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결정

[월래스와 그로밋]을 처음 만난 건, 아주 오래 전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TV를 보다 단편 3편을 묶은 시리즈를 방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챙겨봤었다. 무엇이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에 그렇게 끌리도록 했을까. TV을 거의 안 보는 루인이기에 우연히 만난 인연(!)이 몇 있다. TV를 자주 본다면 인연이라고 안 했을 텐데 정말 우연히 TV를 보다가 오래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만난 일은 신기할 따름이다([델리카트슨가의 사람들]도 이런 우연의 인연으로 봤다).

이런 인연인지 몇 장 없는 DVD타이틀 중엔 [월래스와 그로밋](3편의 단편 모음)과 [치킨 런]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 토끼의 저주]도 사야지, 했다.

아침에 샤워를 하다, 내일 아침에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영화관에 가는 일도 오랜만이지만 아침 일찍 갈 테니 주변 사람들로 인해 불쾌할 일이 없겠지 하는 기대도 한다. (아침 9시에 하는 [유령신부]도 재미있겠다 싶다.)

헌데 무엇이 이 영화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보고 나면 알 수 있을까. 예전과는 다른 몸을 가진 지금의 루인에게 이 영화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페미니즘의 도전]

“그러나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기 글이 주는 불안

특히 이곳에 글을 쓸 때마다, 글의 내용과 형식(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하다면)이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글을 통해 비판하는 바로 그러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분명 그런 모순 속에 있을 것이다.

이런 불안들이 글쓰기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를 중단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인에게 1990년대는 소설 그리고/혹은 시를 쓰던 시절이었다. 재능은 없었지만 즐거웠고 미친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서서히 힘들었고 지쳐갔고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때가 99년. 결국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내버렸다.

왜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꺾어진 골목이었음을 몰랐을까.

이후, 다시는,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없게 하는 자기 저주를 퍼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고 그렇게 잊혀진 기억이 되었다.

힘들어 질수록 더 많은 글을 생산하고 있다. 불안하고 글쓰기가 힘들어질수록 더 열심히 글을 쓰겠다는 다짐. 관계가 불안할수록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소통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듯 글쓰기의 불안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글을 씀으로서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이 사실은 꺾어진 골목임을 깨달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계속해서 이곳에 쓰는 글들이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