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레오 N이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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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활동정리 글을 쓰면서 인권영화제(자세한 건 여기)에 상영할 영화 한 편과 관련한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그땐 전화만 한 통 받았기에 자세히 적을 상황은 아니었는데, 루인도 미처 깨닫기 전에 일은 진행 중이었고, 어느 새 루인이 한다고 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막 감수와 소개하는 글 쓰기.

지난 월요일인가, 영어 자막을 받았고, 수요일 영화 DVD 사본을 받았고, 어제 한글 번역 자막을 받았다. 아무튼 루인이 담당할 영화는 [레오 N이라는 사람 The Person de Leo N](당연히 제목에 주소 링크했음). 5월 20일 일요일 오후 6시 40분과 5월 23일 수요일 오후 1시, 이렇게 두 번 상영한다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상영일정표를 확인하면 알 수 있듯, 일요일 상영시간에 감독과의 대화가 있다고 나와 있는데, 감독과의 대화가 아니라, 영화 및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대화”의 시간을 루인이 담당하기로 했다. (시간 괜찮은 분은 많이많이 오세요. 🙂)
※방금 확인한 건데, 입장이 무료라고 한다!!! 당연히 선착순 입장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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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감수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영어로 얼추 읽었기 때문에, 영어와 한글을 대조하면서 검토하는 작업 정도. 번역하신 분이 꼼꼼하고 맥락을 잘 짚으면서도 가독성 있는 문장으로 쓰셔서, 그저 읽기만 해도 될 정도였다. 그저 몇 가지 단어가 걸려서 수정을 요구한 정도.

사실, 몇 가지 갈등 지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영어 자막엔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로 나오는 걸, 한글로는 성전환 혹은 성전환자로 번역한 것. 루인의 입장에선 트랜스섹슈얼과 성전환/성전환자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서 이런 식으로 번역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트랜스섹슈얼로 바꿀 수도 없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라면, 그래서 두 용어들을 번역어 관계로 사용하기 힘들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라면, 어느 쪽이 좋을까를 갈등했다. 동시에 성전환/성전환자란 단어는 주로 의학계나 법조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선 트랜스섹슈얼이란 용어보다는 트랜스젠더 혹은 TG/티지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성전환자로 가기로 했다. 이유는? 없다. -_-;;; 케케. 이 다큐는 이탈리아에서 찍은 건데, 이탈리아에서의 용어를 둘러싼 논의를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뭐라고 쉽게 넘겨짚기가 힘들고, 성전환자란 용어를 의학이나 법학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른 식으로 사용하고픈 고민이 있어서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다.

가장 당황했던 단어는 meta-sexuality. 당연히 사전에는 안 나오고, 구글에서도 몇 페이지 검색이 안 되는 단어. 영어자막만 받았을 땐, 어떻게 번역할까 고심하다가, 그냥 메타-섹슈얼리티로 메모했는데, 한글 번역 자막엔 “성초월”로 적혀 있었다. 성초월? meta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성초월이 적절한가로 갈등했지만(성변화, 성너머 등을 고민했는데), “성초월”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그 단어를 읽었을 때, 어쨌거나 의미를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론 만족스러운 번역은 아니지만 마땅한 언어가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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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담당자는 [레오 N이란 사람]과 [Un/going Home] 두 작품 중에서 고민하다가, 이 작품을 골랐다고 했다. [Un/going Home]의 경우,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잠깐 본 적이 있는 그 분인 것 같아, 인디포럼으로 상영하는 일요일에 보러 갈 예정인데, 어쨌거나 두 가지 작품을 모두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인권영화제 홈페이지엔 이 영화 소개를,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어머니를 찾아간다고만 나와 있는데, 영화를 읽고 나면, 이 정도 소개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볼 사람만 볼 테고, 볼 사람은 볼 테니까 상관없겠지만;;;

다큐를 읽으며 꽤나 흥미롭다고 느꼈던 건, 세 가지 측면에서였다. 우선 데 레오 니콜은 연극배우이기도 하다(연극의 연출자가 “성초월”이란 말을 사용한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렇게 만난 누군가가, 젠더를 옷을 골라 입듯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다큐는 성전환을 일종의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 계속해서 연극 무대에서 연습하고 옷을 바꿔 입고 가발을 바꿔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이런 식으로만 구성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건, 이런 과정을 성전환수술을 준비하고 수술 하는 장면과 교차 편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연극을 상연하며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주인공은 “남성”역과 “여성”역을 모두 담당한다) 성기재구성수술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순간, 젠더를 선택해서 무대 위에서 상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에 균열을 일으킨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과 연극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 교차하며, 젠더를 단순히 무대에서 상연하고 선택하는 것이란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어떤 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레짐작 하고 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아무래도 성전환수술을 한 후 엄마를 찾아 가는 장면. 전화상으론 항상 싸우고, 엄마는 레오가 찾아오는 걸 두려워 하지만, 정작 찾아 갔을 때의 반응은 다르다. 이 부분의 편집이 꽤나 재미있다. 아, 엄마에게 가는 장면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트랜스젠더의 성전환을 얘기하며 흔히 말하는 이주서사로서의 의미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 및 그 관계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04
하지만, 어제 밤, 이 다큐를 봤을 땐 자막도 없는 영상으로만 봤다는 거-_-;; 내용이야 얼추 다 알고 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재생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 건지, 영어 자막조차 안 나와서, 맥락 따라가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니 몇 번 더 봐야 할 듯. 그러고 나면, 정작 “감독과의 대화” 시간엔 이 영화를 비판할 지도 모른다는 거 ;;;; 케케.

