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키소바(야키소바 아님)

얼추 열흘 전 E가 다음의 링크를 보내줬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라면을 간편하게 볶음면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경우에 따라선 야키소바로 만드는 방법이었고. 이 방법이 정말 마음에 든 나는 이 만화를 몇 번이나 본 다음 그 주 주말 라키소바를 만들었다. 만화에 나온 방법에서 계란은 당연히 빼고, 대신 수프를 넣을 때 청경채와 숙주를 같이 넣었다. 맛이 꽤나 괜찮았지만 아우래도 청경채와 숙주를 따로 볶은 다음 나중에 추가하는 방법이 좋을 듯했다. 무엇보다 숙주나물을 미리 볶지 않고 나중에 추가할 경우 숙주나물에서 수분이 다량 분출되어서 볶는 시간이 길어지고, 면이 불어버린다.

이것이 나물을 따로 볶아서 만든 라끼소바.
기름에 페페론치니를 몇 개 가루 내어서 고추기름을 만든 다음 편마늘, 청경채, 숙주를 볶아 준다. 그 다음 끓는 물에 라면을 풀고 수프를 풀면서 볶은 야채를 같이 넣어서 잘 버무리면 끝.
당연히 맛있다.

이것은 설명절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만든 라키소바.
기름에 고춧가루와 (편마늘이 없어서)다진마늘을 볶다가 청경채와 (숙주나물이 없어서)팽이버섯을 볶았다. 그 다음 끓는 물에 라면을 풀고 수프를 넣은 다음 볶은 야채를 같이 잘 버무린 것.
역시 숙주나물이 아삭함이 더 맛있고, 다진마늘을 좀 줄이고 편마늘을 충분히 넣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맛나다.
사진을 찍지 않은 버전도 몇 있는데 요즘 이렇게 해서 맛나고 건강하게 한끼 식사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맛있다.
+좀 더 다양한 라키소바 혹은 야키소바를 위해 비건용 중화소스와 내가 먹을 수 있는 우스터소스를 구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야키우동을 해먹어도 괜찮고 쌀국수로 해먹어도 괜찮을 듯.

한국 맥락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움

평소에는 별 상관이 없는데 이걸 글로 쓰거나 말로 할 때, 특히 한국이 아닌 곳에 말할 때 정말 묘하게 서글퍼지는 그런 일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 한국에선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어떤 법적, 의료적 제도나 규정된 절차가 없다. 나는 이것이 장점이기도 하다고, 혹은 무작정 이것이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제도의 부재는 언제나 나의 법적, 의료적 요구가 성취될 가능성을 복불복으로 만들고 이것은 내 삶의 불안정을 가중한다. 하지만 복불복은 틈새를 만든다. 예를 들어 법으로 만 19세 이상부터 호적 상 성별을 변경할 수 있다는 지침이 있다고 해도, 규정된 제도가 없기에 만 19세가 안 된 이들도 경우에 따라 호적 상 성별을 변경할 수 있다. 이 틈새의 힘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제도의 부재를 마냥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것이 곧 인권의 진전으로 평가되는 어떤 경향성에서, 제도의 부재는 삶 자체를 초라하고 불쌍한 것으로 만든다. 제도를 만드는 것이 결코 삶의 질의 진전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제도가 부재한다’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효과를 지우기란 쉽지 않다.
제도의 존재 혹은 부재와 삶의 질, 인권의 현실은 분리해서 사유해야 하는 이슈임에도 이것을 연결해서 사유하고 설명하는 경향성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 특히 한국 맥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선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어떤 나라는 제도는 잘 갖춰져 있지만 혐오 폭력이 빈번하고 제도가 실제 개인의 삶에 작용하지 않는다. 한국은 제도가 부재하지만 미국이나 브라질에서처럼 직접적 살인의 형태로 혐오 폭력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의 혐오는 그 형태가 다르기 때문인데, 간접적 살인이나 오지랖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른바 트랜스포비아는 “트랜스젠더 이 더러운 괴물”과 같은 직접적 표현도 있지만, “내가 널 위해 충고하는데 말야”, “그래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말이야”와 같이 친절, 염려, 좋은 사람이라는 사회적 이미지를 채용해서 발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트랜스젠더의 피를 말리고 때때로 죽음이나 다른 여러 선택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서구 논의 맥락으로, 서구의 혐오 폭력이나 혐오 발화 논의로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기가 매우 곤혹스럽다. 동시에 제도의 존재나 부재, 삶의 질, ‘인권의 진전’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한국에서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비단 한국에서만이겠느냐만).
아무려나 글을 쓰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하다. 주요 독자가 한국인 혹은 한국어만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란 점에서 몸이 더 복잡하다.
뀨물렁…

