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죽음에 얽힌 몸의 흔적들

망자의 소식을 전해 듣고 여러 가지 몸의 흔적들이 떠오른다. 일전에 쓴 꿈처럼. 망자에 관한 글에서도 적었지만, 죽음에 대한 예감이 있어서 가까운 사람의 경우, 죽기 전에 미리 알아차리곤 한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친척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늦은 아침, 지하철역을 나서는데 지하철역 내부를 응급실 혹은 긴박함이 도는 수술실로 느끼는 환각에 빠졌다. 뭔가, 죽어나가는 공간 혹은 죽음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란 환각. 순간적인 경험이지만 꽤나 강한 느낌인지라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전날 친척집에 갔다가 일찍 돌아온 이유는 오후에, 당시 알던 사람들과 연극을 보기로 한 약속 때문이다. 꽤나 괜찮게 봤지만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_-;; 그 연극을 보기 직전 혈연가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척 한 분이 위태롭다는 내용.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하철에서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 친척 아저씨와는 안면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모르는 사람 마냥 지나칠 정도랄까. 다만 사촌과는 적지 않은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 연결고리를 가졌다. 연극은 죽는 장면이 몇 나오는 내용이었다. 그 중 한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돌아가셨구나, 하는 예감이 몸에 흘렀다. 잠시 후 메세지가 왔다. 나중에 확인해본 내용은, “방금 전에 돌아가셨다”였다.

이렇게 알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이런 식의 예감을 자주 받는 편이다. 어떤 날은 너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다 호흡 곤란을 겪기도 한다. 물론 이런 날 어떤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또 모르지. 다만 루인에게로 연락이 닿지 않았을 뿐, 루인이 아는 누군가가 죽었을 지도.

2003년 개학을 얼마 안 남기고 서울 가는 기차에서, 다시 부산에 가겠구나, 했다. 몰래 도장 파서 휴학했다가 설날이 지나 들켰고 부산으로 끌려갔었다ㅠ_ㅠ 그렇게 여러 날을 지내다 다시 학교를 다니기로 했고 서울 가는 길이었다. 학기 중에 한 번은 부산에 가겠구나, 하는 예감. 일 년에 두 번, 부산에 가기에 이런 느낌은 싫었지만 내려갈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두 달여 지난 4월 어느 날.

방 바깥은 너무도 환했다. 눈이 부신 환함은 아니었지만 하얗게 빛나는 빨래란 표현처럼 그렇게 하얗게 환했다. 텃밭엔 모계 큰숙모가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텃밭에 채소를 심고 있었을까, 뽑고 있었을까, 그저 잡초를 뽑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모계 할머니 집이었다. 루인은, 방 안에 있었다. 방은 너무도 어두웠다. 칠흑 같은 어둠. 방 바깥은 너무도 환한데 그 빛이 방 안으론 들어오지 않는지, 너무 어두웠다. 엎드려 있었다. 엎드려서 큰숙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고, 같이 자자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계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어디에 있었을까. 할아버지가 루인 주변에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분명 주변에 있었고 자자고 했다. 루인은 계속 큰숙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은 안 되지만 자자는 말에 잠들 시간인가 했다. 그때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로 꿈에서 깼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 날 하루 종일 불안에 시달렸고 으스스하게 몸이 떨렸다. 저녁 즈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고 “별 일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다음 날, 늦은 밤, 모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담담하게 알고 있다고 대답해서 소식을 전해준 ps는 상당히 당황/황당해 했다.

다음 날 가기로 했지만, 불안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죽음을 맞거나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꿈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루인에게 같이 자자고 했고 그 말은 같이 죽음의 공간으로 들어가자는 의미였다. 물론 루인은 잠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한 편으론 안심이었지만 한 편으론 불안했다. 친구 둘을 제외한 다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부산엘 갔다.

