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하다.

길을 걸을 때면 종종 아무 문장이나 만든다. “눈을 감으면 눈이 분시다.” 아냐, 아냐. “감은 눈 사이로 붉은 물결이 인다.” “붉게 핀 꽃이 시들며, 팔에 흔적을 남긴다.” “팔에 핀 붉은 꽃의 흔적들이,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종종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할 때마다, 숨고 싶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괜히 팔을 숨긴다. 몸에 새겨진 흔적들.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세월을 견딘다. 시간을 견디며 몸에 새긴 흔적들, 세월을 견뎠음을 알려주는 흔적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세월 속에 색이 바래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라지진 않는다.

허수경의 시집에서였나, 공후인이란 악기는 악기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연주법은 남아 있지 않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남아 있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왜.

언제나 그렇듯,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기 마련이다. 에둘러, 에둘러 몇 번을 에둘러 표현을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 말이 자꾸만 몸에서 맴돌면,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을 바라본다. 그러면 다 잊는다. 아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아침에 학교에 왔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날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 왔듯,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짐

그 나뭇잎은 흔히 얘기하는 나뭇잎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벚나무에서 핀 둥그런 모습이 아니라, 마치 찢어진 것만 같은 모습. 하지만 그 모습이 누군가의 손에 찢겨 나갔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렇게 자란 것 같다. 그 나뭇잎에게, 코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까지 다가가서 인사를 한다. 안, 녕. 그 나뭇잎이 좋다.

아프지 않기.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하기.
그리고… 지레짐작하지 않기.

나뭇잎에게 인사하며 다짐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소소하게 엮어 가는 기억

#
할 일은 언제나 쌓여 있지만, 종일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빈둥거리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다음 주 목요일이 석탄일이라 수업이 없다는 사실에, 그러니 당장 일주일 후의 수업 준비를 할 부담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느슨하게 있다. 이럴 때 개별연구로 하는 책을 읽으면 좋으련만, 또 그러진 않는다. 맨 날 바쁘다고 말하면서도 맨 날 빈둥거리고, 오늘 같은 날은 아예 대놓고 빈둥빈둥.

#
멈칫. 화들짝 놀라지는 않지만 이런 자신에게 놀라. 그러고 보면 처음 댓글을 남기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였는지…. 지금도 댓글을 쓸 때면, 용기가 필요해. 처음 댓글을 쓰고 다시 댓글을 쓸 때까지 한 달은 더 걸린 것 같아. 이 용기가, 이 “소소한”, 하지만 루인에겐 너무도 큰 용기가 그 전과는 다른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 같아. 이런 용기들이 말을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되고 있어. 그래서 고맙고 기쁘고.

#
날씨가 흐리지만, 또 그런 와중에도 파란 하늘이 보이고 햇살도 비춰. 이런 햇살, 햇살 아래 그림자. 그림자를 따라가는 루인. 루인을 따라가는 햇살. 햇살을 따라가는 구름들. 구름 가는 길을 걷고 있는 루인. 루인을 따라 걷는 그림자와 숨바꼭질 놀이.

#
우르릉. 천둥소리. 비가 오려는 소리. 이런 소리와 어울려 오는 니나 나스타샤의 목소리. 시간을 엮어가는 건 음악이라고, 음악을 따라 시간이 흘러. 그 시간들 속에서 기억하고 있는 몇 사람들. 루인은 어떻게 기억될까. 기억은 될까. 그 한 켠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까. 남겨질까. 사라짐과 동시에 지워지길 바라지만, 그래도 가끔은 기억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