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우동

휴가 기간에 카레를 만들었다.

양파를 카라멜로 만들 듯 엄청 오래 볶은 다음 버섯, 당근(이런 기회가 아니면 당근을 잘 안 먹지…), 감자, 고구마, 브루콜리를 넣고 끓였습니다. 요즘 E와 나누는 농담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전부 만병통치채소입니다. … -_-;;
암튼 카레를 한가득 만들면 일주일이 반찬이 든든하지요. 후후. 추가로 우동이랑 같이 먹으면 끝내주지요. 정말 맛나요. 🙂

어린이집 버스도 폭주해야 하는 것일까?

야간 산책을 하고 있었다.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유치원 혹은 어린이집 버스가 횡단보도를 절반 정도 걸친 상태로 정차하더니 아이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보행자용 신호가 파란불인데 버스는 질주를 했다. 바로 그 앞을 지나가기 직전의 사람이 있었는데도. 유치원 혹은 어린이집 버스도 폭주를 해야 하는 시대일까? 궁금했다.
오토바이가 폭주하고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건 익숙한 일이다. 배달 1분만 늦어도 화를 내는 사회에서 배달원의 목숨보다는 신속한 배달이 더 중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배달원은 부득이하게 목숨을 걸고 폭주한다. 그런데 어린이집 버스도 그런 것일까? 그냥 그 운전기사만 교통신호를 무시한 일회적 사건에 불과할까? 그런데 어쩐지 어린이집 버스도 폭주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인 것만 같아 몸이 복잡했다. 안전과 위험과 사고가 공존해야만, 그 아슬한 줄타기가 언제까지나 아슬하게 유지되어야만 하는 사회는 언제까지 유지될까?

동의는 관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기존의 지배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성적 실천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근거는 동의다. 내가 상대방과 충분히 이야기하고 동의를 구했다는 식이다. 예를 들면 폴리아모리의 경우 다자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기존의 관계 및 새로운 관계에게 동의를 구하는 점을 강조한다. 나 역시 이 글을 시점에서는 동의가 무척 중요하다고 고민한다. 하지만 문득 고민하기를 동의를 통한 관계란 점을 강조함이 족쇄로 작동하지는 않을까?
페미니즘 연구, 장애연구를 포함한 많은 연구에서 동의는 단순하지 않은 개념임을 지적해왔다. 어떤 사람의 동의는 동의로 구성되지 못 하며, 어떤 동의는 강제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동의는 언제나 논쟁적 개념으로 인식된다. 나의 고민은 단순히 이런 성격에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직감에 불과하지만 동의를 통해 새로운/다른 성적 실천, 젠더 실천을 정당화하는 전략이 바로 그 실천 자체를 부정하거나 제한하는 관계로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혹은 동의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관계를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언설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끊임없는 대화와 동의 작업이 무척 중요하다고 믿는다. 젠더 관계에선 동의가 없어도 된다는 믿음이 폭력을 양산하고 있다. 하지만 동의가 관계 자체를 정당화한다면 이것은 다른 의미다. 물론 동의가 관계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동의가 관계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