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지만 슬픈, 수상한 그녀

*<수상한 그녀>의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재밌다. 작품 후반부를 제외하면 정말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깔깔 웃었다. 여러 장면에서 터진다. 70대였던 오말순이 20대인 오두리로 변한 이후 자신의 나이를 계속 헷갈리는 상황은 정말 재밌다. 특히, 오두리로 변한 뒤 자신의 손자인 반지하의 밴드 멤버가 되어 자신의 집에 손자의 친구로 놀러갔을 때,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면서 반지하의 아버지)이 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왔어?”라며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은 압권. 정말 깔깔 웃었다. 그건 몸의 반응이었다. 낯선 사람 대하듯 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은 자동으로 반응하는 감정의 힘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넘어가기 전까진, 대체로 재밌다.
하지만 오두리일 때 방송국 피디와 사랑에 빠지는 건 납득이 안 되었다. 그 전에 둘이 사랑에 빠질만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물놀이를 갔고 피디가 오두리를 구해줬고 그 찰나에 사랑에 빠졌다. 이성애는 언제나 이미 준비된 사랑이기에 첫눈에 반한다는 신화를 제외하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사랑 없는 가수로서의 열정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개연성 없는 사랑은 당혹스러울 뿐이다.
후반부가 불편하고 별로인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사실 영화 초반부터 등장한다. 첫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젊은 나이여야 할까? 혹은 젊은 몸의 형태를 갖추어야 할까? 둘째, 소위 말하는 이성애가족애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을 열광시킨 오두리의 노래 실력은 오말순의 노래 실력이기도 하다. 물론 오말순이 젊은 시절의 노래 실력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말순의 욕망, 오말순이 누구의 어머니가 아닌 삶을 바라고 또 실행하기 위해선 20대의 몸이 되는 방법 뿐인 걸까? 한편으로 이 영화는 노인 혹은 노년의 욕망과 자기 실현을 다룬다. 오두리의 삶과 행동은 모두 70대인 오말순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노인 혹은 노년의 몸으로는 자신의 욕망과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절망을 재생산한다. 오말순일 땐 오두리처럼 할 수 없었다. 오말순일 땐 29,000원하는 신발 하나 사지 못 했다. 하지만 오두리로 변한 이후, 29,000원인 신발을 30,000원을 주고 산다(일부러 1,000원을 받지 않는다). 이런 일은 왜 소위 젊은 몸이라고 불리는 몸일 때만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젊은 몸일 때 오두리는 가장 먼저 옷 등을 구매한다. 젊은 몸일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소비행위 뿐일까? 다른 말로 이 영화는 노년의 몸, 젊은 몸, 노년의 삶, 젊은이의 삶을 둘러싼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매우 잘 드러낸다. 은퇴 이후의 삶을 ‘제 2의 청춘’이라고 말하는 언설을 통해 노년의 삶을 상상하는 힘이 얼마나 얕은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청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상하는 힘도 얕다. 어떤 다양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지, 그 힘 자체가 너무 적다.
가장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오두리’라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손자 반지하를 살릴 것인가란 선택은 왜 갈등이어야 할까? 다른 말로 여성의 욕망은 아들을 키우는 일, 손자를 살리는 일과 대립해야만 할까? 오말순이 남성노인이었어도 이와 같은 결과일지 궁금하다. 이성애-이원젠더를 규범 삼는 이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의 야망을 선택하는 편이다. 이것은 드물게 욕을 먹을 순 있어도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은 자신의 야망이 아니라 가족을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사회가 변했다고 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 남성에게 자신의 야망과 가족은 갈등사항이 아니다. 야망을 선택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여성에게 자신의 야망이나 욕망과 가족은 갈등사항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자 하면 가족을 버리거나 죽이는 일이 된다. 그래서 박씨와 오말순의 아들이 오두리/오말순에게 그냥 떠나라고 했음에도 오말순/오두리가 손자를 살리겠다고 선택한 건, 단순히 슬픈 선택이 아니다. 영화는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는 일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찰나를 재현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결론이 다르길 바랐다. 수혈과 가수생활이 양자택일이어야 한다면, 나는 가수생활을 택하길 바랐다. 물론 이런 결론이라면 지금과 같은 수의 관객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결론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허용된 문법이다. 수혈을 선택했을 때, 오말순의 동년배 혹은 어머니 세대의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건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오말순/오두리가 수혈을 선택했다는 건, 가족제도에서 아내/어머니로 살길 선택한 이들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혈이 아니라 가수생활을 선택하길 바랐다. 물론 이럴 경우 이 영화는 ‘대중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 혹은 ‘실험영화’가 분류되겠지. 그래도 수혈이 아니라 가수생활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결론으로 위로 받지 못 하는 또 다른 동년배를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수혈과 가수생활, 혹은 이성애가족제도의 유지와 여성의 자기 욕망 및 야망의 실현을 모순과 대립으로 그리는 방식이 불편했고 불만이었음에도 나는 영화 후반부를 보며 울었다. 그건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오말숙/오두리의 아들은 그 동안 오두리가 오말숙인 걸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야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것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식이 아니다. “붙들이를 아세요?”라고 묻는다. 병약했지만 너무 가난해서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약을 살 수도 없어 오말숙/오두리는 아들에게 목숨 줄 꼭 붙들고 있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 “붙들이”다. 나는 이 단어를 듣는 순간, 리카가 떠올랐다. 병원에 입원해서 모든 희망을 놓은 것처럼 간신히 숨을 쉴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제발 목숨 줄 붙들라고. 포기하지 말고, 음식 먹기를 거부하지 말고, 제발 살겠다는 희망을 붙들기를, 목숨 줄 붙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럼에도 내 바람은 나약했다. 혹은 내 바람은 간절하지 않았는지 리카는 붙들지 않았다.
재밌지만, 여러 의미로 슬픈 영화다.

