. 그러며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논의에서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언급할 것이 아니라 양성애 역시 언급하고 감안할 것을 의미한다.

일테면, 영화 [영원한 여름]을 해석하며, 루인은 게이만 언급했는데, 사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관계를 게이-이성애-이성애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게이-바이-이성애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바이-바이-바이로 해석할 수도 있고, 게이-바이-패그해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소위 “같은 젠더”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관계를 반드시 “동성애”로 해석할 이유가 없으며, 이성애-동성애란 식의 구분과 해석은, 이분법을 강화하는 방식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Goldman이 좀 더 매력적이었던 건, 퀴어관계에 인종이나 계급을 교차해서 분석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1993년 MTV 공연에서, 마돈나는 “This is Not a Love Song”을 부르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부치역할의 여성과 다른 세 명의 펨 역할의 여성이 무대에 등장한다. 이 공연을 분석하며, Goldman은 읽기에 따라선 퀴어공연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 인종이 개입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고 말한다. 즉, 부치역할의 세 명은, 마돈나, 백인여성, 아프리칸-아메리칸 여성인 반면, 펨역할의 세 명은 아시안-아메리칸 여성들이란 것. 이는 아시아여성은 “수동적이고, 이국적이며, 더욱더 여성적인 타자”라는 걸 강화하는 방식임을 지적한다.

젠더, 섹슈얼리티 외에도 인종이나 계급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 이렇게 분석하거나 고민하는 글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글은 특히나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