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소수자”란 용어를 둘러싼 고민들

딱 일주일 전인, 지난 금요일이었어요. 아는 활동가가 전화를 해선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는 코너에 글을 한 편 써달라고 청탁을 했죠. 일전에 인권영화제에서 “활동가와의 대화”를 했는데, 그때 몇 사람들과 “소수자”라는 용어로 약간의 논쟁이 있었거든요. 전화를 한 사람은 “활동가와의 대화” 시간에 사회를 본 사람이었기에, 이 논쟁과 관련한 글을 써줬으면 한다는 청탁이었죠. 하지만, 마감은 월요일이었다는. ㅜ_ㅜ 그러니 글이 그다지 몸에 들지 않아서, 이 글을 [Run To 루인]엔 안 올리고 싶었어요.

원고를 메일로 보내고,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역시 글이 별로라 그냥 반려하는가보다 했는데, 아는 사람이 글 잘 읽었다는 문자를 주더라고요. 헉. 그래서 갔더니 허억;;; (확인하기)

예전에 편집자와 내용 수정 문제로 꽤나 얘기가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내용은 거의 안 바뀐 것 같은데 편집자가 제목을 바꾸고, 소제목을 첨가했더라고요. 근데.. ㅠ_ㅠ

결국, 어차피 인터넷발행이란 점에서, [Run To 루인]에서도 다시 발행하기로 했어요. 예전에 홀리 데버(Holly Devor)란 사람의 홈피에 갔다가 어떤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났거든요. 데버는 자신이 쓴 모든 글들의 목록을 정리해두고,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링크를 걸었는데, 그 중 어느 글에선가, “책에서 출간된 제목은 잘못 되었고, 여기[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버전의 제목이 정확하다”고 적었더라고요. 이 구절이 떠올랐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인권오름에서 발행한 제목과 소제목은 루인이 단 게 아니란 거예요. 으으.

문제라고 인식한 건, 소제목이 말하는 의미와 글내용이 말하는 의미가 충돌하기도 한다는 점 때문이죠. 다른 한 편으론, 루인의 글/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해석되는지를 알 수 있어서 재밌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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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란 용어를 둘러싼 고민들

작년 11월 4일,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를 발족하며, 단체 발족을 맞아 활동가들의 입장을 알리고 다짐한다는 의미에서 발족선언문을 읽었다. 발족선언문의 첫 문장은 “우리는 소수자가 아닙니다”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성 소수자”로 분류하고 이른바 “소수자 운동”의 한 범주로 얘기하는 마당에,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맥락들과 관련한 운동을 하는 단체가 발족선언문에서 “소수자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소수자”란 말 자체의 의미는 수적으로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권력관계에서 소수란 의미에서 “소수자minority”이다. 현재 사회를 살아가며,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삶, 젠더는 태어날 때 할당한 숫자에 따라 평생 바뀔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회에서 이런 인식이 잘못 되었다고 얘기하는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그 사회의 지배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며, 이런 맥락에서 (피)해를 경험하고 있기에 “(권력적으로) 소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사람들이 이 용어를 “수적으로 적다”란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부터다. “트랜스젠더는 몇 명당 한 명 꼴로 나타난다”, “한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10~15% 정도이다”, “사람 수도 얼마 안 되는데, 이들을 고려한 정책을 시행하는 건 경제적으로 비효율 적이다” 등등의 언설을 듣기 시작했을 때, 소수자란 말은 더 이상 “권력 관계에서의 소수”란 의미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인구통계 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수자”로 분류되지 않는 이들만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소수자 범주”에 포함되는 이들 역시, “우리가 수적으로 적으니 너무 과도한 주장은 하면 안 되고”라는 식으로 말을 하곤 했다. “소수자”와 유사한 “약자”란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 역시 권력관계에서의 “약자”란 의미지만, “그들은 약하니까 보호해야 한다”, “사회에서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약자들”이란 식으로 “약자라는 범주의 사람들”을 지시하는 걸 듣곤 했다. “약자라는 범주의 사람들” 역시, 종종 스스로를 “우리는 약하니까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한다. 이렇듯, “소수자”/“약자”란 용어는 기존의 지배규범을 성찰케 하고 상대화하기 보다는, 기존의 지배규범을 그대로 둔 체, 그런 규범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설명하고 주장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사용은, “원래의 의미”를 몰라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 “원래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홍보해서 ‘제대로’ 사용하도록 해야 할까? 모든 언어는 “왜곡”이라는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다기보다는, 이 용어 자체가 수적인 의미를 상기시키는 한계가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끊임없이 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맥락은 무엇인지를 고민할 문제이다.

