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받는다는 문장의 복잡한 함의

“나는 트랜스라서 차별받고 있다.”

이 문장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요즘 나는, ‘차별받고 있다’는 언설은 내가 가진 특권적 위치를 동시에 표출하는 언설이라고 고민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나는 트랜스라서 차별받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나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면, 이 말은 나는 한국의 선주민이자 시민권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누리고 있고, 비장애 특권을 누리고 있고.. 와 같은 내용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트랜스로 차별 받을 경우 시민권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무조건 누리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나는 이번 대선에서 투표를 못 할 뻔했다. 며칠 전엔 도서관 출입을 못할 뻔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 통하는 외모와 한국 선주민일 때의 특권은 분명 누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차별 받고 있다는 발언이 등장할 때, 이 발화가 어떤 내용은 강조하고 다른 어떤 내용은 은폐하는지를 훨씬 정교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논의도 상황 파악도 지형 파악도 매우 단순해질 것이고, 교차성 논의는 1+1 할인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교차성 논의의 핵심은 ‘나는 이러저러하게 차별받고 있다’가 아니라 나는 특정 상황에선 차별받고 있지만 다른 상황에선 특권적 위치에 있다’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잡담: 부활과 휘발 사이

나는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루인이 아닌 전혀 다른 자아로, 다른 어떤 존재로 부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혹은 남은 인생을 루인이란 이름으로 산다면 그 삶을 어떤 식으로 견뎌야 할까? 루인으로 살면서 부활하는 것은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세 개의 다른 잡담을 썼다가 모두 지웠다. 이 글을 공개할 즈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겠지. (공개하기도 전에 벌써 잊음…)
부활이 아니라 휘발이 내 삶의 키워드였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이미 나의 기억력은 휘발성이라 그냥 실천하고 있다.
최근 몇 가지 일을 겪으며, 나는 어디까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가란 고민을 하고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이 흘러가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니 그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이 잘못을 조금이라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그런데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 상황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함정… 그래서 말할 수 없다는 게 다시 함정.
루인이라는 삶을 견디면서, 지금의 잘못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흠…
그나저나 지금까지 쓴 글 목록의 링크에 문제가 생겼는지 깨져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고친 상황. 아무도 몰랐다는 건 굳이 고칠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사실 내가 필요해서 고쳤다. 이력서를 제출해야 해서 글 목록을 확인해야 했는데, 정작 내가 접근할 수 없어서 매우 당황했음.
바람과 보리를 쓰다듬으로 뒹굴거리고 싶구나.

지정성별 혹은 젠더는 지정되었다는 언설의 정치학: 생각 없이 아무렇게 쓰기

2006년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을 시작했을 때(그전부터 학내 운동은 했지만) 젠더는 지정되었다는 말을 쓰고 있었다. 트랜스 활동가 사이에서도 이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그 말을 사용했다. 내가 “젠더는 지정되었다”는 방식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내가 특별히 잘났거나 돈오 같은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럴리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미국의 트랜스젠더퀴어 관련 논문을 읽으며(시기상으로 그때는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이라고 해야겠지만) transwoman who assigned male at birth, transman who assigned female at birth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 표현이 맞다고 고민했고 이후 공부를 하면서 저 표현을 쓰는 맥락을 아주 조금이나마 고민하기 시작했다.

젠더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지정되었다는 고민은 기본적으로 1990년대 트랜스젠더 운동의 등장과 함께한다. 트랜스의 삶과 경험을 의학이 독점적으로 해석하는데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래서 자신을 트랜스로 설명하는 이들이 직접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고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랜스의 경험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지금도 의학을 중심으로 한 트랜스 서사는 “잘못된 몸에 타고난 몸”이다. 물론 나 역시 때로 잘못된 몸이라고 고민할 때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트랜스를 독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모든 문제를 트랜스 개인에게 환원해버린다. 트랜스가 수술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는 바뀔 필요가 없게 된다. 무엇보다 사람이 태어날 때 중요한/절대적 역할을 하는 의학은 태어난 사람의 젠더를 결정하며 그것이 태어났다고 이해했다(이해하고 있다). 의학의 결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렇기에 그 결정은 타고난 것으로 말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트랜스 운동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의료적 조치를 통해 ‘반대 성’으로 살기를 위한 존재 뿐만 아니라 비규범적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모든 이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재구성하고, 그 정치학으로 트랜스젠더 운동과 이론이 등장하면서 트랜스의 경험은 다시 해석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엔 두 가지 중요한 논문이 언급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말하자면, 바로 젠더가 의료 시설에서 어떻게 구성/결정되는가를 연구한 인류학 논문이다. 인터섹스의 섹스/젠더를 결정하는 과정을 상세히 밝힌 그 논문은, 젠더가 지정된다는 표현을 직접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젠더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해석, 사회적 규범에 근거하여 의사가 임의로 결정하는 과정임을 밝혔다. 그러니까 젠더가 지정된다는 지점은 인터섹스의 몸 경험을 통해 정확하게 확인되기도 했고 많은 인터섹스가 일상으로 겪는 일이기도 하다.

이 논문, 인터섹스의 젠더가 지정되는 과정이 당시의 트랜스 운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문제제기가 등장했다(여기엔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만든 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섹스가 아니라 젠더야말로 본질이라는 버틀러의 일갈 혹은 성찰, 오래된 트랜스 운동 역사를 통해 젠더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해석 체계라는 강력한 성찰이 더해지면서 타고는 성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나의 젠더는 타고난 젠더가 아니라 의료 기술적 개입(여기에는 당연히 사회문화적 해석 체계가 강력하게 작동한다)을 문제 삼을 필요가 있었다(물론 트랜스 논의에서 의학에 문제제기할 필요는 훨씬 복잡하고 이보다 더 오랜 논의의 역사가 있다). 그러하며 젠더는 지정되었다, 혹은 지정된 젠더라는 표현이 트랜스 관련 논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건 이 개념이 단순히 트랜스만의 경험만을 설명하기 위한 기획이 아니었다고 파악한다. 젠더가 타고났다가 아니라 지정되었다고 말할 때 이것은 개인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 타고나는 것은 ‘없으며’ 철저한 해석 체계를 통해 생산되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젠더는 의료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해석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것은 트랜스만이 아니라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구분하는 사회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다. 하지만 의학을 자연화된 규범으로 이해하는 사회에서 비트랜스는 자신의 젠더가 자연스럽고 의학과 무관하다고 이해하며 트랜스는 의료 기술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젠더라는 비난이 가능해진다. 젠더가 지정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트랜스만이 의료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은 그 과정을 거치지만 이를 은폐하고 자연화하는 과정을 드러내려는 목적이 강력하게 존재했다(수잔 스트라이커는 초기에 이 과정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특정 젠더로 지정되었다는 말은 젠더를 지정하는 과정에 의학 문화 등의 다양한 장치가 개입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젠더를 자연화 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의 젠더만 인공이거나 의학에 관련 있는 것처럼 만드는 인식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였다. 그러니까, 트랜스인 나의 젠더가 지정되었다면 비트랜스인 너의 젠더도 지정되었다. 자연스러운 젠더도 타고난 젠더도 없으며 모든 젠더는 사회적 생산품이다. 이러한 정치적 이해 속에서 젠더가 지정되었다는 표현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내가 파악하고 있는 젠더지정 관련 논의의 역사다.

물론 언어 혹은 용어란 시간이 지나면서 최초의 기획과 무관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초기의 정치적 의도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누가 어떻게 쓰고자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개념이 된다. 퀴어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아무려나 또 어떻게든 변해가겠거니.
+퇴고없이 막 썼습니다…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