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에겐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자취를 시작 하면서 사지 않은 것 중엔 세탁기도 포함한다. 물론 일 년도 못 쓰고 고장 난 중고 냉장고 덕분에 이 년 넘는 시간을 냉장고도 없다시피 생활을 했으니 냉장고도 없다고 해야 할까.

지금의 玄牝으로 이사한 후, 부산집에선 냉장고 사라고 성화였다. 심지어 사준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하지만 냉장고가 필요했던 이유는 생활 방식을 바꾸면서부터였다.

첫 번째 玄牝에 살며 처음엔 자취생 같지 않다는 얘길 들을 만큼 너무도 잘 챙겨먹고 살았다. 학교식당 한 끼 밥값이 1500원 안팎이지만 루인이 먹지 않는 음식이 많기에 그냥 집에서 해먹고 살았다. 한 6개월을 그렇게 지냈을까. 여름이 왔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간의 끈이 끊어졌다. 반지하의 창문은 어두운 색 포스터로 가렸고 밥이 남아 있는 전기밥솥에선 곰팡이가 만개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무력함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장실 나무문에 핀 작은 곰팡이 꽃에도 절망하고 무너져선 울기만 했다. 우울증의 시작이었고 한참 후에야 알았는데 그땐 삼재였다. (삼재는 “삼 년간 재수 없다”는 말의 준말인가? 크크크;;;;;;) 몇 달을 그렇게 살다가 빛이 잘 들어오는 곳으로 이사하면 괜찮겠지 해서 계약기간을 절반도 안 채우고 1층집으로 이사했다.

이사는 순탄치 않았다. 애초 정했던 집은 주인집의 사정으로 취소되었고 이사날짜를 정하기 며칠 전에야 즉석해서 정했다. 문간방이었다. 대문을 나서 30초(!)면 지역할인마트가 있고 비슷한 거리에 너무도 맛있는 김밥집이 있고 큰 골목엔 가게가 있어 장보기 좋은 곳이었지만, 루인의 방-두 번째 玄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혼자 숨어 살기엔 좋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는 허사였다. 곰팡이 핀 밥솥의 악몽으로 밥은 일절 해먹지 않고 사먹기로 결정했고 이미 고장 난 냉장고(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시원한 기능이 최고였다-_-)는 좁은 방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1층이면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방의 작은 창문은 좁은 골목을 향해 있었고 창문을 열면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건 최악이었다.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곰팡이는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몸을 덮을 상황이었다. 우울증은 더 심해졌고 혹시나 해서 사둔 버너는 가스가 새서 한동안 심한 두통과 구토증을 앓기도 했다.

우울증이 조금씩 괜찮아질 즈음, 두 번째 玄牝의 계약기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연장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무조건 이사였고 2층 이상의, 여름에도 창문을 열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이 지금의 (세 번째) 玄牝이다. 옥탑.

옥탑은, 그러니까, 자취생으로선 가장 이상적인 공간일 수 있다. 햇빛 잘 들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까. 보는 순간 몸에 든 것은 아니지만 살수록 정이 가는 곳이다. 비록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추운 고장 난 냉장고 같은 옥탑의 ‘장점’은 있지만.

세탁기 얘기로 시작하더니 ‘딴’ 얘기를 하는 건, 이런 이유가 세탁기를 사고자 하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손빨래를 했다. (루인이 말하는 손빨래는 얇은 소재나 특별한 소재라서 손빨래를 해야 하는 그런 옷가지, 양말 같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바지나 여름 이불 같은 것 까지 포함한다. 물먹은 청바지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탁기와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냥, 토요일 아침마다 일상처럼 빨래를 했다. 왕가위의 어느 영화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바지를 걷어 올린 발로 마구마구 밟는 그런 ‘낭만적인’ 일은 아니지만, 한동안은 그런 ‘낭만’으로 빨래를 하기도 했다. 손빨래를 그렇게 ‘낭만’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손빨래라곤 한 번도 안 해 봤을 거라고 궁시렁 거렸다. 그런데도 세탁기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없었다니,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세탁기와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니라 루인이 아침밥을 하고 있는 시간에 주인집이든 다른 세든 사람이든, 아침 일찍 빨래를 널러 ‘마당’에 올라오는 모습을 접하면서부터다. 손빨래를 하면서 싫었던 건, 힘든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 강박적인 루인에게, 아침 일찍 빨래를 널러 올라오는 모습은 부러움, 그 이상이었다. 루인은 빨라도 낮 시간은 되어서야 ‘마당’에 널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여섯 달 가량을 세탁기를 향한 바람을 품고 살았다. (이런 거 보면, “사고 싶다”에서 “입금완료”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일시불로만 구매하는 루인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달라진 건, 주말에만 가능했던 빨래가 평일에도 가능하다는 것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조심성도 떨어졌다. 그전엔,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옷이 더러워질까봐 조심조심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언제든지 빨래를 할 수 있으니까, 라고 바보처럼 중얼거리면서. 뭔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이유로 세탁기에도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어떤 이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사랑스러운 고민에 빠지겠다.

