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규범의 얼굴을 후려치기

이틀 연속 쪽글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ㅅ;
지젝, 버틀러 등의 폭력 논의를 밑절미 삼은 글이라, 사실 수업 맥락을 모르는 분이 읽기엔 꽤나 난감할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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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4.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규범의 얼굴을 후려치기
-루인
자신의 이야기를 서사로 구성할 수 있고, ‘나’의 상대인 ‘너’를 지칭하며 발화할 수 있는 ‘나’/주체는 필연적으로 ‘너’/타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나’, 혹은 ‘나’와의 관계, ‘나’를 준거틀로 삼는 자장에 존재하는 ‘너’라는 언술 방식은 ‘내’가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화 방식은 주체-타자라는 이항 관계에서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는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음을 질문할 수 있다. 타자는 어떻게 해서 타자로 구성되는가? 주체는 자기 진술을 할 수 있고, 타자는 주체의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타자 혹은 나 아닌 누군가가 주체의 타자로 소환되지는 않는다(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나의 거울로 삼지는 않는다). 주체와 타자라는 이항 관계 구조를 구성하는 다른 무언가/누군가인 구성적 외부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저도 모르게) 말하고, 김애령이 비판적으로 지적한 “은유로서 여성”이고, 슬라보예 지젝이 제3자, 무젤만 혹은 오드라덱 등으로 설명한 무언가다.
주디스 버틀러는 “내가 나와 동일시하는 이는 내가 아니며 이런 ‘나는 아님’이 동일시의 조건”(199)이라고 논했다. 버틀러가 ‘나는 아니지만 내가 동일시하는 혹은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를 논할 때, 이것은 동시에 내가 동일시하지 못 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 어떤 존재/집단을 가정한다. 그리고 내가 동일시하지 않거나 동일시를 못 하는 존재/집단은 타자일 수도 있고 제3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주체 형성 혹은 인간성 형성의 삼항 구조에서 내가 동일시하지 않는 존재/집단은 타자와 제3자 모두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타자성을 전적으로 찬양하는 레비나스가 타자성 논의에서 고려하지 못 한 것은 “모든 인간의 근저에 있는 동일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비인간적” 타자성 그 자체”라고 했다(255). 제3자를 직접 논하는 지젝은 제3자가 얼굴도 심연도 없는 존재며,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의 출발이나 신이 경유하는 공간/존재가 아닌 무언가라고 지적한다(233, 257).
주체와 타자라는 이항 대립을 구성하는 외부며, 주체는 말할 것도 없고 타자도 때때로 존재 자체를 외면하고 얼굴 없는 무언가로 제3자를 논할 때, 이 논의는 퀴어 정치학의 논쟁을 (새롭지는 않다고 해도)흥미롭게 살필 수 있는 어떤 지평을 제공한다. 이 논의를 통해 퀴어 정치의 많은 장면을 흥미롭게 다시 풀어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그리고 아직은 논의의 수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는 트랜스규범성)을 둘러싼 논의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작년 가을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이 동성결혼식을 올리며 동성 간 결혼 이슈를 제기했다. 동성 간 결혼 이슈는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논의가 축적된 것이고,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때론 유사한 형태로 동성 간 결혼/결합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동성 간 결혼 혹은 결합은 길다면 긴 역사를 지닌다. 아울러 적지 않는 동성 커플이 공개 행사로 결혼식을 올렸고, 어떤 커플은 관공서에 찾아가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조광수-김승환은 이 모든 역사를 무시하며 마치 자신들이 국내 최초의 동성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홍보했고, 동성애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 선 존재로 자신들을 재현했다.
퀴어 정치, 퀴어 이론이 끊임없이 규범성을 문제 삼고, 끊임없는 불편을 야기하는 정이자 이론이라고 할 때, 나는 동성결혼 이슈가 이성애규범성을 문제 삼는 정치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물론 결혼을 이성 간의 관계로 규정하는 이성애규범성에서 동성 간 결혼은 대항 정치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질거(결혼 제도) 자체를 문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혼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다양한 관계 지형을 배제하며 얼굴 없는 존재처럼 만든다. 하지만 현재의 동성결혼 논의가 문제인 것은 다른 많은 중요한 이슈를 은폐하거나 주변화시켜서만이 아니다. 또한 이 지점이 동성결혼을 동성애규범성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도 아니다. 현재의 동성결혼 이슈는 결혼을 둘러싼 LGBT/퀴어 공동체 내부의 복잡한 기류를 은폐한다. 동성애 커뮤니티 내부엔 바이/양성애자의 결혼을 향한 극심한 혐오가 존재한다. 그래서 바이는 결혼을 할 존재기에 (실제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바이란 이유만으로)배신자일 뿐만 아니라 결혼의 가능성은 바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결혼을 이유로 바이를 비난하는 이들 중 적지 않는 수가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합법화되길 원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맥락에서, 동성결혼은 법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일이며, 실제 일부 트랜스젠더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동성결혼을 했다. 동성애자이기도 한 트랜스젠더 중 일부는 파트너와 합의 하에 자신의 호적 상 성별을 바꾸지 않고 합법적으로 동성결혼을 하며 결혼 제도, 이성애규범성 자체를 교란하고 있다. 혹은 합의 없이 동성결혼이 진행되기도 한다. LGBT/퀴어 공동체에선 결혼을 둘러싼 복잡한 지형이 펼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동성결혼 이슈는 이런 모든 것을 배제하며 하며 마치 없는 일처럼, 모르는 일처럼 다룬다. 이성결혼과 동성결혼이라는 관계에서 바이의 결혼 이슈,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 이슈는 제3자, 구성적 외부로 형성된다. 그리고 동성결혼이 동성애규범성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단순히 중요한 이슈의 우선 순위를 규정하는 문제를 야기해서가 아니다. ‘공동체’에서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들,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없는 것처럼 완벽한 부재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목소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동성결혼 이슈가 동성애규범성이다.
지젝의 이웃/괴물 혹은 제3자의 논의를 읽으며, 나는 나의 이웃만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란 점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내가 누군가의 이웃, 괴물, 호근 제3자(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존재 자체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범주의 어떤 측면은 누군가에게 그 자체로 폭력이고 위협이며, 얼굴 없고 심연 없는 부재다. 그렇다면 증언할 수도 없고 입장을 표명할 수도 없다(지젝 256)고 말하는 무젤만과 달리, 어쨌거나 증언하고 입장을 표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항상 증언이나 입장으로 인식되지는 않는 그런 위치(타자와 제3자 사이 어딘가에 있는 위치)에서 나는 주체-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젝의 논의를 퀴어하게 전유할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쪽글] 불확실한 타자