섹스의 수행

어쩌면 트랜스젠더가 연행하는 것, 반복 수행하는 것 중 하나는 젠더의 수행만이 아니라 섹스의 수행인지도 모른다. 더 정확하게는 트랜스젠더가 젠더를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섹스를 어떻게 수행하는가릋 질문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먼 예를 들어, 1960년대였나 아그네스란 mtf/트랜스여성은 성전환수술을 위해 의사를 찾아갔다. 담당 의사는 아그네스의 호르몬 수치, 신체 외형 등을 검사했더니 평균적 여성의 그것에 가까웠다. 단지 염색체만 XY였다. 의사는 놀라워하며 아그네스를 인터섹스로 독해하며 성전환수술을 시행했다. 수술이 끝난 뒤 아그네스가 밝히기를 자신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먹는 에스트로겐 제제를 먹어왔다고 했다. 인터섹스 몸이라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에스트로젠을 투여한 몸이었다.
(디테일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경험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아그네스가 의료진이 규정하고 원하는 젠더를 적절히 잘 수행했다는 점만이 아니다. 아그네스는 의사 앞에서, 이른바 의사의 의료적 진료 앞에서 섹스(생물학적으로 타고난다고 여기는 것)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른마 과학적 검사, 연구는 이 수행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아그네스만의 경험이 아니다.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문제 삼아야 함과는 별개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할 뿐만 아니라 섹스와 젠더를 본질로 엮는 사회적 인식에서 트랜스젠더의 젠더 수행은 동시에 섹스 수행이다. mtf/트랜스여성이 여성 젠더로 통할 때, 천상여자로 통할 때 이때 사람들은 mtf의 섹스 역시 의심하지 않고 XX인 사람일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ftm/트랜스남성이 남성 젠더로 통할 때, 상남자로 통할 때 이때 사람들은 ftm의 섹스 역 별다른 의심 없이 XY로 믿어버린다. 섹스-젠더 본질주의가 여전히 강고한 사회에서 원하는 젠더로 통하는 트랜스젠더는 섹스와 젠더를 동시테 수행하고, 젠더를 성공적으로 인용함은 곧 섹스를 성공적으로 인용함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비의료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역시 섹스를 수행한다. 의료적 조치와 갈등하는 mtf/트랜스젠더가, 스스로를 남성으로 인식하지 않거나 남성으로 동일시하지 않는 mtf/트랜스젠더,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로 통하길 원하는 이가 남성으로 통할 때 이것은 젠더를 인식함에 있어 해석의 간극, 괴리를 발생시킨다. 본인은 자신의 몸을 비남성의 몸으로 독해하고 타인은 남성의 몸으로 인식할 때 섹스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합하고 해석해야 하는 논쟁의 장이 된다. 이 순간 섹스는 각자의 해석이 경합하는 장이 된다. 더군다나 어차피 누구도 염색체를 확인하면서 섹스-젠더를 규정하지 않음을 떠올린다면, 섹스는 매우 막연하고 환상의 장으로 남아가버린다. 섹스는 미스테리. ftm/트랜스젠더의 몸, 젠더퀴어의 몸 역시 마찬가지다. 트랜스젠더/젠더퀴어에게 섹스는 논쟁의 장이 되고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 갈등과 의심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수행하느냐, 어떤 틈새와 의심은 존재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수행하느냐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장이 된다.
트랜스젠더/젠더퀴어만이 아니라 이 사회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젠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섹스를 성공적으로 인용하고 또 재현한다. 비트랜스젠더가 비트랜스젠더로 의심 받지 않기 위해선 자신의 젠더 실천을 통해 섹스 범주도 의심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수행하는 주요 요소는 젠더 만이 아니라 섹스며, 섹스를 의심받지 않도록 하는 실천이다. 그렇다면 섹스 자체를 다시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