“소수자”란 말이 정말 불편한 이유, “우리는 소수자가 아닙니다”란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수자”란 말이 상당히 맥락적인 의미임에도 마치 고정된 의미거나 분명한 경계를 지닌 범주처럼 “소수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약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들을 소수자로 묶는다면, 어떻게 이런 묶음이 가능할까. 이성애-성별이분법에서 “억압”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트랜스젠더만 하더라도, 개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진 않다. (트랜스젠더는 마치 의료과정과만 관련 있는 것처럼 여기는 인식 때문에 이런 예는 불편하지만) 일테면 트랜스젠더들이 의료과정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만 해도 개개인마다 상당히 다르다. 어떤 이는 수술을 하고 호적상의 성별을 변경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술은 했지만 호적상의 성별은 바뀌지 않은 이들, 현재 호르몬 투여를 하고 있고 어느 정도 수술을 한 이들, 호르몬 투여를 준비 중에 있는 이들, 그리고 호르몬이나 수술을 안 하겠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트랜스젠더가 의료과정과 관계를 맺는 정도는 상당히 다양하다. 이들마다 요구사항이 다 다르기 마련이라, 군대문제가 가장 시급할 수도 있고, 취직이 안 되어서 생계가 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규직이라 생계와 수술비는 어느 정도 모았는데 아직 호적상의 성별변경을 못 하고 있어 성별변경이 시급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제도적인 측면 보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성별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사회문화적인 인식이 더 문제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트랜스젠더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른데 “소수자”로 묶어서 운동을 한다면, 의도하건 하지 않건 특정 누군가의 이득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시급함은 “여건 상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다른 한 편, 이런 명명은, “소수자”를 오직 “소수자”로만, 트랜스젠더를 “트랜스젠더”로만 수렴해버리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트랜스젠더는 24시간 내내 트랜스젠더이기만 한가? 나는 오직 트랜스일 뿐이며, 내게 트랜스가 아닌 다른 맥락들은 전혀 없는가? 평생 변할 수 없는 성별이분법이란 규범의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소수자”일 수 있지만, 트랜스젠더들이 성별이분법만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정규직인 트랜스젠더가 있는가 하면 비정규직인 트랜스젠더가 있고, 중상층 계급의 트랜스젠더가 있는가 하면 하층의 트랜스젠더가 있다. 어떤 트랜스젠더에겐 호르몬 투여보다는 비정규직이라는 생계의 불안정함이 더 큰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고(이 두 경험을 분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트랜스젠더에겐 학벌과 학력이 더 큰 문제다. 만약 한 트랜스젠더가 회사의 사장인데 노동착취라도 한다면, 이럴 때 그는 가해자 혹은 기득권자로서의 위치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소수자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순간, 모든 트랜스젠더는 동일한 경험을 하고, 가해자이거나 기득권자일 수 없는 ‘순수한 피해자’로서의 위치만 부각하여, 자신의 복잡한 위치를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수자다”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수자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나를 주장할 수 없게 하는 상황들에 문제제기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얘기하는 편이다. “소수자”이거나 “약자”여서 이만큼 고통 받고 있다는 식의 ‘전시’를 하지 않으면 주장할 수 없게 하는 상황들에 문제제기 하는 방향으로 운동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렇다고 “소수자”란 말 자체를 폐기하자는 건 아니다. “소수자”란 말을 둘러싼 어려움은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소수자”란 범주로 수렴하지 않으면서, 즉 내가 기득권자나 가해자로서의 위치에도 있음을 은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성애-성별이분법에서 경험하는 (피)해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 “소수자”란 맥락에서의 경험이라고 해서 피해 경험 혹은 힘든 경험만 있는 건 아닌데, 그렇다면 이런 경험들은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소수자”란 용어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이런 복잡한 감정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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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한 장의 잎사귀처럼]

다나 J. 해러웨이 & 사이어자 N. 구디브 [한 장의 잎사귀처럼] 민경숙 옮김, 서울: 갈무리, 2005 [Donna J. Haraway, How Like a Leaf: An Interview with Thyrza Nichols Goodeve, New York & London: Routledge, 2000]

해러웨이 글은 읽기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미국 학자들 중 읽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하다. 버틀러가 그렇고 해러웨이가 그렇다. 하지만 버틀러는 인식론이 낯설어서 어렵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문장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반면 해러웨이는, 아직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루인에겐, 좀 많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해러웨이를 읽다보면 문장의 어려움 보다는, 용어의 낯설음으로 인해 어렵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학문 간의 구분이 분명하고, 고등학생 시절 문과를 나오면 과학이나 수학을 모르는 게 당연한 것 같고, 이과를 나오면 문학을 모른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맥락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해러웨이가 어렵다면, 생물학을 비롯한 다양한 과학 분야의 언어들을 같이 사용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고민을 잠깐 했다. 사람들과 어떤 얘기를 나눌 때면 가끔씩 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나 상상력으로 설명할 때가 있는데(일테면 미적분이나 위상수학 등등), 이럴 때면 내용 자체는 무척 쉬운데 수학용어를 사용해서 사람들이 당황하고, 그래서 어렵다고 반응하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이 낯설어서 어느 순간부터 수학을 매개로 하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해러웨이를 읽다보면 *의외로* 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어렵다. 근데 이 책이 어려운 건, 내용의 어려움보다는 번역으로 인한 것 같다. 이 책은 해러웨이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수도 있을 책인데, 번역서를 읽고 있으면 영어본을 찾아서 대조하면서 읽고 싶은 충동이 든달까. -_-;;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예전에 해러웨이의 다른 책,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번역한 사람인데, 수업발제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실린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으며, 처음엔 번역문을 읽다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번역본을 포기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영문을 꺼냈던 적이 있다. 근데 영문을 읽으니 무슨 소린지 알겠더라는 슬픈 전설이… ;; 그래도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비해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어느 정도는 읽힌다. 하지만 마냥 번역자를 탓하기가 어려운 건, 해러웨이 자신의 문장이 번역하기 쉬운 문장이 아닌 이유도 있고, 번역 자체가 쉬운 일도 아니니까.
수업발제를 위해 번역을 몇 번 하면서, 번역자를 탓하거나 번역이 별로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번역에 문제제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루인의 번역문이 떠올라서-_-;;; 흐흐흐.

