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와 팔레스타인 수업

이번 학기에도 퀴어이론 수업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새로운 주제를 여럿 추가했다. 그 중 하나는 ‘퀴어 팔레스타인’이다. 퀴어 팔레스타인과 함께 또 다른 주제를 추가하고 싶었는데, 일전에 적은 것처럼 한 학기에 할 수 있는 주제는 많지가 않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생기고, 다시 생길지 알 수 없는 수업일 때, 혹은 내가 다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세부 주제를 구성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제약이 많다. 암튼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주제를 포기하고 퀴어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짐작하겠지만 나는 퀴어 의제도, 팔레스트인 의제도 잘 모른다.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퀴어-팔레스타인 운동이나 논의를 잘 따라가고 있지도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퀴어 팔레스타인을 다루겠다고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인데 퀴어이론 수업이라면 늦어도 올해는 이스라엘의 침공과 팔레스타인 의제를 다뤄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 때문이다. 일종의 수업이 가져야 할 윤리 같은 거? 내가 뭐 윤리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잘 모르더라도 이 주제를 수업에서 시작해야 다음으로 이어가는 뭔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있었다.

그런데 이 수업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음 주에 할 예정이다. 대학원 수업이 강사가 완전히 장악하는 주제가 아니어도 다양한 배경의 수강생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라는 대책없는 믿음은 아니고 실제 파편적으로 아는 지식과 정보를 엮어나가는 작업 또한 수업에서 할 수 있는 경험 중 하나니까. 암튼 이런 이유로 이런 저런 자료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이왕 시작한 주제라면 어설프게 넘어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본 것과 포기한 것: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3학년 2학기, 보리

보리가 아프기 전에 본 것

[스포일러 같은 거 있을 수 있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봤다. 긴 상영시간에 비추어 재미있었다. 나는 16년의 시간이 중요한 시간으로 남았는데 주인공 밥의 입장에서는 윌라를 양육하며 혁명을 멈춘 시간이었지만, 다른 나머지에게는 혁명을 계속해서 이어간 시간이었다. 밥과 윌라의 정보를 누설하는 ‘배신자’가 되었지만 하워드 서머빌은 계속해서 해적방송을 하며 혁명의 구성원을 연결했다. 디안드라도 어디선가 혁명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윌라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채고 피신 시킬 수 있었다. 센세로 불리는 세르지오는 집을 개조하여 이민자를 안전하게 지낼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폭탄을 터트리는 방식의 혁명은 멈췄지만 정보를 유통시키고 백인우월주의자, 극우 포퓰리스트를 계속 감시하고, 이주민과 이민자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또한 혁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혁명인가? 느리고 천천히 가는 ‘저속 혁명’ 같은 느낌이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결국 록조가 윌라를 납치하려고 했을 때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핵심적인 힘이 되었고, 밥이 계속해서 사고를 치며 개그를 할 때 그를 구출하고 윌라와 만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러니까 윌라가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 혹은 저항하는 활동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6년의 시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진 무언가가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가고 조직을 유지시킨 그 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이 점이 나는 좋았다. 그리고 또 다르게 좋은 점. 윌라는 예기치 않은 도움 속에서 스스로 벗어났고, 밥은 윌라를 구출하기 위해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모두 좋았다. 윌라는 예기치 않게 자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가 되는 것의 개연성을 만들었다. 밥은 결국 딸 윌라를 구출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윌라를 구출하기 위해, 혹은 어떤 순간에 혼자 남겨졌다는 그 감각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추적하고 쫓아간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에 윌라가 고립감을 느끼기보다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 역할, 나는 그 역할을 해주는 사람도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언젠가 봤던 한 다큐멘터리에서 ‘퀴어의 생존은 의무’라는 말을 듣고 펑펑 운 적이 있다. 먼저 살아서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의 존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밥은 개그캐지.

<3학년 2학기>을 봤다. H가 좋다고 추천했는데, 개봉한 것을 뒤늦게 알아 서둘러 봤다. 매우 좋았고 슬펐다. 슬픈 것은 고3이 집안을 거들기 위해 어떤 책임을 지는 것, 불합리한 직장을 다니면서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는 모습이 슬펐다. 고3은 당연히 입시를 한다는 한국 사회의 서사에서, 입시가 끝나면 당연히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서사에서 ‘과학고’를 나와 3학년 2학기부터 공장에서 실습을 하며 곧바로 취업 되기를 희망하는 삶에서 이미 또 한 명의 생계부양자가 되고 있었다. 생계부양자가 되는 것이 슬프다는 것은 생애주기에 기반한 규범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의 표정, 어떤 불만도 표출하기보다 감내하는 그 표정이 슬펐다. 그리고 내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고3에 바로 수습을 거쳐 취업하는 삶을 이제야 좀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을 반성했다. 나의 세계는 지극히 규범적이고 대학 기반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제대로 모르면서도 함부로 떠들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기도 했다. 추가로 더 상영하는 곳이 있다면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보리의 간병이 필요해서 취소해야 했던 연극 두 편. <납골당 드라이브>와 <매드 어사일럼>. 둘 다 꼭 보고 싶었는데 취소했다. 수업 등 생계 활동이 아니면 당분간 외출은 자제할 필요가 있겠다. 보리는 병원에서는 쌩쌩하더니 집에 와서는 힘들어했다. 병원에 있기 싫어 일부러 활발했나 싶을 정도로 집에 오자마자 걱정이 되는 상태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어제 밤, 오늘 아침에는 다시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싶었다. 다음주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기로 했는데 한동안은 생계-소득 활동을 제외한 다른 모든 활동은 자제해야겠다.

보리, 일단 퇴원은 했지만

2박 3일 입원하고 오늘 퇴원했다. 어제 면회 갔을 때, 그리고 오늘 퇴원시키면서 들었던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검사 수치와 상태 사이의 괴리였다. 첫날 못 들은 이야기를 어제 들었는데 CK수치가 문제였다. 근육과 관련이 있는 이 수치가 첫 날은 기준치 상단의 2.5배 정도였고 췌장 수치가 유난히 나빠 주목 받지 않았다. 그런데 입원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검사를 했더니 CK수치가 기준치 상단의 12배 가량인 3000이 넘는 값이 나왔다. 그래서 의사도 어려워했다. CK 수치가 이 정도 값이 나오려면 심각한 구타나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라고. 문제는 관련성이 있을 다른 수치 중 일부는 감소하며 정상 범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보리의 컨디션이었는데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활발하다는 점이었다. 검사 수치와 상태 사이의 간극. 의사는 이것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오늘. 낮에 오늘 퇴원하자는 전화가 왔고 그래서 데리러 갔다. 병원에서 설명을 들으니, CK 수치는 4750을 넘겼고 췌장 관련 수치도 나빠졌는데 간이나 다른 관련 있을 법한 수치는 감소 중이거나 정상 범위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리는 활발했다. 근육에 경련이나 이상 증상이 관찰되냐면 그렇지 않았고 병원에서 나랑 있는 동안에도 상당히 활발했고 힘을 잘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서는 병원에서 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집에서 관찰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며 해준 두 가지 이야기는, 고양이의 췌장 수치를 측정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다음에는 헐액검사 기기를 바꿔서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것.

일단 연령이 있으시고 신장 문제를 초기에 발견했으니 겸사겸사 이것저것 약을 처방받았다. 아마 평생 약을 먹여야 하겠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