원래 다른 글을 썼지만… 저장을 못하고 날린 덕분에… 쪽글로 때웁니다.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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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6. 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불확실한 타자
-루인
“누가 나의 이웃인가?”(지젝 2010, 14) 누가 나의 타자인가? 나의 이웃, 나의 타자를 가를 수 있다면, 어떤 “언어로 타자를 말할 수 있는가”(김애령, 72). 이런 일련의 질문은 김애령이 지적하듯(80), 이웃-타자를 탐문하는 철학적 작업이기보다 주체를 설명/해명하는 작업에 더 가깝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를 경유하는 김애령, 주디스 버틀러,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은유의 정치학, 얼굴과 윤리학, 이웃과 타자/괴물 등을 논한다. 이들의 논의는 또한 ‘내’가 이웃의 ‘얼굴’을 조우할 수 있는가란 질문, ‘얼굴’이 윤리학의 출발점일 수 있는가란 질문을 탐문하는 여정이기도 하고 주체 ‘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두고 “살인에의 유혹이자 퍙화에의 호소”(버틀러, 185에서 재인용)라고 말하며 얼굴이 절대적 윤리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왜 살인에의 ‘유혹’일까? 타자를 조우하며 그를 죽이고 싶은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은 타자에게서 어떤 식으로건 (비언어적)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에의 유혹’이 어떤 감정의 작동이고, 어떤 누군가를 타자로 만들거나 ‘사물’로 지각하는[化] 과정 자체가 사회적 지배 체제/규범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방법 중 하나라면, 살인에의 유혹은 특정 체제나 질서, 안전을 유지하려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체인 ‘나’와 타자 사이에 어떤 식으로건 의미작용이 발생했다는 뜻이며, 타자와 나의 관계성을 ‘내’가 지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관계성의 지각은 타자의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것인데, “메시지를 전달받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의지를 박탈당한다는 것”(버틀러, 191)이란 점에서 주체 ‘나’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의 불확실성을 인지하도록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살인에의 유혹이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살인에의 유혹은 “결국 주체는 타자를 보면서 자기 자신만을 본다”(김애령, 43)는 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김애령은 타자와 주체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가 주체가 된다고 했다(16). 이야기하기, 말하기는 주체되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리고 지젝은 개인적 이야기, 자기 서사를 통해 “풍부한 내면을 지닌 사람”은 적이 될 수 없으며, 적이란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2011, 80). 그리고 이 측면에서 지젝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타자/괴물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보수적 작가라면 쓸 수 없는 급진적 작업이라고 했다(2011, 80). 한편에서,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타자/괴물의 목소리를 작품 한 가운데 배치하며 주체와 타자, 창조자와 이름 없는(!) 피조물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때로 그 관계를 흔들며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아름다운 텍스트다. 다른 한편에서, 피조물/괴물은 끝까지 악의 위치에 놓인다. 그리고 사회적 ‘괴물’(때때로 범죄인)의 내적 삶, 고단했던 생애를 설명하는 이야기(서사화된 내면)는 현대 사회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타자라고 해도 괴물이 될 수 있고, 주체인 ‘나’를 위협하는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타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관건이다. 타자의 ‘진솔한 이야기’, ‘풍부한 내면’은 그를 ‘불쌍한 존재’, 혹은 ‘알고보니 그도 또한 피해자’로 만들 수 있지만 ‘괴물’일 수밖에 없는 근거로 쓰일 수도 있다.
타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란 문제는 버틀러가 얼굴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로 제기한 문제기도 하다(193-205).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얼굴, 오사바 빈 라덴의 얼굴 등은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지만 이들의 얼굴이 윤리학의 출발점,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절대적 윤리를 드러내는 조우/마주침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얼굴은 신의 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부르카가 강제로 벗겨진 아프칸 소녀들의 얼굴(194)은 해방의 상징으로만 유통되고 그들의 고통, 슬픔 등은 누락된다. 타자를 나로 환원하지 않는 것, 타자를 “무한한 외재성에서 내재적 전체성”으로(김애령, 89) 떨어지게 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타자의 불확실함을 각성하고 이해하려는 것(버틀러, 184)이 레비나스가 얘기한 타자의 윤리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유통되는 얼굴은 “삶의 불확실함을 정지”(버틀러, 196)시키려는 행위 같다. ‘나’로 환원하지 않고, 나의 불확실함으로 타자의 불확실함을 수렴하지 않는 태도는 여기서 가능하지 않거나 매우 어려운 듯하다. 그리하여 이 얼굴들은, ‘괴물’의 이야기처럼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의 얼굴이 아닌 얼굴”(버틀러, 198)이며, 주체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주체를 형성하고, 너로 구성되며, 어떤 얼굴이 레비나스적 의미의 얼굴이 될까? 이 질문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누가 나의 ‘이웃’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누가 나의 ‘타자’로 구성될 수 있을까?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논했지만, 김애령은 여성, 여성적인 것을 은유로 설명하는 레비나스의 논의가 여성을 “윤리적 주체도, 절대적 타자도 될 수 없는 존재로 위치”(92)짓는다고 지적한다. 김애령과는 다른 맥락에서, 지젝은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지젝 2011, 91). 그러니까 이것은 나/우리는 주체-타자라는 이항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윤리적)주체-(절대적)타자-무언가라는 삼항 이상의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타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무언가를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즉 삶의 풍부한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 관계를 더 복잡하고 ‘윤리’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이것은 필요한 작업이다.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즉 이야기되는 순간 그 무언가는 내재적 전체성에 어떻게든 포섭되거나 불확실함을 상실할 것이며, 이야기되지 않음이 그 무언가에게 더 ‘윤리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 잡담

