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주절주절

01
너부리 님의 표현을 빌리면, “매주 가장 바쁜 주를 갱신하며 산다.” 일이 많았던 건 아닌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들이라 조금 분주했다. 5월부터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번 주가 끝나면 좀 여유가 있을 듯. 5월부터 시작해서 이번 주가 고점을 찍을 거 같다. 그러고 나면 공포의 10월, 11월까진 여유가 있을 듯하다. 이 두 달 동안 학회 업무 인수인계, 학회 추계학술대회 준비 및 진행, 글 두세 편, 지렁이 협력사업 보고서 작성, 가을부터 시작할 어떤 프로젝트 글쓰기,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정리 등등을 해야 한다. 덜덜덜.

02
지난 달 다이어리를 정리하다, 영어 논문, 한글 논문과 같은 글을 제외하고 단행본만 18권을 읽었단 걸 깨달았다. 살짝 당황했다. 악착같이 읽었구나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책을 읽는 리듬을 되찾은 것뿐이다. 독서에도 흐름이 있고, 리듬이 있다.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는데, 2월부터 애쓴 결과다. 소설을 중심으로 인문사회학 관련 책들을 중심으로 읽고 있다. 물론 책과 논문은 도피 수단으로도 최고다.

03
헌책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사는 책도 많다. 지지난 주엔 주인장들(난 사장이란 표현보다 주인장이란 표현이 정감 있어 좋아한다, 이 표현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 좀 그렇긴 해도;;)이 책을 그만 사라고, 하루에 한 권 이상 안 팔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만날 ‘오늘은 책을 안 살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끌리는 책을 만나면 어찌할 수가 없다. 다짐을 단단하게 해서일까, 지난주엔 많이 줄였다. 이번 주엔 한 권도 사지 않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04
책방에서 일하며 좋은 건, 책을 읽건 글을 읽건 무언가를 읽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거다. 인터넷도 할 수 없고, 후치와 놀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읽는 것뿐이다. 바쁠 땐 그 시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이렇게 충전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하루의 긴장을, 일을 하며 푼다.

05
나의 생활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따지니 참 기묘했다.

현재 비정규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두 개다. 학회 일과 책방 알바. 학회 일은 11월로 끝나고 책방 알바는 정확한 기약은 없어도 언젠가 끝난다. 근데 비정규직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의 정규직은 활동과 공부/학생인데 이 둘은 생계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과 농담으로 자주 하는 얘기인데, 활동만큼 확실한 정규직도 없다. 자신이 원한다면 평생 할 수 있는 직종이다. 사 소 한 문제라면 생계엔 도움이 안 된다는 것. -_-;; 하지만 일 자체가 즐거우니(혹은 괴로우니) 괜찮다. 학생/공부란 일도 내겐 일종의 정규직이다. 가끔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가끔이다.

06
생활비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만, 웃기게도 최근 하루에 한 끼를 간신히 먹는 상황이다. 바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_-;; 카페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나마 두 끼를 챙겨 먹을 수 있는데 학교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냥 저녁에 한 끼만 먹는다. 학교에 들어가면 밖에 나가는 게 귀찮아서 그냥 버티는 거다. ;;; 돈이 굳어서 좋긴 한데 몸이 위태롭다.

07
피곤해서인지 제대로 안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통이 잦다. “뒷목 잡고 쓰러진다”고 할 때의 뒷목에서 통증을 느낀다. 탁, 탁, 때리는 듯한, 튀는 것 같은 통증이다. 편두통이 도지면 뒷목이 아팠지만, 이번엔 새로운 유형이다. 오오, 신기하다. +_+

08
자막 작업을 했지만, 정작 영화제 기간 동안은 극장에 안 들어갔다. 자막에만 신경 쓸 거 같아서. 일테면 ‘아, 저기선 1초 정도 시간을 더 줘서, 사람들이 읽기 편하게 해야 했는데’라거나, ‘저기선 0.5초 정도 자막이 늦게 나왔어야 더 좋았을 텐데’라거나, ‘저 자막은 저렇게 말고 좀 다르게 끊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고민만 할 거 같아서. 흐흐

영화제 자막은 한 줄에 11자, 한 번에 총 두 줄이 등장할 수 있다. 영화제에 간 적이 있다면 아실 듯. 그래서 한 번에 띄어쓰기 포함 최대 22자를 출력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글자를 어디서 끊는 게 좋을까로 고민한다. 글자의 개수로 끊어야 사람들이 읽기 편할지, 단어를 단위로 끊어야 사람들이 읽기 편할지와 같은 고민이다.

