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어제 늦은 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조용히. 모든 가벼운 것들은 차갑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우산을 꺼냈지만 쓰는 시늉만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았다. 기분이 좋았다. 차갑게, 차갑게. 나도 차갑게 식어가길 바랐다.

또 잠을 설쳤다. 잠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꿈이 아니란 걸 확신한 건, 중간에 핸드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새벽 4시. 시간을 확인하기 전에도 몇 번인가 잠들고 깨길 반복했다. 어쩌면 잠들기 전에 먹은 약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니 약을 끊으면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약을 먹으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훨씬 수월하다. 아이러니. 잠을 설치면서도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다는 역설. 그런데, 시계를 본 것이 꿈이라면 어쩌지…. 지금 이 순간도 꿈이라면 어쩌지…. 아니, 지금이 꿈이 아니면 어쩌지….

늦은 새벽 혹은 이른 아침. 길을 걸으며, 몽환, 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길고양이도, 사람도 지나간 흔적이 거의 없는 눈 덮인 거리. 그저 바람이 지나간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거리.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거리는 짙푸른 색이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더듬었다. 어제보다 앙상한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쪽에선 필라멘트가 발열하는 빛이 번지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그 순간, 내 몸이 하얀 가루로 흩날려 쌓인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꿈같은 상황이었지만, 꿈은 아니었다. 길에서 미끄러질까봐 조심스럽게 걸었고 발가락은 얼어가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현실감을 잃어가고 있다.

그 거리를, 키쓰 자렛(Keith Jarret)의 [The Koln Concert]를 들으며 걸었다. 서늘한 거리와 서늘한 피아노 소리. 서늘함이 닮았다. 내게 존재하는 건 음악소리 뿐이었다. 음악소리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 논문이라도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중얼거렸다.

아주 조금만 어두운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로엔 헤드라이트 불빛이 부신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통속적이고 진부한 풍경. 그 풍경이 처연하다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자동차들이 속도를 줄이며 달리고 있는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며, 아름다움을 느꼈다.

귀에선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가 흐르고 있었다. 서늘한 피아노 소리. 서늘한 선율. 그리고 깨질 것만 같은 하덕규의 목소리.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오늘 아침엔 초승달이 떴다. 지고 있는 초승달. 아침 혹은 늦은 새벽의 하늘. 종이에 베인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처럼, 앙상한 초승달. 귀에선 시인과 촌장의 “새벽”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눈썹처럼 여윈 초생달 숲 사이로 지고. 높은 벽 밑동아리에 붙어서 밤 새워 울고 난 새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높은 벽 아래 밤새 울고 난 새벽.

밤새 잠을 뒤척였다. 열댓 번은 더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바로 누워서 잠시 잠들었다가 오른 쪽으로 돌아누워 잠들었다가 왼쪽으로 돌아누워 잠들었다가. 이러길 반복했다. 그리고 6시에 잠에서 깼다. 밤새 뒤척였다는 게 꿈만 같았다. 정말 뒤척였는지 뒤척이는 꿈을 꾼 건지 헷갈렸다. 정신이 너무 멀쩡해서 뒤척이는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주문처럼 되뇌고 있다.

붉은 꽃

나는 숨을 죽이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으로 붉은 꽃이 피는 장면을 본다. 은빛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가고, 붉은 꽃은 내 삶의 한 사건을 기록한다. 한 송이 화사하게 피어난 붉은 꽃. 찬 공기 속에서도 붉게, 더 붉게 물드는 꽃 핀 자리. 나는 붉은 꽃 내음을 맡으며 시간을 기록한다.

추억은 완강하게 과거를 붙든다. 나는 피고 진 자리만 화사하게 남은 기록을 쓰다듬는다. 흔적만 남아 해석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기록들.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이미 해석인 기록들. 붉은 꽃 피고 진 자리에서 나는 달콤한 향을 맡으며 지난 흔적을 해석하고 지금의 시간을 기록한다. 언젠가 희미해질 기록들. 붉은 꽃이었다는 것이 낯설어질 시간 정도가 흘러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기록들.

붉은 꽃 피고 진 자리에서 나는 쌩긋이 웃고 있다. 하루하루 희미해질 붉은 꽃 피고 진 자리에서, 단절과 이음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자리에서, 나는 어색한 듯, 반가운 듯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