아무려나, 많은 비판 지점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아메리카]가 꽤나 괜찮은 영화라면, 이 다큐는 [트랜스아메리카]보다 좀 더 괜찮은 것 같다. 물론 다시 확인해야 하고, 나중에 어떻게 말을 바꿀지 알 수 없지만. 🙂

[TV]제 378 화 “내 남편에게는 비밀이 있다”

[부부 클리닉 – 사랑과 전쟁] 제 378 화 “내 남편에게는 비밀이 있다
방송 2007년 4월 6일 금요일 밤 11 : 15
극본 김 효 은
연출 박 효 규
출연 남편 (유석) : 이 석 우 , 아내 (선미) : 최 정 원 , 태준: 양 동 재

지난 서울여성영화제 기간이었다. 지렁이에서 같이 활동하던(했던?) 한 활동가가 이 프로그램을 얘기했다. 한 번 보라고. 봐야지, 하면서도 벌써 몇 주일을 미루고 있다가 며칠 전에야 봤다. 뭔가 일이 밀려 있으니, 이런 식으로 도망간다고 할까. (프로그램 제목에 링크했음. 로그인만 하면 무료로 볼 수 있음.)

미리 말하면, 이 프로그램을 읽는 내내 괴로웠다. 자꾸만 창을 닫고 싶다는 충동. 한 장면 한 장면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뻔한 구성임인데도 아슬아슬하고 들키는 그 과정을 참기 어려웠다. 등장의 누군가와 이입하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내용 소개를 그대로 퍼 와서 내용설명을 생략하려니, 별 도움이 안 될 법해서, 간단하게 요약하면, 주말부부 유석과 선미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지만, 사이가 무난한 편. 근데 대전지역에서 일하는 남편이 서울로 다시 발령을 내려도 거절하고 계속 대전에서 지내길 원해서, 아내가 뒷조사를 하니, 남편은 호르몬 투여 등의 성전환을 바라는 트랜스여성이라는 설정. 그리고 뻔한데, 아내는 이혼을 거부하고 남편은 정말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자신의 몸이 끔찍하다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루인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수시로 이입과 밀려남을 반복했다.

내용을 설명하며 “뻔한데”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런 상황이 상당히 많다는 의미에서기도 하고, 트랜스젠더를 묘사하는데 있어 언론에서 요구하는 방식(소위 “이야기가 된다”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 전해들은 한 얘기에서, 누군가는 트랜스젠더를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죽을 만큼 싫은데, 너무도 끔찍해서 절단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느냐”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몇 가지 방식 중의 하나인 이런 언설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몸의 일부를 도려내고 싶다고 말하고, 그리하여 이런 식으로 말해야만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승인”하는 구조. 그리고 이런 말들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죽을 만큼 싫다는 이들은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굳이 수술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구조들.

이 프로그램의 구조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거울을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말에야 비로소 아내는 어느 정도 체념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증명해야 만 비로소 수술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는 구조. 어떤 사람은 이 프로그램 속의 남편처럼 수술이 아니면 죽을 것 같고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괴롭다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이란 식으로만 나누지 않으면 별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고통을 전시하고, 고통을 통해 호소해야만 비로소 “진성”으로 받아들이는 그 맥락을, 이 프로그램은 얘기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단 한 번 얘기하지 않지만(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맥락으로 사용함),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는, 동성애금기다. 동성혼 자체를 얘기하지 않음으로서 동성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 구조가 너무 분명해서, “동성혼은 절대로 안 되니까,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건가, 하고 중얼거렸다. 며칠 전 커밍아웃과 관련한 글을 적으며 모든 트랜스젠더를 “이성애자”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는 것의 의미를 살짝 언급하며 지나갔다. 어떤 자리에서 루인이 트랜스라고 커밍아웃을 하면 사람들은 루인을 당연히 mtf/트랜스여성이라고 간주하며(왜 사람들은 루인이 ftm/트랜스남성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걸까? 물론 이 이유를 짐작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부터 사용하는 수사는 “예쁘다”거나 “남자친구 있느냐”이다. 꾸엑!!! 이럴 때 루인의 커밍아웃은 무엇을 커밍아웃한 걸까? 이런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에 존재하는 “이성애자 트랜스젠더”임을 커밍아웃한 걸까? 이런 이유로 루인에게 커밍아웃은 지금까지의 관계 방식을 지속하면서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얘기하자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이성애자”는 아니고, “이성애”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계속 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얘기가 옆으로 세어 나갔는데, 어쨌거나 이 프로그램은 “동성애는 절대 안 돼!!”라는 부르짖음 같았다. 아직은 수술을 할 의향이 없는 레즈비언 트랜스여성과 “이성애”여성의 결혼이 불가능한 건 아닌데. 수술을 할 의향은 있지만, 여전히 아내를 혹은 남편을 사랑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반드시 “남성”이어야 하고 어머니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는 건 아닌데. 공중파 방송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에 따라 구성한 내용이겠거니 하면서도,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논문] 저항의 맥락화: Lila Abu-Lughod “The Romance Of Resistance”

