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할 때면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를 사유하며 젠더 자체를 뒤흔들고, 수강생이 얼마간 불안을 느끼길 바랐다. 하지만 양성애를 통해 동성애와 이성애의 경계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 때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범주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걸 배웠다. 오늘 강의 자리에서 배운 이야기였다.
이른바 남+남, 여+여, 남+여 이미지를 보여주며 각각이 어떤 관계를 지칭하는지 물었고, 수강생은 남성동성애, 여성동성애, 이성애(작은 목소리로, 어느 한 분이 양성애)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식의 이미지는 성적지향 이슈에 있어 이성애를 성적 지향이 아닌 것처럼 가정하거나 양성애를 아예 사유하지 않거나 매우 희미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양성애에선 연애를 할 경우 언제나 양성애가 비가시화된다고, 범주로서 존재가 비가시화된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질문도 받았는데, 양성애 관련 설명을 하고 나자 한 분이 매우 흥분하며 이성애가 불분명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냐며 따져물었다. 이성애만이 아니라 모든 성적지향이 그러하다고 답했다. 그냥 넘어간 것 같았지만… 첫 번째 쉬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시작했을 때 그 분을 포함한 3~4명이 자리를 비웠다. 두 번째 쉬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바이/양성애가 끊임없이 부정되고 인식에서 사라지고 배제되는 것이리라. 이성애 범주, 동성애 범주 자체를 가장 불안한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트랜스젠더가 성적지향을 불안하게 만드는 측면은 상상하지 않는데, 아마도 트랜스젠더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겠구나 싶다. 말을 해도 다소 피상적이고. 글쓰기 방식, 강의하기 방식을 바꿔야겠다.)
바이/양성애로 많은 가르침을 주는 E느님께 고마움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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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조금 다른 결론은 성적지향은 어느 정도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침투가 되었지만 젠더정체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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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적 느낌으로는 강의를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반응하는 사람 중엔 자신의 범주를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그냥 좋은 이야기, 교양을 듣는 느낌이기도 하다. 반면 화를 내는 사람은 뭔가 불안을 느꼈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 어떤 의심이나 흔들림을 느꼈다는 점에서 강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뜻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