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에 있을 세미나 발제문을 쓰겠다고 여성학 사무실 책상에 앉았다. 노트를 펴고 세 쪽 정도를 쓰다가, 몸이 엉키면서 쓰고 있던 내용을 찢어버릴까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몸앓이 지점에서 새로 쓰려면 목요일까지 발제문을 쓴다는 건 불가능해 그냥 쓰기로 했다. (슬프다.)
이맘이랑 종종 나누곤 하는 얘기 중 하나는, 한국어로 상상하기다. 즉, 외국어(주로 영어)를 외래어로, 음역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로 번역/해석해서 사용하고 그런 한국어로 상상하는 것. 비단 번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학술적인 용어라고 말하면서 배배꼬아놓아 내용은 쉬운데 단어만으론 무슨 내용인지 모르게 만드는 지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나 신나고 너무 재밌는 공부들이 영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점에 대한 문제제기/불편함/불만이다.
그렇다고 “순 우리말”이란 게 있다고 믿지 않는다. “순 우리말”이란 것 자체가 환상이고 이데올로기다. 그렇기에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민족주의적 언설을 반복하려는 것도 아니다. 자국어와 외국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식민주의/탈식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일테면 젠더(gender)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론 젠더 뿐 아니라 sex/sexual/gender/sexuality 모두를 성性으로 번역/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페미니즘 책이 이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해석할 것인가로 최소한 몇 마디는 언급 한다. 경우에 따라선 성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고 불편함을 말하기도 한다. 루인 역시 그랬고/그렇고, 그래서 항상은 아니지만 음역을 사용하곤 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로.
하지만 요즘 들어, 이렇게 구분하는 것 보다는 성이라는 하나의 언어로 쓰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몸의 경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하고 있다.
히즈라, 버다치, 트랜스젠더, 트라베스티와 같이 외국어로 익숙한 언어가 한국어, 양성구유와는 대응해서 사용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면 몸은 더 복잡해진다. 흔히 “제 3의 성”이란 말을 쓰며(루인은 이 용어가 불편하다) 트랜스젠더 등을 의미하지만 트랜스젠더와 양성구유는 그 의미와 내용이 너무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어론 음역, 트랜스젠더로 사용할 것인가. 아님, 뭔가 께름칙해서 사용하길 꺼려하지만 성전환자란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인가. 성전환자와 트랜스젠더를 같은 의미/내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미묘하고도 께름칙한 지점이 큰데 계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불만은, 이런 고민들을 한국어를 사용하는 루인은 하지만 미국에 살며 영어를 사용하는 이는 하지 않는다는 것. 기존의 언어와 학문이 누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말 하나 마나?).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언어의 사용은 위계와 권력을 나타낸다.
암튼 대충 이런 문제로 세 쪽 가까이 쓴 발제문을 찢어버릴까, 했다. 다만 이걸 핑계로 발제문을 안 쓸 수는 없어 그냥 계속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불편하다. 기껏 젠더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토대를 둔 언어를 구성하려는 찰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 행복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