평소 건강이 안 좋은 큰숙모는 영안실에서 몇 번 쓰러졌고 모두의 만류로 영락공원 화장장에 가지 못했다(꿈의 의미는 이것이었을까, 혹은 할아버지가 대신 죽는다는 의미일까). 루인은 화장가루를 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회색빛 뼛가루와 커다란 두개골. 그런 흔적만 남기고 할아버지는 떠났다. 아직도 왜 할아버지가 루인에게로 왔는지, 같이 가자고 했는지 모른다. 굳이 해석하려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 하나 몸에 드는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죽음의) 예감은 자주 왔다. 비단 누군가가 죽는다는 소식만 오는 것이 아니라, 불길한 예감도 자주 온다. 어떤 사람은 루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 라고 할 정도로 루인이 “불길한데”라고 하면 어김없이 뭔가 문제가 생기곤 한다. 이런 예감들이 마냥 나쁘지는 않지만 때론 이런 예감으로 인해 생활이 엉키기도 했다. 하긴, 일전에 분신사바에 재미 들렸을 때, 루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루인이 지나치게 빨리 귀신을 부른다고 했다.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있지만 차마 말 못하겠다;;)

…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려고 한다. 추운 날, 부음을 들으니 여러 흔적이 떠오른다.

한겨레21의 지난 호 구함-_-;;

며칠 전 애드키드님의 블로그에서 한겨레21 관련 글을 보고 한 편으론 경악하고 한 편으론 뭔가 수긍하며 주억거렸다(한겨레에 뒤통수 맞은 것이 한 두 번이냐).

표지 그림을 본 순간, 루인이 떠올린 이미지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을 죄다 동원해서 말하면) 허름한 3류 극장에나 있을 법한, 직접 그린 영화 간판을 보는 느낌이랄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음침하고 왠지 뒷골목 으슥한 곳에 숨어서 일어날 것만 같은 이미지 혹은 그런 느낌. 동성연애가 무색하다고나 할까. 그 때문에 꽤나 불쾌했다. 비교를 하면, 2003년에 나온 버디 23호 역시 커버스토리가 청소년 동성애인데 버디의 표지와 한겨레의 표지는 극과 극을 달린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다르다. (여기에 링크할까도 했지만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경계를 타는 문제기에, 알아서 찾아보세요. 너무 찾기 쉬워요-_-;;)

그래서 그 표지가 그려져 있고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신음하고 있다”란 커버스토리가 실린 한겨레21 지난 호를 구하고 싶었으나 이미 이번 호로 바뀐 상태라 구하지 못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웹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기사만 궁금한 것이 아니라 지면구성도 같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루인이 오프라인으로 아는 분 중에, 한겨레21 지난 호 가지고 계신 분 있나요? 다 보셨으면 빌려주세요, 혹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루인에게 넘기셔도 고맙고요. 밥이라도 살게요;;;

[#M_ 문제의 그림은(출처는 한겨레21 홈피에서) | 닫기.. |

_M#]

남성연대로 읽는 황우석 사태

이 글은 앞서 적은 두 편의 글,
황우석이란 불편함 혹은 황우석이란 성폭력“,
황우석 사태를 성폭력이란 관점으로 보는 이유
와 연결 되어 있어요.

어제 인터넷으로 화제만발의 황우석 관련 소식을 접하곤 관련 기사에 초 단위로 리플이 몇 백 개씩 증가하는 걸 봤다. 오호라. 정말 클릭 두 어 번 하는 사이에 리플이 300여개에서 900여개로 바뀌는데, 후훗. 정말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가 안 궁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지점 보다는 일전에 쓴 그런 흥미 때문에 현재의 줄기세포가 있다 없다, 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한 번도 황우석을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여긴 적이 없기에 리플을 보며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접하는 한국 과학계의 위상 추락이니 국가 신인도 추락이니, 국가 망신이니 하는 식의 리플들이다. 황우석을 한국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 간주하고 이번 논문에 문제가 있으니 국가적 망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본군 성노예 ‘여성’을 “민족의 수치”라고 말하는 것, 국제 성구매 여행을 떠났다가 뉴스에 나거나 외국의 보호 동물을 정욕에 좋다는 이유로 잡아먹었다가 뉴스에 나는 걸 나라 망신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 간극은 좁아도 너무 좁다. 아니, 좁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여성’인권침해/성폭력 문제이고 정욕에 좋다는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것은 말 그대로 생명권 침해며 근대 합리적 인간상이 만들어낸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이지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몇몇의 행동에 의한 국가적 망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황우석의 이번 사태 또한 국가 망신이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유명” 과학자의 윤리적/도덕적 문제이지 그 한 명이 대한민국의 모든 과학자의 윤리를 대표하며 대한민국의 망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이 또 다른 민족주의로 읽힐까봐 겁난다-_-;;)

