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

01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는 사람이 있다. 아니, 내가 잊으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즈음, 알고 지낸 사람이란 사실 자체를 잊을 즈음, 이름마저 낯설 즈음 연락이 오는 사람. 그래서 연락이 오면 내가 자못 당황하는 사람. 마치 죽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답문자를 하기란 참 어렵다. 예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거의 다 잊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이음새가 너무 헐거워 무난한 답만이 오가고, 무난한 연락 속에서 이음새는 더 삐걱거린다. 언제 잊어도, 언제 잊혀도 당혹스럽지 않은 관계. 친밀한 인사에도 어색함만 감돈다.
(20090125 메모)

02
폭풍의 전야처럼 서로 무난한 말만 주고받다가 기어이 속이 뒤집힌다. 속이 뒤집히는 관계, 적어도 내겐 이게 혈연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는 가족이다.

03
작년 가을 즈음 기존의 전자사전이 고장 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결국 새로 사기로 했다. 사고 나면 결국 영어사전 정도만 사용할 뿐 다른 기능을 사용하지 않지만, 다양한 제품들을 비교하다보면 이런저런 기능에 홀린다. “그래,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을 거고, 저런 기능도 언젠간 사용할 거야…”라면서. 누구나 알지만, 언젠가 사용한다는 말은 결국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사전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SD 메모리 카드를 인식할 수 있고(MP3 플레이어 겸용으로 사용하려고;;), 사전 기능에 충실한 것으로 결정했다. 이제 자금만 모으면 된다. 후후. (뭔가 선후 관계가 바뀐 느낌. 흐흐. -_-;;)

수도관이 얼었지만

어제 밤, 玄牝에 돌아가 씻으려고 수도밸브를 돌렸다. 찬물은 잘 나왔다. 밤엔 찬 물로 씻으니 그러려니 하며 온수로 수도밸브를 돌렸다…. 이런! 물이 안 나왔다. 수도관이 얼었다. 이런, 이런.

수도관이 언 것이 몇 년 만의 일이냐. 예전에 살던 방은 겨울이면 수시로 수도관이 얼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는 건, 동파로 파손되진 않았단 것. 하지만 조금만 추워도 수도관이 얼었다. 그땐 찬물조차 안 나왔다. 그러길 몇 번 반복하자, 난 수도관이 어는 걸 막아준다는 기구를 샀었다. 별 효과가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효과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하네. 하지만 현재 사는 곳에서 수도관이 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리 추워도 수도관이 얼어서 물이 안 나온 적이 없다.

수도관만 언 것이 아니었다. 방은 얼음장이었다. 하얀 입김이 선명하게 보였다. 흐흐. 사실 난 아직까지 난방용 보일러를 안 틀고 살았다. 온수는 매일 사용하지만 보일러로 난방을 할 엄두가 안 나서 그냥 냉방에서 살았다. 전기장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조금 따뜻한 방에서 살고자 난방용 보일러를 틀면, 기름값이 일주일에서 열흘 치 생활비 정도로 나왔다. 몇 년을 이러다가 결국 올 겨울엔 따뜻한 방을 포기했다. 어차피 아침 7시엔 玄牝에서 나오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玄牝에 돌아가니 큰 문제는 없었다. (자치방이 아니라 잠만 자는 방? 흐흐) 근데 이런 상황이, 수도관을 얼게 한 것 같았다. 별 수 있나? 보일러를 틀어 난방을 해야지. 아울러 수도밸브를 조금 열어뒀다. 그래야 얼지 않을 뿐 아니라, 언 수도관을 녹일 수 있으니까.

다행히 얼었던 수도관은 녹았고, 아침에 사용하는데 지장 없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수도관 동파 사고가 많다는 소식이 남일 같지 않았다. 흐흐.

+
쓰기 전엔 웃겼는데, 쓰고 나서 다시 읽으니 지지리 궁상이다. 푸핫.

2008년 최고의 것들

사실 이번엔 2008년도 베스트나 2008년도 정리와 같은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상반기와 하반기의 일상이 너무 빤해서. 근데, 키드님 블로그에서 베스트 3를 읽다가, 다른 건 몰라도 베스트 삽질만은 꼭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는 2008 최고의 3.

