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마음

복잡한 마음
트랜스젠더퀴어이론을 공부하고 이를 주요 연구 주제 삼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트랜스젠더퀴어이론을 공부해봐야 돈 벌 길이 요원하고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데 이를 공부해도 괜찮은 걸까? 나야 운이 좋아서 하고 있다지만…
한국에서, 한국의 학제에서 공부하며 트랜스젠더퀴어이론을 연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다.
한국에 있는 모든 대학원을 통틀어 일 년에 퀴어이론 수업이 한 과목이라도 열린다는 보장도 없는데 한국에서 하는 건 정말 별로지… 나야 한국에서 하고 있지만 유학 갈 수 있으면 체계적으로 학제가 구축되어 있는 곳으로 유학 가버려요.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무려나 언제나 복잡한 마음을 야기하는 순간이다.

동성애 관련 도서 소지로 국가보안법 위반!?!

종북게이, 종북게이하는데요… 고작 그 정도 스케일…
1990년대 판결문이나 결정문을 보면 어느 출판사 사장이 ‘동성애자 – 억압의 역사’를 비롯하여 마르크스-레닌 관련 서적을 출판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종북게이라고 비난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는 패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동성애자 해방운동과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사회주의 서적을 소지하여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물론 이 서적은 국보법 위반의 증거 자료기에 이 책을 소지한 것만으로 국보법 위반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국보법 위반의 증거로는 쓰였습니다. 이 책은 퀴어락에 있습니다. 후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같지만 아직 20년도 안 지난 기록입니다. 1990년대 후반의 사건이니까요.
그나저나 10년 가까이 블로깅을 했는데 이번 포스팅은 3001번이네요. 게을렀고 게으르다는 증거입니다.

젠더퀴어 혹은 ‘새로운’ 범주의 등장 관련..

기본적으로 이원젠더 개념, 이성애-동성애라는 이원성적지향 개념을 문제 삼으려고 등장한 범주/개념이 젠더퀴어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런 개념으로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모색 중 하나지만요. 하지만 이렇게 등장한 범주 개념은 때때로 기존의 질서를 끊임없이 문제 삼기보다는 ‘난 너와 달라’로 환원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죠. 더 심할 경우 ‘우리는 기존 질서를 문제삼는 존재고 너희는 그렇지 않아’로 쉽게 치환하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드물지 않게 ‘우린 너희와 달라’라는 태도를 접하고요.
정확하게 이런 방식의 태도, 기존의 범주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범주를 생성하는 것이 능사인가, 이런 태도가 기존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강화하는 태도는 아닌가라는 비판 역시 존재합니다. 내가 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느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범주를 선택하고 그 범주로 자신을 설명하는 태도 자체는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다른 범주를 생산하는 작업, 즉 ‘나는 비트랜스여성도 비트랜스남성도 아닌 젠더퀴어야’라는 언설은 정확하게 비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남성 범주를 안정적 범주로, 기준 범주로 재설정하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비트랜스여성, 비트랜스남성은 어쨌거나 유의미한 범주로 남겨지니까요. 물론 이 위험은 언제나 기존 범주를 흔들고 불안하게 만들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양가적이지요. 트랜스젠더가 이 양가성으로 젠더를 흔들었고, 지금은 젠더퀴어란 범주명명으로 그러는 듯도 합니다. 좀 더 조심스러운 평가가 필요하지만요.
그런데 이런 비판은 비규범적 존재라면 언제나 들었던 언설입니다. 부치-펨 관계를 두고 이성애 모방 아니냐, 이성애 재생산 아니냐고 비판했던 것처럼요. 그래서 이런 비판은 기존의 지배 규범적 범주(비트랜스젠더 같은…)를 방어하려는 기획에서 등장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도 야기하는 측면도 분명 존재합니다. 새로운 범주가 기존 질서를 흔드는 측면과 안정시키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동시에 새로운 범주를 비판하는 작업이 기존의 질서를 보호하려는 기획은 아닌가라는 의심 역시 늘 함께 등장해야 하고요. 그래서 어떻게 비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범주가 등장하는 방식이 ‘우린 너희와는 달라’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강하게 흔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개개인이 언제나 급진적이어야 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무척 위험한/부당한 행동이고요. 하지만 범주 논쟁은 언제나 기존 질서를 흔드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범주가 등장하는 틈새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