“난 단지 내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란 문장을 예로 들자. 이 문장을 끊어주지 않으면 자막 화면에 나오는 글자는 “난 단지 내 삶을 살고 싶”까지는 완전하게 나오고 “을”은 윗부분에서 잘린다. 그럼 “싶”과 “을” 사이에서 끊는 게 좋을까, “살고”와 “싶을” 사이에서 끊는 게 좋을까와 같은 고민을 하는 거다. 흐흐. 이 문장을 한 줄로 출력하고 싶으면 “난 단지 내 삶을 살고 싶다”로 수정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다”가 잘려 나온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 하나는 결국 두 줄로 출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다시 한 번 글자의 개수를 줄여 “난 내 삶을 살고 싶다” 혹은 “단지 내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을 살고 싶을 뿐”과 같은 방식으로 바꾸는 것. 자수를 줄일 때 부담스러운 건 뉘앙스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 영화관에 가면 자막 기술에 더 신경 쓸 거 같다. 내년에도 자막 작업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잘해야지.

우리 마을 이야기3

사건일지 6: 황씨. 입주자. 3-2001 거주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했으니 우연이죠. 원래 조퇴가 안 되는 회사인데 그날 제 몸이 좀 많이 안 좋았어요. 아침에 회사에 가서도 계속 엎드려 있어야 했죠. 열이 많아서, 그날 아침 회사 입구에서 사장님과 마주쳤지만 못 알아 볼 정도였죠. …. 당신도 출퇴근 하는 입장이니 알 것 아닙니까. 공무원이라 모르나 …. 아, 아닙니다. 그냥 혼자 한 말이에요. 암튼 요즘 워낙 불경기인데다 회사 규정이 엄격하고 요즘 인사고과 기간이거든요. 그러니 별 수 있어요? 기절해서 병원에 실려 가지 않는 이상 회사에 가야죠. 그저 칼퇴근이나 노릴까 했는데, 팀장님이 외근 가는 것으로 처리할 테니 집에 가서 쉬라고 해서 간신히 일찍 퇴근할 수 있었죠.
시위 하는 건 그날 처음 봤어요. 아침 일찍 나와서 저녁 늦게 퇴근하고, 혼자 사니까요. 이사 온지 얼마 안 되었고, 워낙 사람들 만날 시간이 없잖아요. 지난 아파트에선 이웃들과 간단한 인사는 하고 지냈죠. 근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사람들과 마주칠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애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낯설었어요. 이 동네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싶었달까요. 더욱이 시위하는 장면이 꼭 사람 사는 동네같은 느낌이라 거슬리진 않았어요. 몸만 좋았어도 벤치에 앉아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죠.
그날 제가 입은 옷이요? 그건 왜 묻죠? … 글쎄요. 기억 안 나는데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날 몸이 안 좋아서 사장 바로 앞에서 사장이 있는 것도 못 볼 정도였는데 그날 제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별 쓸데 없는 걸 왜 묻죠? 혹시 …. 어쨌거나 그날 전 일찍 퇴근했고, 집에 바로 들어 갔어요. 그건 출입기록이라도 열람하면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암튼, 아파트 입구를 지나 건물로 힘들게 걸어 가는데, 갑자기 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린 분명하게 들었어요. 제가 소리엔 유난히 예민하거든요. 비명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요. 비명은 누구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전, 그냥 시위꾼들이 홧김에 술병을 바닥에 던졌나 했죠. 비명이야 자기들끼리도 지를 수 있잖아요. 그때 제가 몸만 안 아팠어도, 그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 원주민들 짓이 분명해요. 이 동네 원주민들 유명하잖아요.
특이사항: 그날 입은 복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음.

사건일지 7: 박씨. 입주자. 1-101 거주.
솔직히 말합시다. 전 지금까지 당신네들이 돈이라도 받은 줄 알았소. 아니 어떻게 만날 저렇게 시끄럽게 시위를 하는데 어떤 조치도 안 취할 수가 있냔 말이야. 내, 그래서 서장이랑 원주민 대표랑 그렇고 그런 사인가 했소. 뭘, 그렇게 놀라요? 아, 신참이구나. 경찰과 마을 유지 간의 밀착이야 유명하잖아. 이 동네면 더 심하겠지.
명예훼손? 무슨 명예훼손? 그럼 난 당신들 직무유기로 소송할 거야. 도대체 내가 진정을 몇 번이나 넣었는데 당신들 한 번이라도 신경 쓴 적 있어? 내가 사는 집 바로 앞에서 시위를, 그것도 그렇게 큰 소리로 하는데 당신 같으면 화가 안 나겠어? 당신 책상 앞에서 만날 고성이라도 질러 줄까? 난 이게 원주민들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당신들의 직무유기와 나태가 만든 사건이라고 생각해. 내가 처음 진정서를 냈을 때 시위를 막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 참내.
암튼, 그날도 베란다에 나갔지. 문 닫으러 나가지, 뭐 하러 나가? 아이는 … 글쎄, 기억이 안 나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니, 아이가 있었겠지 않겠소? 설마 …. 암튼, 원주민들 시위는 그날도 유난했지. 근데 그날은 좀 더 요란했어. 심지어 새총으로 우리 집을 겨냥하고 있더라고요. 내, 진짜, 유리창만 깼어도 가만 안 있었어. 그냥, 그 길로 한바탕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지. 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특이사항: 욱하는 성격은 경비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고 함. 이사 당일에도 경비와 한 바탕 했다고 한 경비가 증언.