관련 글: 저항의 낭만화(한나님의 글)

※카테고리는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저자: Lila Abu-Lughod
제목: The Romance of Resistance (여기)
출처: American Ethnologist, Vol. 17, No. 1. (Feb., 1990), pp. 41-55

종종,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 들어본 것, 혹은 언젠가 어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만 같은 것일 경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아는 척 하려는 루인과 만난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무섭다고 느끼는 건 익숙해지는 것이다. 학년 구분 없는 수업시간에 4학년이 1학년 보다 유리한 점은 4학년이 1학년 보다 더 많이 안다거나 책을 더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답안을 작성하는 방법, 공부를 하는 방법 등이 익숙할 가능성 때문이다. 전공수업일 경우엔 그 전공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에, 1학년 보다는 4학년이 더 익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무서운 건 이 지점이다.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자주 듣다보니 자주 접하다 보니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맥락인지 모른체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 그렇게 익숙하기만 할 뿐인데 마치 안다고 믿게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일테면, 젠더라는 단어가 그렇다. 여성학 수업을 몇 번 듣고 나면 혹은 여성학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해서 그저 일상어처럼 사용하기 쉽다. 루인 역시 너무도 자주 그러하고. 하지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의 어떤 맥락을 알고 있다는 걸까?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자주 사용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언어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이유엔 “젠더”라는 단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루인의 전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전히 젠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성학기초 과목을 들으면 젠더를 아주 간단하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지만, 당시 기말 답안지엔 이 문장을 A4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적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선 이토록 단순한 설명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요즘의 고민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위에 링크한 한나님의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행위성을 안다고 착각했지만, 그동안 무얼 안다고 믿었던 걸까.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싶었고, 얼추 일주일 전 즈음에 이 논문을 읽었다. 그러며 남은 화두는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라는 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느낌은, 이 말에서 비롯한다. 그동안 행위성 혹은 저항을 한 개인이 그 사람의 맥락에서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읽으면서, 그것이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이란 의미가 아님은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권력의 작동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항 혹은 행위성을 통해 권력의 징후를 읽어 내지 않았다면/않고 있다면, 도대체 무얼 안다고 믿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한다는 말 혹은 어떤 앎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 작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론적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건 언제든 자신을 투명한 위치로 간주할 위험성이 있고, 자신이 무슨 문제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는 말은 무겁게 다가왔다. 어떤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은 이것에서 비롯한다.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들었던 그 복잡한 감정-혹시나 공포범죄를 경험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이런 불안이 싫음과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은 정확하게 이런 감정이 발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옷이라는 것, 옷을 입는다는 것의 의미와

저자의 또 다른 지적은 저항이란 언제나 맥락적이라는 지점이다. 즉, 모든 저항의 행위가 모든 문화적인 가치를 전복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선 저항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다른 지점에선 권력을 지지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을 강화한다는 말과 성별이분법을 초월한다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하리수를 향한 비난 중 하나는 하리수는 이성애 성별이분법을 더욱더 강화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의 비난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민등록번호 1번/3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1번/3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주민등록번호 2번/4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2번/4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이런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하리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했다. 성별 혹은 젠더가 (어떤 의미에서) 임의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것으로 느껴졌지만, 방송을 통해 하리수는 이른바 “여성”이라는 그 어떤 이미지를 “여성보다 더 여성답게” 재현했고 그래서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더 강화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하리수의 행동은 동시에 이른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라는 젠더가 몸에 부착해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저항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Abu-Lughod는 이걸 훨씬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ㅠ_ㅠ)

그러니 저항 혹은 행위성은 맥락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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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Butler가 현상학을 비판하는 지점 역시 이 지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버틀러의 글 혹은 이론은 현상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버틀러는 종종 현상학을 비판하는데, 현상학은 담론이 작동하는 측면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말이 현상학으론 담론의 작동을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버틀러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Abu-Lughod가 저항을 낭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말고 권력을 징후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제안과 상당히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