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회 여성주의 학교-간다 2강 후기

(라고 제목을 적으니 뭔가 거창해 보여서 불편하지만, 언젠가부터 제목을 좀 선명하게 적지 않으면 나중에 찾기가 힘들다는 스스로의 불편함에…)

*이 글은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젠더-섹슈얼리티gender-sexuality 관점에서 썼기에 많은 문제가 있어요.

강의는 물론 좋았다. (루인에게 이 “좋았다”는 말이 좀 논쟁적이고 다중적인 의미이긴 하다-_-;; 지금의 좋았다는 말은 신났다는 말과 비슷할 듯.) 일테면 내공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의외의 충격은 질의응답 시간이었는데 그때 나왔던 질문 중 어떤 것은 이반포비아queer-phobia 수준이었다. 그 질문(?)을 들으며 루인은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지만 강사(흔히 강사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는 상당히 계급적인 표현이다, 청소부선생님이라곤 안 한다)의 답변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멋졌다.

또 다른 질문, “양성애는 과도기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좀 충격이었는데, 강의를 듣는다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읽고 자신의 위치를 이동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양성애가 과도기적”이라는 말은 결국 ‘이성애’와 ‘동성애’가 있고, 이 두 가지 성애만이 ‘정상’이며 ‘양성애’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로 가야하는 ‘비정상’이라는 의미이다. (어제 강의에서도 지적되었지만 그와는 좀 다른 지점에서 ‘이성애’, ‘동성애’와 같은 말 모두 논쟁적이고 문제적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강의가 끝나고 벌집토론(테이블별로 앉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토론) 시간에 나온 의견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의견은 특별할 것 없는 너무 자주 들어온 말이며 동시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수긍하는 말이다. 그래서 불편했고 조금 아프기도 했다.

논쟁은 butch-femme 이었다. 그러니까 ‘레즈비언’ 내에서 ‘분류”되는’ butch-femme이라는 두 가지 ‘역할’이 결국 기존의 성역할과 같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랑에서도 이와 관련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Butch가 남성적인 역할을, femme이 여성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권력관계가 이성애적 관계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문제. (루인도 예전엔 이렇게 몸앓았더랜다.)

사실 이 말을 듣고 화가 좀 많이 났었다. 루인식 언어로 보면 젠더환원론의 또 다른 표현방식인데, 어떤 의미에선 가장 폭력적일 수 있는 시선의 한 전형이다.

우선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butch와 femme이라고 말할 때의 그 butch와 femme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루인이라고 butch와 femme이라는 ‘성격’이 없다고 몸앓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butch처럼 보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femme처럼 보일 수도 있다(핵심은 “보일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런 ‘성격’을 “쟤는 남자처럼 행동 하네” 혹은 “쟤는 여자처럼 행동 하네” 식으로 구분하고 butch는 남자역할, femme는 여자역할이라고 환원/명명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것은 누구의 시선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 자체가 이미 이성애gender적인 시각이며 ‘이성애’와는 다른 맥락에 있는 ‘동성애’/’레즈비언’을 ‘이성애’로 환원해서 재단하는 방식/폭력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말 그렇게 “butch-femme 역할”을 하는 커플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역할’이 ‘이성애’에서의 그것과 같으니까 이성애와 별로 다를 것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동성애’에서의 성역할sexuality role/rule을 ‘이성애’에서의 성역할gender rule과 같은 맥락으로 환원시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Ftm(female to male)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이성애’ 정체성을 가진 ‘남성’과 연애를 할 때, 외부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볼 땐 이성애연애각본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ftm 정체성을 가진 이의 ‘목적’ 중 하나는 젠더사회에서 남성이라는 역할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이성애’적 ‘남성’이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럴 때, 과연 ftm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연애 행위를 “너도 별 수 없이 이성애적이구나”라고 말 할 수 있을까.

흔히 ‘게이’ ‘남성’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해지지만 ftm정체성의 사람들은 종종 ‘게이’ ‘남성’이야 말로 가장 “남자답다”고 말한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이 가지는 맥락/위치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는데 ‘레즈비언’ 내에서의 “butch-femme”이라는 역할을 ‘이성애’에서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며칠 전 쓴 글에서도 적었듯이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가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데 ‘레즈비언’ 내어서도 “butch-femme 역할”이 있으니까 ‘이성애’적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탈맥락화 시켜 자신의 입장으로 환원해서 보겠다는 폭력이라고 몸앓는다.