루인에겐 해러웨이가 각별한데, 비단 루인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 트랜스 연구에서도 해러웨이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트랜스 연구의 중요한 출발점이랄 수 있는 샌디 스톤(Sandy Stone)의 논문 “제국의 역습”이이 해러웨이의 글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스톤은 해러웨이의 제자이기도 하다), 해러웨이의 “괴물”이 트랜스에서 해석하는 괴물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겹치기도 한다. 처음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었을 때, “이건 거의 트랜스연구이기도 하잖아”라고 맥락 없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트랜스와 관련해서 루인이 처음으로 쓴 논문 역시 “사이보그 선언문”에 상당히 빚지고 있고.

하이데거가 구영어인 thencan, 즉 “to think”와 thancian, 즉 “to thank”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사유”와 “감사”가 공유하고 있는 어원이 가장 깊은 의미의 사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전개시킨 곳이 바로 이 부분이지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유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사유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그가 읽었거나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들과 다른 것을 발전시키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므로 최고의 감사는 사유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심오한 배은망덕은 사유하지 않음이 아닐까?
– 54~55:구디브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도 없는 거지요. 질병은 관계입니다.
– 131: 해러웨이

그리고 나서 카피(the copy)와 실물(the original)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코드화되지요. 어떤 것을 본다는 과정은 언제나 보는 것을 잘못 본다는 문제를 수반해요. 그것은 똑같은 것인가? 혹은 다른 곳에 옮겨진 똑같은 것인가? 그 카피는 정말로 실물의 카피인가?
-170~171: 해러웨이

[회절을 설명하며] 빛이 작은 틈새를 통과하면, 통과한 광선들은 분산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기 위해 한 끝에 스크린을 놓으면, 그 스크린 위에 광선이 지나가는 길의 기록을 얻게 되지요. 이 “기록”은 틈새를 통과하는 그 광선들의 길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사를 얻는 게 아니라 길의 기록을 얻는 거지요.
(…)
저는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핀을 그 컨텍스트로부터 옮긴 게 아녜요. 그 안전핀에 훨씬 더 많은 의미와 컨텍스트들이 있으며, 일단 당신이 그것들에 주목하면 그냥 누락시킬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말하자면, 단지 회절 시킨 거지요. 당신은 그 “간섭”을 등록해야 해요. 이것이 나의 작업방식이며, 내가 즐기는 방식이라고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 속에서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단순한 일이지요. 다른 의미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결론이 단 하나의 진술이 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겁니다.
-172, 174: 해러웨이

먼저 그런 비판을 하지 않으면 바보처럼 보일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저는 정말로 고약한 인종정치가 이와 똑같은 원칙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먼저 고의적으로 인종주의자라고 부르는 거지요. 그것은 마치 인종차별주의가 몇 가지 진술로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다양한 진언(眞言)으로는 인종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어요. 혹은 이 논문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종을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 다시 앉아서 그런 주의를 해주었으니까 이제 나는 자유다 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인종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지요. 달리 말하자면, 나는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 나는 자유다 라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84~185: 해러웨이

목격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묘사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묘사한 것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245~246: 해러웨이

[논문] Susan Stryker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

Susan Stryker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Above The Village Of Chamounix: Performing Transgender Rage” GLQ, vol.1 (1994)

메리 셸리를 읽고 나서, 스트라이커의 논문 제목을 읽으려 했을 때, 이전엔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제목의 의미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샤뮤니(Chamounix)는 괴물과 빅터가 만나, 빅터를 떠난 괴물이 그 후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빅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곳이다. 그러니 제목 “샤무니 마을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나의 말들”은, 괴물이 빅터에게 하는 말이자, 스트라이커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스트라이커는 괴물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 논문은 바로 이런 감정에서 출발한다.

이 논문이, 처음으로 읽은 스트라이커의 논문은 아니다. 그간 몇 편의 논문들을 읽었지만, 그 중 몇 편은 읽기 쉬운 편은 아니었다. 짧은 몇 편의 글은 읽기 쉬웠지만, 어떤 글들은 수월한 영어는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 논문 “My Words”는 정말이지 읽는 내내 감동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이다. 여러 많은 문장들이 감동의 도가니지만, 단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비록 그 한 마디가 이 글을 요약하진 않지만.

할 수 있는 한 무례하게 나는 말한다: 나는 트랜스섹슈얼이다, 고로 나는 괴물이다.(240)

아무려나, 트랜스 관련 글을 읽고자 한다면,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이 글을 꼭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