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다른 글을 썼지만… 저장을 못하고 날린 덕분에… 쪽글로 때웁니다. ㅠㅠㅠ
2014.10.16. 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불확실한 타자
-루인
“누가 나의 이웃인가?”(지젝 2010, 14) 누가 나의 타자인가? 나의 이웃, 나의 타자를 가를 수 있다면, 어떤 “언어로 타자를 말할 수 있는가”(김애령, 72). 이런 일련의 질문은 김애령이 지적하듯(80), 이웃-타자를 탐문하는 철학적 작업이기보다 주체를 설명/해명하는 작업에 더 가깝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를 경유하는 김애령, 주디스 버틀러,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은유의 정치학, 얼굴과 윤리학, 이웃과 타자/괴물 등을 논한다. 이들의 논의는 또한 ‘내’가 이웃의 ‘얼굴’을 조우할 수 있는가란 질문, ‘얼굴’이 윤리학의 출발점일 수 있는가란 질문을 탐문하는 여정이기도 하고 주체 ‘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두고 “살인에의 유혹이자 퍙화에의 호소”(버틀러, 185에서 재인용)라고 말하며 얼굴이 절대적 윤리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왜 살인에의 ‘유혹’일까? 타자를 조우하며 그를 죽이고 싶은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은 타자에게서 어떤 식으로건 (비언어적)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에의 유혹’이 어떤 감정의 작동이고, 어떤 누군가를 타자로 만들거나 ‘사물’로 지각하는[化] 과정 자체가 사회적 지배 체제/규범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방법 중 하나라면, 살인에의 유혹은 특정 체제나 질서, 안전을 유지하려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체인 ‘나’와 타자 사이에 어떤 식으로건 의미작용이 발생했다는 뜻이며, 타자와 나의 관계성을 ‘내’가 지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관계성의 지각은 타자의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는 것인데, “메시지를 전달받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의지를 박탈당한다는 것”(버틀러, 191)이란 점에서 주체 ‘나’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의 불확실성을 인지하도록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살인에의 유혹이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살인에의 유혹은 “결국 주체는 타자를 보면서 자기 자신만을 본다”(김애령, 43)는 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김애령은 타자와 주체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가 주체가 된다고 했다(16). 이야기하기, 말하기는 주체되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리고 지젝은 개인적 이야기, 자기 서사를 통해 “풍부한 내면을 지닌 사람”은 적이 될 수 없으며, 적이란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2011, 80). 그리고 이 측면에서 지젝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타자/괴물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보수적 작가라면 쓸 수 없는 급진적 작업이라고 했다(2011, 80). 한편에서,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타자/괴물의 목소리를 작품 한 가운데 배치하며 주체와 타자, 창조자와 이름 없는(!) 피조물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때로 그 관계를 흔들며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아름다운 텍스트다. 다른 한편에서, 피조물/괴물은 끝까지 악의 위치에 놓인다. 그리고 사회적 ‘괴물’(때때로 범죄인)의 내적 삶, 고단했던 생애를 설명하는 이야기(서사화된 내면)는 현대 사회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타자라고 해도 괴물이 될 수 있고, 주체인 ‘나’를 위협하는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타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관건이다. 타자의 ‘진솔한 이야기’, ‘풍부한 내면’은 그를 ‘불쌍한 존재’, 혹은 ‘알고보니 그도 또한 피해자’로 만들 수 있지만 ‘괴물’일 수밖에 없는 근거로 쓰일 수도 있다.
타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란 문제는 버틀러가 얼굴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로 제기한 문제기도 하다(193-205).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얼굴, 오사바 빈 라덴의 얼굴 등은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지만 이들의 얼굴이 윤리학의 출발점,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절대적 윤리를 드러내는 조우/마주침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얼굴은 신의 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부르카가 강제로 벗겨진 아프칸 소녀들의 얼굴(194)은 해방의 상징으로만 유통되고 그들의 고통, 슬픔 등은 누락된다. 타자를 나로 환원하지 않는 것, 타자를 “무한한 외재성에서 내재적 전체성”으로(김애령, 89) 떨어지게 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타자의 불확실함을 각성하고 이해하려는 것(버틀러, 184)이 레비나스가 얘기한 타자의 윤리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유통되는 얼굴은 “삶의 불확실함을 정지”(버틀러, 196)시키려는 행위 같다. ‘나’로 환원하지 않고, 나의 불확실함으로 타자의 불확실함을 수렴하지 않는 태도는 여기서 가능하지 않거나 매우 어려운 듯하다. 그리하여 이 얼굴들은, ‘괴물’의 이야기처럼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의 얼굴이 아닌 얼굴”(버틀러, 198)이며, 주체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주체를 형성하고, 너로 구성되며, 어떤 얼굴이 레비나스적 의미의 얼굴이 될까? 이 질문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누가 나의 ‘이웃’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누가 나의 ‘타자’로 구성될 수 있을까?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논했지만, 김애령은 여성, 여성적인 것을 은유로 설명하는 레비나스의 논의가 여성을 “윤리적 주체도, 절대적 타자도 될 수 없는 존재로 위치”(92)짓는다고 지적한다. 김애령과는 다른 맥락에서, 지젝은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지젝 2011, 91). 그러니까 이것은 나/우리는 주체-타자라는 이항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윤리적)주체-(절대적)타자-무언가라는 삼항 이상의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타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무언가를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즉 삶의 풍부한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 관계를 더 복잡하고 ‘윤리’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이것은 필요한 작업이다.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즉 이야기되는 순간 그 무언가는 내재적 전체성에 어떻게든 포섭되거나 불확실함을 상실할 것이며, 이야기되지 않음이 그 무언가에게 더 ‘윤리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