..이런저런 몸앓이를 했다. 그러며 며칠 전, 한 수업 시간에 있었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은 공포phobia'(일테면 “나도 페미니즘에 동의해요, 하지만 페미니즘에서도..” 운운하며 은근히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와 한채윤씨가 예전에 썼던 글의 “우아한 호모포비아”란 말을 떠올렸다. 어떤 의미에선 노골적인 포비아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우아한 포비아”다. 그렇다고 같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이반포비아가 있다고 믿진 않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어떤 장면들에선,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사이보그” 루인 그리고 잡설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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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몇 개의 글을 쓰고도 비공개로 두고 있다. 어떤 글은 공개로 돌렸다가 비공개로 바꾸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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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하나의 글을 썼지만 그냥 비공개로 두고 민우회 강좌에 갔다 왔다. 재밌었고 즐거웠다. 어쩌면 후기를 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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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루인은 사이보그라고 몸앓는다. 그 가장 대표적인 징후는 이곳, [Run To 루인]과 루인을 뗄 레야 뗄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이곳을 떠올린다. 특히나 상대방이 이곳을 알고 있는 경우면 더더욱. 가끔 대화 중 순간순간 말이 막히는데, 당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이곳에 쓴 글일 때 그렇다.

했던 말 또 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보니 상대방이 이미 이곳의 글을 읽었는데 또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아무튼 이런 몸 상태에 들어설 때 마다 이곳과 루인은 연결되어 있고 이곳은 루인/몸의 연장, 확장이면서 동시에 이곳이 곧 루인이기도 하겠다는 몸앓이를 한다.

하긴, 일전에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재구성하며 간과했던 내용 중 하나는, 사실 이 ‘나’라는 몸은 오직 ‘나’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무수한 생명체들(박테리아라던가 바이러스라던가 등등)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런 ‘나’에 이젠,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어떤 특정 위치와도 함께 작동하고 있으니 ‘나’는 어디까지의 ‘나’인지로 또 한 번 재구성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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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루인”으로 검색하면 제일 첫 번째 나오는 것은 루인 블로그다. 으하하.

밝힐 수 있음의 권력

며칠 전, 메일로 문의를 했으나 답장이 없어서 그곳에 전화를 했다. 전화 하는 것을 워낙 싫어하다 보니 여러 날 미루며 기다렸는데 답장도 없고 메일확인도 하지 않고 해서 결심하고 전화를 했다.

보통 어떤 곳이든 전화를 하면, 개인의 집이 아닌 이상, 받는 곳이 어딘지를 밝히기 마련이다. ○○사무실입니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전화를 건 사람이 정확하게 전화를 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날 전화를 했을 때, 받는 사람은 그냥 “예~”라고만 했다. 순간 머뭇거린 루인도 그냥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는 용건의 핵심어(행여 전화를 잘못했다 해도 별문제 없을 그런)를 사용해 서로를 확인하지 않고 용건을 처리했다. 물론 나중엔 루인을 밝혔고 그래서 좀더 쉬웠지만.

전화를 끊으며, 불특정한 사람에게 자신을 밝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이라고 몸앓았다. “나는 ○○입니다” 혹은 “여기는 ○○입니다”라는 식의 드러냄은 사회적인 예의나 관습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어도 사회적인 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의 권력인 것이다.

혹자는 한국이 채식 위주의 음식문화라고 하지만 채식주의자vegan로 살아가는 루인의 경험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채식 조리법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채식 위주는 전혀 아니며 오히려 잔치나 회식, 뒷풀이 같은 자리에서 그리고 거의 모든 음식에서 육식은 필수이다. (된장국에도 조개 등의 육류가 들어간다. 루인에게 육류란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이 아닌 모든 것, 즉 유제품까지도 포함하는 언어.) 이런 문화에서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애지상주의 사회이고, 연애/커플이 정상화되고 있는 사회이기에 커플이 자신들의 연애행위나 사귀고 있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이른바 “염장질”이라고 ‘질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이성애자queer에겐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을 ‘누구’에게나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밝힐 때엔, 어떤 폭력이든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철저히 정치적인 행위/운동이다(이 ‘운동’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성애gender문화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격의 ‘운동’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밝힐 수 있다는 건, 기존의 사회제도와 별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거나 자신을 밝혀도 별다른 문제/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것이 루인이 루인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은 사람에게 루인임이 밝혀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면서 인터넷상에서 여러 개의 닉네임으로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