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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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기대 없이 혹시나 해서 대학원 특별전형 일정을 찾아보니 9월 30일부터 접수를 시작한다는 글을 보았다. 순간 당황했다. 10월부터도 아니고 9월, 즉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에.

대학원에 가겠다고 결정한 것이 작년 즈음이라고 기억한다. 작년 봄 즈음 혹은 그 전부터 대학원’에나’ 갈까 하다가 진학할 과를 확정하고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를 다니겠다고 한 것도 대학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코스모스 졸업이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한 6개월인 것이다.

헌데 막상 이렇게 코앞에 닥치니 몸이 심란하다. 정말 진학할 것인가부터 얼마간의 걱정까지. (취업 준비를 하는 이들이 이런 기분일까. 대학이란 ‘특권화된 공간’에서 살다 대학 밖의 회사라는 사회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대학원 가서의 생활비나 등록금도 걱정이지만 무엇보다 대학원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할 것이라는 사실도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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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가서 누구를 지도교수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혼자서 몸앓이를 한 적이 있다(지금도 하고 있다). 자신이 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혼자 지레 걱정하는 것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루인이 하고 싶어 하는 분야를 공부하시는 분이 없다는 것.

루인이 가려는 학교의 전공은 사실 그렇게 유명한 편은 아니다(대학원에 생긴지도 얼마 안 되었지만 학부에 그 전공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담당 선생님들이 워낙 유명한 분들이라 한 분 한 분 이름만 대면 다들 “아아~”하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이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전공과 루인이 하고 싶어 하는 전공은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다. 일테면 유클리드 기하학만 전공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려고 한달까(수학과에 가려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석사학위논문 주제는 어느 정도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제의 방향이 애초 잡은 것에서 많이 벗어나 비슷하지만 다른 것으로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라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걱정인 건, 내심 혼자서 정한 지도교수의 수업을 청강하며 얼마간 당황하고 있다는 것. 소통을 위해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듣는 것이 중요한데 선생님의 경우 말을 중간에 자르곤 한다. 물론 이건 수업 시간의 경우이고(즉, 시간에 쫓겨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수업 밖에선 다를 수 있으니 단언하긴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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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기존의 학제 밖에서 공부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몸앓이를 한다. 이렇게 몸앓이를 하는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특권이 아쉬워서 이다. (모든 학생이 학생이라는 특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역시 지역과 계급, 섹스sexes, 섹슈얼리티 등의 문제와 같이 간다. 그렇다고 루인이 대학원 등록금에 생활비가 걱정 없는 계급인 건 아니다. 집에선 취직하길 바라신다.) 어쨌거나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만 할 수 있는 상황과 학생이 아닐 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친구가 그렇다). 물론 취업을 하고 동시에 공부도 같이 할 수 있다면, 혹은 취업과 하고자 하는 공부가 같은 방향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말 그대로 꿈일 따름이다. 루인이 하려고 하는 분야는 루인의 전공 학과에서도 개설이 (거의) 안 되는 그런 쪽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대학원엘 가고 싶어는 하지만 이것이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다(아무도 알 수 없다, 영원히 모를 수도 있고). 그래서 가능하다면 기존의 학제 밖에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다. 박사학위 받아서 교수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지속적인 앎을 추구 하고 싶어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굳이 대학원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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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심란한 상황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대학원에 가고 싶어 했는데 막상 이렇게 지원서를 제출할 시간이 다가오니 흔들리고 있다.

‘결론’은 필요한가

가다머의 해석학을 배우다, 결론이 필요한가 혹은 결론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덧붙여 해석학의 인식론에서 결론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까지.

오늘 수업 내용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전통이나 편견에 대한 가다머의 해석은 흥미로웠다. Understanding도 positioning이란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의외로 ‘쉬웠’는데 그건 이랑과의 세미나를 통해, 그리고 그간 루인의 글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인식론이었기 때문이다(선생님은 understanding과 positioning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지만, 이는 선생님과 루인의 positioning에 대한 해석이 달라서 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둘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때문에 정말 어려운 것은 가다머의 논의가 아니라 실제 살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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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itioning을 둘러싼 해석은 비단 이랑이나 루인 만이 아니라 김은실 선생님이나 정희진 선생님 등, 많은 이들의 논의가 있어온 부분이지만 위 문장에선 맥락 상 이랑과 루인 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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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선생님이 “결론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발생했다. 해석학이 극단적인 상대주의에 빠지면 너와 나는 달라, 라는 식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유동적이고 변동적이라면, 그래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소통 속에서 변화한다면 ‘결론’은 가능한가에 회의적이다. 실제로도, 어떤 글을 쓰며 ‘결론’을 내리는데 얼마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근대 합리주의에 기반 한 결론이란 것이 지식을 확립하고 고정된 것으로 보는 관점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해석학에선 결론이란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전에 전공예비과목이란 명목으로 생명과학실험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수업을 통해 얻은 앎은 소위 말하는 과학적/이성적/합리적인 결론이란 것도 실상 권위에 기댄 것이거나 합의와 평균치라는 것이다. 비슷한 조건에서 실험을 한다고 해도 조별 결과는 달랐고 그 차이가 심할 때도 있었다(물론 실험자의 ‘실수’를 간과할 수는 없다). 실험을 통해 요구하는 결론이란 것도 길게는 몇 십 년 전,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 행해진 실험의 결과를 그 실험자의 권위에 기대는 것이지 그러한 결론이 현재의 또 다른 조건 속에서까지 맞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맥락이 달라지면 다른 내용을 만나게 된다. (물론 실험실에선 어떤 특정한 결론을 요구하는 편이다.)

결론이라는 것, 어떤 논의를 통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욕망이지 않을까. 이런 과정을 통해선 이런 결론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식의 사유의 반영으로. 이런 의미에서 더 이상 ‘결론’은 필요 없다는 몸앓이를 하게 되었다. 정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결론이란 것의 의미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내용을 결정짓는 것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찰들/움직임들을 쓰는 것으로, 그리하여 다른 맥락 속에선 다른 식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결론이지 않을까.

미룬 글 쓰기/쓰지 않기

“world without stranger”라는 내용의 글을 쓸까 했었다. 아마 지난 주 목요일 즈음에.

world without stranger는 거리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옷의 로고이며 루인도 두 벌 가지고 있다. 이 말이 불편했고/하고 몇 가지 사항에의 몸앓이가 들어서 정리할 겸 했는데 결국 쓰지 않고 있다. 몸앓이가 든 그때의 메모 그 상태로 지금껏 방치하고 있다. 앞으로도 쓸 것 같지 않다.

쓰겠다고 작정을 했을 때 쓰지 않으면 다시 쓰기 어려운 글들이 있다. 아니, 거의 모든 글이 그 시간을 놓치면 다시 쓰기가 어렵다. 그러다 그 주제로 다시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 부여가 발생하면 쓰기도 하지만 어지간해선 그런 경우는 안 생긴다. 그 순간, 그 어느 찰라가 아니면 미룬 글은 몸의 어느 곳에서만 맴돌 뿐이다.

이렇게 미뤄둔 글들이 몸의 곳곳에 숨어 있다. 다시는 활자화 되지 않을 내용들이며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툭, 하고 튀어나와 삶을 흔들기도 하겠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