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루 잘 먹는다는 것

한국에서 음식을 골고루 잘 먹는다는 말의 의미는,

– 각종 육류와 어류를 골고루 잘 먹는다. 곰탕, 순대국, 곱창 등 육류와 어류를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 야채나 나물반찬을 먹긴 먹는데, 고기 열 점을 먹는 동안 야채를 한 점 먹는다.
– 각종 패스트푸드 중심의 식단을 잘 먹는다.

어린 아이나 십대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의사의 방송용 발언 역시 다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수준의 의미에서 ‘골고루 잘 먹는다’는 말의 의미는 야채나 과일을 골고루 잘 챙겨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마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깨달았다. 부끄럽구나… 하지만 혈압약과 당뇨약을 먹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나는 골고루 잘 먹으니 건강하다’고 큰소리 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제야 뭔가를 이해한다.

건강 정치는 역시 채식 정치고 트랜스젠더퀴어 정치구나.

건강 기준이 나를 배신한다면

건강을 파는 사회에서, 건강 공포를 파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퀴어의 건강은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지 궁금하다. 흔히 말하는 건강의 기준이 트랜스젠더퀴어에겐 어떤 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인바디 검사 결과는 어떤 젠더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적절할까?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인바디 검사 결과는, 특히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는 경우엔 어떤 젠더의 평균값으로 평가해야 할까? 건강검진의 해석이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신한다면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를 사유하지 않는 의료 사회가 문제란 뜻이다.
두 갈래 고민. 트랜스젠더퀴어는 의료에 종속된 존재라는 비난이 있는데 왜 인바디 검사 같은 건강 검진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신할까? 건강 검진의 결과 해석 방식 자체를 바꾸지 않는다면 트랜스젠더퀴어의 건강 중 어떤 부분은 해석 불능의 영역으로 남는다. 물론 해석하려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트랜스젠더퀴어를 존중한다면서 건강의 개념 자체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것은 모순이고 언어도단이다.
그리하여 다시 질문. 건강해야 하는 것일까? 왜 건강해야 하는가? 의료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을 하지만 그냥 병원에 안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쇼닥터의 목적은 시청자가 건강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만들어서 병원에 가도록 하는 것이겠지만… 그냥 건강 자체를 포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텐데… 미뤄둔 ‘건강에 반대한다’란 책을 읽을 때가 되었나…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마주하다: 어머니와 건강

어머니랑 이야기를 나누며 결혼 관련 이야기는 1~2번 흘리듯 나오는 수준이었고 진로 문제도 1번 정도 나오는 수준이었다. 2박 3일 동안 어머니랑 이야기를 나누면 거의 반드시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길게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이야기 주제가 바뀌었다.
일상의 병리화, 의료화를 고민하고 관련 자료를 접하다보면 엉뚱하게도 어떤 성분이 어디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도 함께 알게 된다. 머리가 나쁜 나는 이와 관련한 정보를 습득하는 동시에 잊어버리지만 간혹 기억한다. 그렇게 기억에 남긴 정보 중 몇 가지가 있는데… 혈액순환 관련 정보 중 일부와 면역력, 감기, 그리고 비염 관련 정보 중 일부다. 처음부터 이 두 정보가 내게 두드러진 건 아니고 어느 순간 내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는 늘 손발이 저리는 증상을 좀 심하게 겪었고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서 관련 어려움을 겪으셨다. 최근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걸 봤는데 혈액 관련 정보를 보다가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러자 또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환절기와 겨울에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 늘 감기에 걸려 있었다. 전화로는 늘 괜찮다고 하시지만 끊임없는 감기의 나날. 면역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문제기도 할 테고 다른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정보가 연결되자 어머니에게 각각에 해당하는 약이라도 사드려야겠구나 싶었다. 내가 효트랜스여서가 아니라(결혼 안 하는 나는 영원한 불효트랜스지) 그냥 그랬다. 그래서 ㄴ과 ㅍ을 챙겨서 부산에 갔는데… 이 두 제품을 계기로 어머니가 드시고 있는 건강보조식품 관련 이야기, 어머니가 걱정하는 건강 관련 이야기 등을 주로 나눴다. (덩달아 암웨이 종합비타민의 폭리도 확인했다…) 이제까진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주제기도 했고 어떤 의미에선 어머니가 가장 신경쓰고 걱정하고 계신 주제기도 했다.
무엇이 몸에 좋다 아니다, 어떤 제품이 이런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논의는 그 자체로 논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동시에 이렇게 건강 강박 논의와 건강을 유난으로 여기는 태도 사이에서 병리화와 탈병리화, 의료화 논의는 별개로 탐문해야 할 이슈다. 학생인 내가 이런 이슈를 파고드는 것과는 별개로, 건강 제품을 통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몰랐던 점을 알아가는 건 소중한 경험이다. 해당 제품이 실제 건강에 도움을 주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건강이 어머니의 주요 관심사라는 점에서 그 관심사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내가 몰랐던 어머니의 걱정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지.
아무려나 이번 부산 방문은 뭔가 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