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어머니께서 명절 차례엔 떡 대신 피자를 올리기로 하셨다. 어머니의 전격 결정! 떡을 잘 안 먹는 이유도 있고(작년 추석 때 맞춘 떡이 아직도 냉동실에…) 어머니에게 실제 필요한 음식을 맞추자는 이유도 있다.
ㄴ.
자전거 사고가 났다.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붙어 있는 길을 걷고 있는데, 잠깐 자전거도로에 서 있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달리던 자전거가 나를 보고 당황하다가 부딪혔다. 나는 조금 부딪혔지만 라이더는 넘어졌다. 미안해서 라이더가 떠날 때까지 사과하며 그 자리에 있다가 라이더가 떠난 다음에야 산책을 계속했다. 아니, 산책로를 아예 벗어나 길건너 인도로 가버렸다.
ㄷ.
두 시간 가량의 산책, 한 시간 가량은 어머니와 했고 (어머니가 힘들다고 돌아가셔서) 남은 한 시간은 혼자 걸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게, 어쩐지 많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어떤 디스를 당할지 가늠할 수가 없으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 시간이 괜찮았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한 건 끊임없이 나를 결혼, 취업, 젠더 실천 등 이성애규범성으로 끌어들이는 대화 때문인데 시간이 좀 더 흘러 이런 걸 어머니가 포기하는 날이 온다면 많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산책을 하다가 문득 그런 날이 언젠가 오겠거니 했다. 물론 그때도 여전히 아쉬워하며 결혼 이야기, 취업 이야기, 생계 이야기로 디스를 당하겠지만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겠지.
ㄹ.
이런 점에서 많은 세월을 견뎌왔구나 싶다. 정말 죽일 듯 악감정을 품었던 날도 있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서 전화 조차가 부담스러운 날이 있었다. 그런 시간은 매 순간 괴로웠지만 어쨌거나 그 시간을 견뎌왔구나 싶다. 물론 앞으로도 이런 일을 다시 겪을 것이다. 분명 다시 겪겠지. 어쨌거나 그 순간을 견디는 방식으로, 결국은 내가 견디는 방식으로, 하지만 어머니 역시 엄청나게 견디고 계시기에, 이 견딤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앞으로의 과제겠지.
ㅁ.
말은 이렇게 해도 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속이 뒤집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