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음식의 효능

이론과 이론을 직조하는 작업보다 구체적 경험과 이론을 직조하는 작업이 더 큰 인식론적 전회를 야기한다. 당연하지. 이론은 경험의 언어고 특정 맥락에서 등장한 해석이니까. 그러니 이론-경험-이론으로 연결될 때 그 힘은 정말 강력하다. 뻔한 이야기.

비가 내렸더니 좀 지낼만 하다. 지난 주까지는 정말 힘들었다. 체력이 쭉-쭈욱 떨어지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쓰러지겠구나… 그러며 깨달았는데 기본 보양보다도 내게 중요한 건 몸을 차게 식히는 것. 더위를 식히니 살만하더라. 정말 더위에 취약하다. 올 여름은 어떻게 버틸까나.

더위에 좋다는 음료로 오미자차와 매실차가 있다. 매실차는 얼추 10년 가까이 장복하고 있는데 만약 매실로 버티는 게 지금 이 수준이라면 … 덜덜덜. 정말 무서운 일이다. ㅠㅠㅠ

체력, 그러니까 글을 쓰는 힘을 관리한답시고 이런저런 곡류나 야채를 찾은 적 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잡곡을 먹으며 이전보단 몸이 좋은 상태다. 그런데 이것저것 찾으면서 깨닫기를… 만병통치약이 아닌 음식이 없더라. 콩나물을 찾아도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콩나물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어떤 곡류나 채소의 효능이란 게 이런 식이란 뜻이다. 그냥 먹을 수 있는 건 챙겨 먹는 게 좋다는 말.

다른 한편 몸에 좋다는 음식의 상당수가 몸을 보혈한다,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설명을 포함한다. 몸에 열이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겐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심지어 더위를 식힌다는 오미자도 몸을 따뜻하게 하고 혈을 뚫으며… 운운한다. 뭐지…

곡류나 야채, 채소, 과일 등의 효능은 결국 이론과 같다. 내 몸에 맞는 곡류 등이 있듯 모든 이론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특정 몸이라는 맥락에서 작용한다. 이것을 놓치면 역효과 혹은 부작용이라고 하는 것만 발생할 뿐이다. 이론을 곡류 고르듯, 과일 고르듯 꼼꼼하게. 건강에 좋다는 말에 우르르 따를 것이 아니 듯 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뻔한 이야기를 웃기게 썼다. 후후후.

부산 갔다 옴..

때론 내게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시는 것 같다. 어릴 때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 그리고 지금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어머니.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 아버지와 관련한 첫 번째 기억이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것이듯 썩 좋은 모습이 아니다. 언제나 불편한 관계. 몇 달만에 만나면 딱 5초 반갑고 그 다음부터는 싸우거나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대략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뭔가 다른 모습을 만나고 있다. 어머니와 나, 둘이 모두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다. 혹은 언니에게로 어머니의 관심이 많이 옮겨가서 그럴 수도 있다. 어쨌거나 예전처럼 그렇게 날이 잔뜩 선 관계를 맺지는 않고 있다. 물론 박사학위 논문이 끝나면 결혼전쟁이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다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다.
부산에 갔다 왔다. 어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히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이런 저런 잡담이었지만 음식을 하며, 그냥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긴장을 한 상태다. 결혼과 같은 이슈, 박사 과정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계속 긴장하고 걱정한다. 그럼에도 예전과 같은 그런 초긴장상태, 신경이 한없이 날카로워서 작은 말에도 상처가 날 것 같은 그런 상태는 이제 아니다. 확언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이다.
나이가 더 들고,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일이 더 많이 생기면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좀 더 편해질까…
그나저나 부산에 좀 더 자주 가야 할텐데…

동성결혼 비판 메모

미국에서 동성애자의 결혼 합헌 결정 이후 ‘다음은 트랜스젠더’라는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몇 곳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기분 더러운 태도다. 동성애자의 정치 의제는 완결되었으니 이제 트랜스젠더에게 관심을 줄게라는 태도는 이른바 LGBT/퀴어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시켜준다. 이른바 LGBT/퀴어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성결혼 의제를 적극 지지하는 이들이며 그렇지 않은 의제를 사유하고 주장하는 이들은 구성원이 아님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런 태도는 동성애자의 동성결혼 의제가 최우선이며 트랜스젠더 의제는 그 다음이라는 의미, 즉 트랜스젠더는 동성애자에 비해 2등 시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정말 이기적이고 오만한 이 태도는, 철저하게 지배 규범적 삶을 욕망하는 태도다. 솔직하게 말해서, 추하다.
그런데 바이섹슈얼/양성애자는? 동성애자의 동성결혼 이슈가 적법해졌으니 그 다음은 트랜스젠더란 태도는 바이섹슈얼을 누락할 뿐만 아니라 고의로 배제한다. 이런 태도는 전혀 새롭지 않다. 바이는 마치 동성애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바이는 클로짓 동성애자라고 생각하거나, 바이는 이성애 특권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태도다.
이들은 바이섹슈얼/양성애자를 전혀 사유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다음에 트랜스젠더면 바이섹슈얼은? LGBT로 수렴할 수 없는 더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퀴어는? 이딴 식의 위계화와 순서 만들기는 결국 동성결혼 이슈가 이른바 퀴어 이슈, 동성애자의 이슈가 아니라 결혼을 제외한 모든 삶에서 어려움이 없는 매우 이성애규범적이고 동성애규범적 존재의 이슈임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동성결혼으로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하며 다음은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사실상 동성애자가 아닌 LGBT/퀴어의 의제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다. 사유하지 않음, 혹은 동성애 중심, 동성결혼 중심의 세계관이 야기한 효과다. 때때로 마치 동성애자의 결혼이 다른 퀴어에게도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동성 파트너 관계를 인정한 법이 바이섹슈얼은 부정하는 사건이 때때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퀴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았으면 한다. 아님 퀴어는 곧 동성결혼을 원하는 동성애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제한하는 식으로 분명하게 그 의미를 밝히거나.
더 놀라운 점은 ‘다음은 트랜스젠더’라는 태도가 이제 동성애자의 정치 의제는 끝났거나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식의 태도를 함의한다. 더 화가 나는 일이다. 중하층 계급의 이슈, (비/미등록)이주민 이슈, 그리고 십대 혹은 청소년의 이슈는? 여전히 학교에서 왕따를 겪는 이슈는? 그리고 더 많은 이슈는? 케이트 본스타인은 동성결혼 이슈를 최우선 삼는 이들을 이기적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이기적이다. 동성결혼 이슈가 얼마나 많은 이슈를 삭제하고 지웠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화가 난다. 고민을 더 정리해서, 공부를 더 해서 동성애자 결혼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