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보살핌을 회의(안)하기 – 메모

10년 정도 전, 한 수업에서 선생님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라는 말을 했었다. 내게 저 문장은 화두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렇다고 진중하게 깊이 파고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런 문장이다.

이 문장을 종종 떠올리는 이유는 단절된 존재, 파탄내는 행동을 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의 회복, 돌봄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말을 적극 지지하면서도 그것이 해답도, 희망도, 가능성도 아니라는 점을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와 돌봄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의 중요함을 강조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어떻게 질문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를 온전히 지지하는 친구와 파트너가 있을 때에도 나는 우울증과 부정적 감정으로 모든 것을 망치는 상태로 지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울증 심연 일기]란 그래픽노블은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데(다른 책이면 어떡하지…) 파트너와의 행복한 관계에도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할 수 있을까를 질문하고, 그래서 자신의 우울이 감정적 사치는 아닐지 두려워한다. 이 질문의 다른 말은 우울증이나 부정적 감정 충동에 대한 처방이나 대안, 혹은 새로운 방향이 관계의 회복과 돌봄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실패한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항변이다. 그렇기에 관계의 회복은 단절된 존재가 관계망의 소중함을 어쩌고 저쩌고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부정적 감정과 우울을 친밀하고 온전히 지지하는 관계에서도 생성되고 강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앞서 인용한 문장이 떠오르는 것이다. 사실 관계와 돌봄을 논하는 이들이 이 둘을 낭만적으로, 만고의 해답으로 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관계와 돌봄이 부정적 감정이 생성되는 장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다른 질문이 필요할까…

뜬금없게도 이런 잡담은, 관계와 돌봄에 관한 글을 읽다가 떠올린 것이 아니라 실패와 관련한 글을 읽다가 떠올렸는데, 나의 고민은 실패를 저항적 가능성으로 재독해하지 않으면서 성과주의의 언어로도 제한하지 않는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실패를 반복해서 겪을 수밖에 없다면(마치 N회차 회귀한 것마냥) 부정성과 실패를 관계망에 대안이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내게 가장 익숙한 용어로, 아카이브적 미래를 어떻게 기록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글이 진짜 두서없네…

하지 말아야 할 말

나는 [마샤 P. 존슨의 삶과 죽음]이라는 다큐를 좋아하는데 그 중 유독 자주 언급하는 장면은 실비아 리베라가 노숙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노년의 모습이다. 리베라는 미국 트랜스젠더퀴어 정치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고, 그래서 저 다큐에서도 리베라가 청년층과 만날 때면 엄청나게 환호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럼에도 전설적인 인물의 삶, 특히나 라틴계 하층계급 성판매자로 살았던 인물의 현실은 노숙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의 현실적인 생활은 역설적에게도 내게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삶이 낫다거나 괜찮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쨌거나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소중한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 장면을 강의나 다른 자리에서 언급하고는 했는데, 사실 이런 언급을 하면 수강생의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뭐랄까, 중산층 욕망은 아니라고 해도 살만한 삶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페미니스트로, 퀴어 활동가로 사는 것, 퀴어 연구를 하는 공부노동자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저변에 있다고. 이 불안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이나, 규범적으로 저항하는 삶을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워서, 계속해서 계약직으로 살아가고, 당장 오늘이라도 잘릴 수 있고, 전세사기에도 보호받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리베라의 노년은 위로라기보다 더 큰 불안이고 위험에 가까웠던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그동안 리베라의 삶을 말하더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잘못 말했구나 싶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규범은 구조인가

수업이 끝난 날 공유한 이야기인데 여기도 메모.

수업을 준비하고 이런 저런 글을 읽고 하다가 문득 그런 고민이 떠올랐다. 규범을 말하는 것은 구조를 말하는 것일까? 규범, 그러니까 퀴어에 대한 구조적 차별의 작동 양상을 이성애규범성이라고 명명한다. 그리하여 이성애규범성을 말한다면 이는 이성애를 사회의 자연 질서로 삼고 있는 구조적 문제, 정치적 문제 그리고 이 구조가 조장하는 폭력과 차별에 문제 제기하는 의도를 내재한다. 이원 젠더 체제, 강제적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명명은 모두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등장했고 그것이 설득력을 획득하고 설명력을 갖추면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럼 이제 규범성을 말하는 것은 곧바로 구조를 말하는 것일까? 개인의 경험이나 개별적 피해 경험이나 불편함을 논하며 여기에 이성애규범성과 같은 언급을 한다면 이는 곧 구조적 문제를 말한 것일까? 아님 구조적 문제를 말했다는 간편한 면피를 획득한 것일까? 규범성을 논하는 과정은 구조적 논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규범을 언급하는 것으로 구조를 분석하지 않기 시작할 때, 규범성을 언급하는 것은 구조를 논하기보다 개인적 사건으로 치환하는 것이지 않을까? 개인적 사건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논의에서 개인의 고통과 어려움, 곤란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개인이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배경이 같이 논의되어야 하는데 규범성 언급이 그 모든 필요와 노력을 간단하게 면피시키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은 내가 지금까지 쓴 글 모두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못한 것이거나 내가 쉽게 면피하려고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욱 구조를 말하는 것의 의미, 규범성을 명명하는 것의 위미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오늘 인미공에서 진행한, “스퀴시! 숲 속에서” 전시와 조윤희 선생의 무성애 강의를 듣고 왔다. 전시도 좋았지만 무성애 논의를 전시와 강연으로 엮어서 들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더 많은 논의가 나오며, 규범성과 규범성을 충돌시켜 발생한 균열에서 더 많은 논쟁이 나오기를!

… 그러고보면 규범성 언급이 곧 구조를 언급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규범성은 빈번하게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누락된 상태에서 규범성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와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