트랜스젠더, 살림의원, 용어, 면티

살림의원이 트랜스젠더를 살리는 걸까? 트랜스젠더에게 우호적이라고 알려진 병원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ㅇㅎ병원은 트랜스젠더에게 괜찮다고 알려졌지만 진료비만 10,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살림은 2,800원. 사람들은 끊임없이 괜찮은 병원을 찾고, 내가 간 병원의 의사가 해준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묻고 비용이 적절한지 묻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론은 살림의원이다. 가격 적정하고 상담 잘 해준다는 반응. 좋은 병원 하나 있음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어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잘해줬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다. 다른 누군가는 의사의 혐오발화를 듣기도 한다. 100개 병원 중 한두 개 괜찮은 병원 있는 세상이 아니라 100개 병원 중 한두 개 이상한 병원이 있는 세상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쉽진 않겠지만.
구글에서 ‘트랜스젠더’를 입력하면 ‘트랜스젠더’ 관련 검색 결과가 나온다. 구글에서 ‘트렌스젠더’를 입력하면 검색어 수정 제안 없이 ‘트렌스젠더’와 ‘트랜스젠더’ 검색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성전환수술’을 입력하면 검색어 수정 제안으로 ‘트렌스젠더 성전환수술’이 나온다. … 뭐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트’렌’스젠더라고 사용하면 구글에서 트’렌’스젠더를 제안할까? 이렇게 언어와 용어는 묘하게 흘러간다.
This Is AAA. Not Battery.
It’s Transgender Politics.
라는 구절을 가슴 부근에 새긴 티를 만들어서 입고 다니면 재밌을 텐데. 후후후.
물론 더 정확하게는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지 않은 mtf/트랜스여성의 몸 정치학이지만.
하얀 면티에 검은 글자거나 검은 면티에 노란색 글자 등 간결하게 글자만 사용한 티면 좋겠는데.. 디자인해줄 분 없겠지..

병원 복도 화장실, 장애와 비장애

병원엔 병실마다 화장실이 있지만 복도에도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 입구는 미닫이 문이 아니라 천으로 살짝 가린 모습이다. 천으로 가볍게 가린 모습. 복도를 오고갈 때마다 화장실 문이 천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닫히는 기능이 없는 천이라니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편할까라고 고민했다. 화장실인데, 문을 닫을 수 없다니. 하지만 병원을 몇 번 오가면서 반성했다. 난 얼마나 안이하게 고민했던가. 병원 복도에 있는 화장실이라고 해서 병문안을 온 사람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환자로 입원한 사람도 사용한다. 그리고 간병인이나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로 화장실을 혼자 사용한다면 적어도 출입구만은 쉽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화장실 입구를 천으로 가린 건 환자가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힘을 가진 게 아니라면, 어떤 사람은 적은 힘을 사용하는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면 결국 적은 힘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문을 만들어야 한다. 그 화장실이 장애인용 화장실이란 표시가 없어도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병문안을 이유로 몇 번 드나든 병원의 복도 화장실엔 장애인용이란 표시가 없었다. 모든 화장실을 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입구만 봤을 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폭이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장애인은 병실을 이용하는 사람이지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아니란 의미일까? 하지만 병실에 있는 화장실도 좁았다. 링겔을 거는 지지대는 들일 수 있어도 상당히 좁았다. 장애인은 장애인 전용 병실에 따로 있어야 한다는 뜻일까? 병원의 젠더 분리와 장애 분리란 뜻일까? 병원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보며 환자인, 장애인은 아닌, 체력에 있어 상당한 약자인 어떤 존재/범주를 떠올렸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 경계는 정말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