하지만 그것이 국가 망신으로 여겨지고 한국의 과학계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문제로 여기는 것, 그것에서 많은 부분을 읽는다.

간단하게는, 한국이 “제 3세계”이기 때문에 한국 과학자 한 명의 문제가 한국 전체의 문제로, “황우석=대한민국 과학계”로 보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국 “유수”의 저널에 논문을 실기가 더 까다롭게 되었다는 인식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테면 미국의 한 과학자가 비슷한 일을 했다고 그것이 미국의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새튼이 황우석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여했고 그가 논문 조작에 일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 망신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황우석 한 명의 일로 국가 망신 운운, 국가 신인도 추락 운운하는 인식 자체가 이미 (내면화된) 제국주의/식민주의/오리엔탈리즘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과잉대표화를 불러일으킨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말은 멀리 있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리플을 보며 너무 쉽게 만나고 있다. 황우석을 국가 대표 과학자로 여기고 그래서 황우석의 문제를 국가 망신으로 간주하는 것, 황우석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며 MBC의 보도가 (황우석과 동일시 된) 자신의 명예를 손상한 것 마냥 반응하는 것 모두, 자아의 경계가 없는 과잉대표화이다. ‘남성’들이 회사에 취직해서 일 하는 것은 국가와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고 ‘여성’들이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개인적 욕망이나 자아실현, 이기주의로 간주하는 것 역시 동일하다(‘여성’에게 “왜 취직을 하려고 하세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를 나타낸다). 이런 과잉대표화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을 민족의 수치 등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일전에도 쓴 적 있지만) 이번 사건의 작동기제는 민족주의나 과도한 애국심이 아니라 ‘남성’연대라고 몸앓는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정치는 민족주의도 맑스주의/사회주의도 아닌 ‘남성’연대이다(선생님 만세!). PD수첩과 MBC가 그렇게 몰매를 맞는 것은 그것이 국익에 배반하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난자 매매라는 “윤리적인 측면”에 문제를 제기해서 남성연대를 위반했기 때문이다(좀더 정치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고통은 자아의 경계가 흔들릴 때 발생하고 폭력은 “나”와 타인을 분리해서 인식할 때 발생한다. 자아의 경계가 없어 내가 곧 한국(대표)이고 세계(대표)일 때 나의 인식을 공격하는 모든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근대 주체로서의 “나”는 필연적으로 ‘남성’젠더로 재현된다.) 황우석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로 그렇게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라고 몸앓는다. (2002년 월드컵, 이영훈씨 사건 등등 이런 반응은 많다. 솔직히 말해 내년 여름이 두렵다.) 이미 황우석의 “성과”가 황우석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된 상황에서 MBC의 보도는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황우석을 비판하고 PD수첩을 ‘지지’한 사람은 그렇지 않느냐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떤 입장도 똑같지 않듯(황우석을 지지하며 MBC를 맹비난 했다고 해서 그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다곤 몸앓지 않는다) 황우석 비판에도 내부에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일부엔 마찬가지의 불편함을 느낀다. 논의의 많은 부분들이 여전히 “그들만의 정치”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여기까지. 하지만 “Coming soon”이란 말은 루인도 안 믿음.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