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젠더, 욕망을 지지하면서 제도를 문제삼기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위키영어사전에서 시스젠더를 설명하는 구절을 읽었다. 소위 자신이 인식하는 젠더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섹스가 일치하는 사람을 뜻하며, 이런 의미에서 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한 트랜스젠더도 시스젠더에 속한다는 설명이었다.
(시스젠더가 수술 등을 이행한 트랜스젠더도 포함한다는 구절은 몇 분 안 지나 삭제되었다.)
나는 이런 설명이 매우 당혹스러운데 이런 식의 설명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역사 없는 것, 단지 지금이라는 특정 찰나에만 박제된 형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스젠더의 삶을 갈등 없는 것, 매끈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수술을 모두 다 했거나 호적정정도 한 트랜스젠더는 시스젠더에 포함된다는 사고 방식은 여전히 인간의 기준을 시스젠더에 둘 뿐이다. 개개인이 자신은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트랜스젠더가 부르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이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정 사유체계를 규범으로 삼는 방식, 제도 자체는 끊임없이 문제 삼아야 하고 기존의 규범을 탈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개인의 욕망을 지지하면서 기존의 규범과 체제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런 태도는 개개인을 끊임없이 고통으로 내모는 바로 그 제도를 유지하는데 공모함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내가, 그리고 내가 아는 여러 사람이 개개인의 욕망을 지지하면서도 고통을 다른 식으로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규범과 제도를 문제삼는 이유다.
아래는 참고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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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sgender and cissexual (often abbreviated to simply cis) describe related types of gender identity where an individual’s experience of their own gender matches their bodies. This includes people who were once transgender but physically transitioned so their gender identity matches their physical sex. [1] Sociologists Kristen Schilt and Laurel Westbrook define cisgender as a label for “individuals who have a match between the gender they were assigned at birth, their bodies, and their personal identity” as a complement to transgender.[2]

한국에서 퀴어 이론의 위계

E와 얘기를 나누며 떠오른 아이디어입니다. E와의 공동 아이디어고요.
한국에서 퀴어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퀴어이론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한 이른바 위계입니다. 어떤 글을 더 높게 쳐주고 어떤 글을 하대하거나 무시하는지, 혹은 어떤 글을 더 선호하거나 우선적으로 읽고 어떤 글은 읽지 않거나 아예 관심을 안 두는지 나눠봤달까요. 물론 이 분류가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바이-트랜스젠더-인터섹스 이슈의 글은 그냥 무시되죠. 한국어로 쓴 퀴어이론 역시 거의 무시되고요.
물론 농담입니다, 농담.
한국에서 퀴어 이론의 위계
-영어로 쓴 단행본 및 학술지 논문(단, 주로 레즈비언이거나 게이인 저자의 글)
-영어로 쓴 칼럼(단, 주로 레즈비언이거나 게이인 저자의 글)
-한국어로 번역한 영어권 단행본(단, 주로 레즈비언이거나 게이인 저자의 경우)
-한국어로 번역한 영어권 학술 논문(단, 주로 레즈비언이거나 게이인 저자의 경우며 단행본의 일부로 출판되지 않은 것)
-영어로 쓴 단행본 및 학술지 논문(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등이 저자인 경우)
-한국어로 번역한 영어권 단행본 및 학술 논문(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인 저자의 경우)
-한국어로 쓴 단행본(레즈비언이나 게이 주제)
-한국어로 쓴 등재지, 비등재지 및 학위논문(레즈비언이나 게이 주제)
-한국어로 쓴 단행본(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주제)
-한국어로 쓴 등재지 및 학위논문(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주제)
-한국어로 쓴, 잡지에 실린 논문(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주제)
-한국어로 쓴 칼럼
-영어로 쓴 칼럼(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등이 저자인 경우)
-한국인이 영어로 쓴 학술 논문

소득의 상대적 개념.

최근 몇 년 동안, 1년에 9개월만 생계형 알바를 한다. 그리고 9개월 동안 번 수입으로 12달을 산다. 한 달 수입은 대략 1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원고료나 강의료 같은 부정기 수입을 포함해도, 연봉은 대략 일천만 원 약간 넘는 수준. 일 년에 벌어들이는 수입만 따면, 하루 8시간, 주 5일, 일 년을 최저임금으로 받을 때의 수익과 대략 비슷하다. 물론 나는 하루 8시간을 일하진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있는 날은 오전이나 오후에만 근무한다. 그러니 시간당 소득은 최저임금보다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체 소득은 낮은 편이다. 그러니 가난하다고 말할 법도 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 단순히 아는 사람말고 좀 친한 수준의 사람 대부분은 나보다 수입이 적은 경우가 많다. 더 정확하게, 소수를 제외하면 나보다 수입이 많은 경우가 잘 없다. 혹은 나랑 비등비등하거나. 그러다보니 종종 내가 상당히 수입이 많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내가 부자인 것 같은, 나의 월수입이 엄청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결코 그렇지 않음에도 그렇다는 착각.
내가 이런 착각에 빠질 때마다 드는 고민은 수입이란 역시 상대적 개념일까와 빈부개념 역시 상대적인 것일까와 내가 엄청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없어서 이렇게 느끼는걸까다. 악착 같이 돈을 모아서 나중에 편하게 살겠다는 개념이 별로 없다. 그냥 지금 벌어서 지금 쓰는 개념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소득이란 측면에서 참 잘 살구나라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날 보며 속이 터지거나 답답하겠지만 난 그냥 좋다. 비록 사고 싶은 책 다 못 사고, 사고 싶은 기기 다 못 사고 지내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 소득이란 측면에선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