사건일지 8: 채씨. 원주민. 48-09 거주.
아이고, 이형사, 오랜 만이야. 부모님은 안녕하시고? …. 아, 뭐 그러지.
그날도 참가했지, 아마. 글쎄. 일단 얼굴은 내밀어야 해서 나가긴 했는데, 아마 뒤쪽에 있었을 거야. 내 나이도 있고 하니 앞에 나서기가 뭣하잖아. 그래서 잘은 모르겠어.
에이, 무슨.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앞에서 연설을 하겠어. 사람들이 착각한 걸거야. 아님 다른 날이랑 헷갈렸거나. 내, 한 번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긴 해. 그래도 그날은 아냐. 아, 이 사람아, 진짜야.
애는 모르겠는데. 본 적 없어. 난 몰라. 그만해.
특이사항:

사건일지 9: 홍씨. 원주민. 48-21 거주.
글쎄 …. 아이는 잘 모르겠는데. 본 것 같기도 하고,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암튼, 그날 채 선생님이 멋드러지게 연설을 하고 계셔서 다른 덴 신경을 거의 안 썼지. …. 무슨 소리야, 그날 채 선생님이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이 선생님이랑 주도권으로 다툴 정도였다고. 알잖아.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거. 그날은 아예 주민들 앞에서 싸우더라고. 사실 싸우기 좋잖아. 시위자리니 시끄러워도 묻히기 쉽고.
소주병? 아냐. 나 아냐. 누가 그래! 나 요즘 술 끊었어. 이 선생님은 확실히 마셨고, 채 선생님은 잘 모르겠는데, 암튼 난 아냐. 안 마셨어. …. 무슨 소리야. 지문검사를 왜 해? 이거, 나 의심하는 거야? 니들은 위아래도 없냐? 응? 내가 니들 어릴 때부터 돌봐 줬는데, 이제 와서 이러기야?
나, 원, 해도 정도껏 해야지.
특이사항: 채씨(사건일지 8 참고)와 종일 같이 행동했다고 함. 시위 도중 사라졌다가 그날 저녁 늦게 집에 돌아 옴.

사건일지 10: 방씨. 아파트 경비원.
그날 출입구를 담당한 건 맞아요. 시위할 시간에 사람들이 몇 명 출입하긴 했어요. 다 입주자들이죠. 출입기록이 남을 테니, 확인할 수 있을 걸요.
카메라요? 아, 방범용 CCTV요? 그게 사람 안면인식 카메라라고요? 에이, 설마요.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고 그 정도의 기술을 고작 이 아파트 단지에 도입하겠어요? 잘은 모르지만 아닐 거예요. 출입카드만으로도 충분한 데 그런 기술을 쓸데없이 왜 도입하겠어요. 들은 바도 없고요.
낯선 사람 출입은 없었어요. 이건 확실해요. 제가 사람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거든요. 얼굴이랑 사는 집이랑 거의 다 외우고 있어요. 그래서 낯선 사람들은 없었어. 자리를 비운 적이 있냐고요? 자리를 비우려면 단지를 관리와 임시로 교대해야 하니, 입구 경비실에 사람이 비는 경우는 없죠. …. 아,  아니, 그게 …. 아니, 그 자식은 왜 쓸데 없이 그런 얘기를 ….
사실 전날 친구들을 만나 술을 좀 많이 마셨거든요. 그래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급하게 화장실을 간다고 잠시 비우긴 했어요. 교대를 기다리기엔 너무 급했거든요. 그래도 5분도 안 걸렸어요. 설마 그 사이에 누가 왔다 갔겠어요? 그 일이 생기려면 못 해도 10분은 걸릴 걸요? 문을 지나는 것 자체가 일인데다, 제가 화장실에 언제 갈 지 알고 기다리고 있겠어요. 설마 …, 그럴 리 없어요.

사건일지 11: 황보씨. 원주민. 49-11 거주.
당신들 뭐야! 이거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당신들 이러면 재미 없어. 진짜 곤란하다고.
감히 날 소환하겠다고? 진술은 무슨 진술이야. 소환해서 모든 일을 나한테 덮어 씌우겠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내가 한두 번 당해? 내가 이 마을에 살지만, 이 동네 주민들 성격 자알~ 알아. 그 작자들, 특히 이씨랑 채씨들이 무슨 꿍꿍인지 알게 뭐야.  시커먼 속으로 또 이상한 짓을 했겠지. 뭐야, 그네들이 날 고발이라도 한 거야? 그 자식들이 일을 저지르고 내게 덮어 씌웠겠지. 한두 번 아니잖아.
내가 니들 말을 믿을 거 같아? 니들도 공범이잖아. 날 죽여서 시체를 데려갈 거 아니면, 난 못 가. 헛소리 하지 말라고.
특이사항: 집 입구에서 위의 얘기만 나눔. 동네 원주민들과 조화를 못 이루고 왕따로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