1. 최고의 책 3
미야베 미유키. 『스나크 사냥』.
온다 리쿠.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은 열매』.
천운영. 『그녀의 눈물 사용법』.

: 미미 여사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책 중에서 무얼 고를까 고민했다. 마무리만 빼면, 『스나크 사냥』이 단연 돋보인다. 온다 리쿠 역시 고민했다. 그냥 작가 이름만 쓸까? 그래도 하나 고른다면…. 천운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곱씹는 맛이 난다. 예전엔 첫 인상이 너무 강했다. 이번 작품은 다른 듯 같은 느낌이다. 난 아마, 천운영의 작품은 계속 기다리며 읽을 거 같다.
그 외에도 『가위 들고 달리기』, 『나비가 없는 세상』으로 고심했다. 올 초에 미미 여사와 온다 리쿠에 푹 빠져서, 이 둘의 작품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 권에서 빠졌을 뿐이다.

2. 최고의 영화 3
『스위니 토드』
『여자를 사랑한 트랜스젠더』
『블러드 시스터즈』

: 그러고 보면 올해는 영화관에 별로 안 갔다. 덕분에 세 편을 고르긴 쉬운데, 뭔가 아쉽다. 사이보그 『스위니 토드』는 흥미롭다. 영화의 분위기도 인상적이었고. 『여자를 사랑한 트랜스젠더』는 잘 만든 다큐를 보는 재미 이상이었다. 나는 이 다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블러드 시스터즈』는 간단하게 요약하면 질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질투. 그래서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3. (올해 발매 앨범 중)최고의 앨범 3
Portishead 『Third』
백현진 『반성의 시간』
오지은 『지은』

: 정말 10년이 걸린 앨범이 있다. 포티쉐드가 그렇다. 이 정도 앨범이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어도 납득했을 거다. 백현진은, 가사가 좀 불편하다. 그런데, 난 이런 목소리에 끌린다. 요란하지 않게 단조로운 악기 구성이 빚어내는 빼어남. 이 앨범 역시 2003년에 처음 녹음을 시작했으니 오래 걸렸다. 오지은은, 사실 2007년에 나왔다. 근데 나는 2008년에 나온 판본을 샀으니까…. 말도 안 되지만, 뭐, 그렇다. 흐흐. 강허달림과 경합했는데, 오지은을 선택했다. 오지은을 선택하고 싶어서, 살짝 생떼쓰는 거다. 흐흐.
포스트 록이란 말에 로로스의 『팍스』를 샀는데, 시우르 로스(Sigur Ros) 색깔이 너무 많이 나서 잠시 당황했다. 물론 로로스만의 색깔이 있지만, 난 시우르 로스보단 모과이 쪽이 좀 더 좋다는. 흐흐. 그래서 아쉬움을 달래며 제외했다. 김광진과 시와도 기억할 필요가 있네. The Music은 기대치에 못 미쳐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문제였달까. 흐흐.

4. 내게만 최고의 리이슈 음악 5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Experience)
닉 케이브(Nick Cave)
시인과촌장

: 앞의 셋은 말이 필요 없고. 특히 핑크 플로이드는 거의 두 달 동안 얘들만 들은 적도 있다. 흐. 닉 케이브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좋다.
그리고 시인과촌장. 1990년대엔 “가시나무”가 수록된 『숲』이란 앨범만 들었다. 그러다 최근 『숲』 이전에 나온 『푸른 돛』과 2000년대에 나온 앨범 『Bridge』를 듣고 있다. 세 장의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내면의 고통과 불안은 때로 신을 찾게 한다는 걸,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한다. 사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 김승옥의 수필집 『싫을 때는 싫다고 하라』를 읽고 있다. 김승옥은 시인과촌장의 하덕규와 비슷한 삶인 거 같다. 내면의 고통 그리고 종교에 귀의와 구원. 이젠 이런 삶이, 이런 욕망이 조금은 납득이 간다.

5. 최고의 공연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십대 이반 상담 공간 마련을 위한 후원 콘서트.
: 말이 필요 없다. ㅎㅊㅇ님의 드랙퀸 공연을 봤다는 것만으로 이 공연은 최고의 공연이다. 후후.

6. 최고의 삽질
논문
: 정말 2008년 최고의 삽질은 논문이다. 푸하하. 전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