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 내가 신을 운동화를 직접 사서 신은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아는 분이 신발공장을 했고, 그래서 가끔 상표도 알 수 없는 남는 신발을 선물 삼아 주시면 그 신발을 신었다. 그러니 이른바 캐릭터 신발이니 뭐니 하는 건 나와 별 상관 없는 일이었고 그런 상품을 신어보고 싶다는 바람도 갖지 않았다.
그렇게 새 신발이 들어오면 그걸 신어야 했는데 치수는 얼추 맞았음에도 나는 새 신을 신을 수가 없었다. 발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치수는 맞았다. 아니 어릴 땐 성장을 고려해서 신발을 크게 신어야 했기에 발가락에서도 한참 남았다. 그러니 발에 안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안 맞았다. 볼이 넓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신발을 구매할 때 볼 너비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땐 안 그랬다. 발가락을 눌렀을 때 많이 남는다면 그것은 내가 신기에 충분한 것이고 나는 신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발이 아팠고 부모님은 내가 신발을 신기 싫어서 엄살을 부린다며 혼을 냈고 때리기도 했다.
신발이 안 맞아서 아프다고 하면 맞는 신발로 바꿔 주는 게 ‘상식’ 같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환경에선 그게 상식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어릴 때 본가에선 내가 신을 신발을 직접 구매하는 일이 없었다. 그럴 경제적 여건도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 공장에서 남는 신발을 가져다 선물로 준다면 그걸 신어야만 했다. 그걸 신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만약 발이 아프면 그냥 참고 신다가 신발이 늘어나서 신을 만하면 그땐 편하게 신으면 되는 일이었다. 내겐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조금도 슬프게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그 시절을 그냥 살았고 내겐 당연한 일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환경에 유순해진 서글픈 현상으로 독해한다면 나로선 다소 당혹스러운데 이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신발에 구멍이 나거나 밑창이 떨어져도 새 신이 생길 때까진 그냥 신고 다녔는데, 이것 역시 나로선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에 좀 무덤한 성격이기도 하고 ‘아직은 신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랑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생각 난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에 여러 논평을 덧붙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뭐하나 싶어 다 지웠다. 그냥 내 어린 시절의 가벼운 경험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