#세탁기 산 얘기를 쓸까말까 했다. 소비를 전시하는 건 아닐까 해서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탁기가 있는 생활을 했던 사람 혹은 손빨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경험하지 못하리라 싶은 일이었는데, 실제 ps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런 경험을 했다. 루인 역시 부산집에 살 땐, 세탁기라는 생활물건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찾아 읽으면 재밌겠다 싶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쓸 수 있는 그런 느낌의 글이 있기 때문이다.

가시야, 예측할 수 찾아온 안녕.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어요. 며칠 전 맡긴 제본한 책이 루인의 몸에 딱 들게 되었거든요. 한 권은 사진이 중심인데, 사진 복사는 별도로 해야 한다는 아저씨의 말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잘 나왔더라고요. 글자들과 함께 있는 사진들은 대체로 흐리거나 희미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한 권만은 사진이 잘 나와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죠. 제본 맡기는 곳은 항상 가는 단골이죠. 자주 가는 곳이라 더 신경 써 준건지, 루인의 몸에 들게 해주니 자주 가는 것인지, 이젠 헷갈리지만 루인은 단골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금방 지루해 하기에 항상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편이죠. 하지만 가게만큼은 단골을 선호해요. 주인과 루인이 서로의 취향을 알게 되는 순간, 편해지거든요. 루인의 요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요. 아침엔 기분이 좋았어요. 또 다른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냥 무덤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랬어요.

갑자기 당신이 떠오른 건, 그런 순간이었어요. 라디에이터에선 뜨거운 열기가 나오고 밖에선 찬 바람이 불고, 북향인 사무실은 어두웠지요. 즐거운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떠올랐어요. 오랜만이에요.

당신을 떠올린 건 너무 오랜만이죠. 오랫동안 당신을 떠올리지 않았거든요. 항상 몸의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었죠. 잊은 줄 알았어요. 몸 한 곳이 비는 순간이 와도, 그때그때의 옅은 우울함으로 지냈으니까요.

잘 지내시나요? 아쉽게도 당신과 공유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루인을 기억하시는지 물을 수도 없네요. 그러니 당신이 사는 세상엔 루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 하지만 당신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요.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이런 날엔 궁금해요. …이런 관습적인 궁금함이 정말인 건 아니에요. 그저 한 번 쯤은 이런 질문도 해야지, 해서 하는 것뿐이죠. 당신을 향한 궁금함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어디선가 당신의 삶을 살아가겠지 하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죠. 혹은 그런 바람인가요.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순간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런 순간이 온다 해도 피할 걸 알기에 당신의 안부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아요. 그래요. 너무 이기적이지만 그저 당신이 떠올랐다는 것, 그 뿐이죠. 그로 인해 조금은 우울해졌고 보고 싶기도 했지만 볼 수 없음을 알기에 가지는 보고 싶음이지 정말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알겠지만.

오랜 만에 떠올라서 반가웠어요. 당신의 이름을 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다이어리에 당신, 이라고 마구마구 적었죠. 당신의 진짜 이름은 적지 않아요. 그건 이제 그다지 의미가 없으니까요. 행여 누군가 루인의 다이어리를 읽게 된다하더라도 당신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당신과 놀며 장을 봤어요. 주문했던 세탁기가 열하루 만에 도착하더니 주문한 옷이 아직도 오지 않아 궁시렁 거리면서도 당신이 떠오르면, 슬퍼요. 잘 지내세요. 당신이 사는 곳은 이곳보다는 따뜻한 곳이지만 그곳은 또 그곳대로 추우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마지막 인사일지 내일 또 찾을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이 즐거운 안녕.

취급주의, 접근금지

지난 주 이후, 날선 상태로 지내고 있다. 하루에도 감정 상태가 몇 번씩 변하는 거야 특별할 것 없지만 현재는 많이 가라앉아 있다.

그런 상태다. 루인을 향한 칼날이 루인의 몸을 뚫고 나가, 얇은 종이로 간신히 가리고 있는 상태. 그래서 누구든 접근만 해도 곧 바로 칼날이 종이를 찢고 튀어나오는 상태. 살유리 위를 걷고 있다.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는. 하지만 그래서 물에 빠지는 살얼음이 아니라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이 온 몸에 파고드는 살유리, 그 위를 걷고 있는 상태다. 루인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운 상태라 다른 사람의 상황은 이미 다른 세상의 것이다. 작은 일 하나하나도 무겁게 다가오기에 차라리 누구도 만나지 않고 한동안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상태다.

몇 해 전, 인터넷쇼핑몰의 포장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작업대에 있는 도구 중에 “취급주의”라는 스티커가 있었다. 붉은 빗금에 유리잔이 깨진 그림이 있는. 그걸 서로의 앞치마에 붙이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상태다. 취급주의. 건드리기만 해도 깨져서 날카로운 조각이 당신에게 박힐지도 몰라요. 그러니 접근금지.

이런 루인을 비난해도, 욕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런 분위기를 통해 더 얇아지기만 할 뿐인 걸. 이런 상태에선 그런 자학쯤이야 오히려 힘이 된다. 넌, 원래 그런 걸.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상태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만신창이로 너덜해진 상태를 기울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