별 의미가 없는 소리긴 하지만 어차피 혼자 헛소리하는 블로그니까…

‘한국 트랜스젠더의 구성, 100년’ 혹은 ‘한국 젠더 개념의 발명, 100년’이란 주제로 논문을 쓰기로 어느 정도 확정한 상태다. 퀴어락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논문 작업과 퀴어락 일이 서로 보완 작업을 할 것이란 기대도 있고(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아무려나 일단은 단행본을 중심으로 1980년대, 1990년대 퀴어 관련 기록물을 주로 수집하고 있다. 국회도서관을 찾아가는 단계는 아니고 사전 조사 차원으로 주로 헌책방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그냥 무식하게 살피는 거지. 단행본을 중심으로 수집하다보니 1970년대 후반이 한계지만 그럼에도 1980년대는 퀴어 역사에서 무척 흥미롭고 소중한 시기다. 이 시기를 어떻게 분석할지를 상상하노라면 아직은 감이 전혀 안 잡힌다.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정도는 걱정도 아니다. 지금 있는 기록물만 잘 분석해도 학위 논문의 한 챕터를 구성할 정도 혹은 학술지 논문을 쓸 분량은 되지만 이게 앞으로 수집할 기록물의 티끌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작 나의 걱정은 1970년대 이전 기록물 중 단행본을 얼마나 수집할 수 있을까란 고민과 결국 잡지와 신문기사, 정부간행물을 중심으로 수집할 텐데 이것을 당대 역사와 어떻게 결합할지 감당이 안 된다는 걱정이 있다. 할 수 있을까나. 3년 프로젝트로 삼았지만 3년을 온전히 이 작업에 쏟는 게 아니라서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다. 휴우…

아무려나 그냥 나는 살아가는구나, 에헤라 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