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규범성, 트랜스규범성, 규범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기

트랜스젠더퀴어 정치를 진행함에 있어 규범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끊임없인 불편을 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1년 뒤 나의 고민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까지의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런 믿음과 별도로, 규범성을 어떻게 규정하거나 정의하거나 설명할 것인지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다. ‘동성애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양성애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명령이 규범성인가? 한편으로 그렇다. 하지만 규범성은 단순히 ‘어떻게 살라’라는 명령일 뿐만 아니라 삶의 복잡성을 가시화하거나 은폐하는 편집 작업, 큐레이팅 작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동성결혼 논의를 전개하면서 이성애결혼만을 정상화하는 사회적 규범을 문제삼으면서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것, 혹은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삼는데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모두 규범성에 해당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바이와 결혼, 트랜스젠더와 (합법적)동성결혼 논의를 모두 은폐하거나 결혼을 둘러싼 복잡한 실천을 싸잡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규범성을 설명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아직은 규범성, 특히 동성애규범성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규범성 비판을 무화시키려는 언설은 더 문제가 있다고 고민한다. 그렇다면 동성애규범성을 신랄하게 비판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나의 최근 고민인 트랜스규범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입장에서 ‘적당한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매우 단순하게 받아친다면, ‘적당한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생긴다면 바로 그때가 적기다. 중요한 건 이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다. 그리하여 고민하기를, 동성애규범성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트랜스규범성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문득, 이른바 보수기독교로 묶이는 반LGBT/퀴어 집단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며 동성애규범성을 들어 동성애를 비판하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이런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며 규범성을 문제 삼고자 할 때, 규범성을 문제 삼는 태도가 또 다른 규범성이 된다면 어떡할까? 비판적 논의가 역전된 규범성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그리하여 기존의 규범성과 함께 비판적 논의도 규범성이 되기 시작할 때, 이 모두를 다르게 사유하고 다시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가능성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미리부터 이것을 염두에 둔 논의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이성애규범성, 동성애규범성, 그리고 트랜스규범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글을 구성할 수 있을까?

커밍아웃과 클로젯과 관련한 몇 가지 메모

커밍아웃을 권력화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하게 말해서 속으로 비웃는다.

커밍아웃과 클로젯을 대척점으로 설정하고, 커밍아웃을 중요한 운동 실천으로, 클로젯을 동화주의나 무임승차로 이해하는 태도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커밍아웃을 한 이들이 더욱더 보수적이고 퀴어 정치와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언설이다. 대표적으로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의 동성결혼 이슈는 LGBT/퀴어 정치의 여러 의제를 동성결혼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물론 이것은 김조광수-김승환의 잘못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의 문제는 한국 LGBT/퀴어의 역사를 무시했고, 결혼을 둘러싸고 LGBT/퀴어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잡한 논쟁을 은폐했다는 데 있다(바이의 결혼을 둘러싼 동성애자의 공공연한 혐오,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 무시 등). 내 입장에서 공공연히 커밍아웃한 이들이 가장 보수적이고 이성애(!)규범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클로젯의 언어를 적극 해석할 필요가 있다. 클로젯의 언어는 이성애규범-커밍아웃이라는 틀을 다르게 사유할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역시 더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커밍아웃이 그렇게 대단할 때,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많다. 원가족과 친인척은 내가 특별히 의미 있다고 여기는 관계가 아니기에(다른 맥락에선 중요한 관계다) 커밍아웃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리고 그 외 많은 곳에선 그냥 떠들고 다닌다. 일부 커밍아웃을 권력화하는 이들에게 나는 커밍아웃을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하지만 이런 비꼬는 말 말고, 커밍아웃은 그 자체로 너무 복잡한 일인데 그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을 읽어야 한다.

커밍아웃을 강조하는 운동을 처음 제안하고 진행한 사람들은 사태가 이렇게 될지 몰랐겠지? ㅠㅠㅠ

암튼 공부하자. ㅠㅠㅠ

스타일의 변화, 젠더의 변화

예전엔 옷을 주로 헐렁하게 입었다. 몸에 비해 한 치수 이상 크게 입었고 이것이 나로선 편했다. 상당히 오랫 동안 이렇게 입었기에 이 사이즈가 내게 잘 맞는 사이즈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임에도 한 치수 이상 크지만 내게 맞다고 느끼는 사이즈가 없을 때면 아쉬워하곤 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제나 그렇듯 선택할 수 있는 옷은 남녀공용이거나 남성용이었다. 디자인은 비슷해도 옷의 라인은 매우 다른데, 내가 찾는 사이즈에 맞는 옷은 언제나 남성용에 가까웠다. (한국의 많은 사이트는 여성용 빅사이즈를 판매하지 않는다. 별도의 빅사이즈 몰이 있거나 빅사이즈 판매자가 있을 뿐.)

요즘은 옷 입는 스타일을 바꾸고 있다. 정확하게는 특별히 많이 바뀐 것은 아닌데 그저 내 치수에 맞는 옷을 구입해서 입고 있다. 예전이라면 내게 작을 것이라고 느꼈던, 그리하여 실제로 내게 작다고 믿으며 이 사이즈는 내게 맞지 않다고 여겼던 사이즈의 옷을 구입해서 입고 있다. 내 몸에 맞는 옷을 고르다보니 여성용으로 분류된 옷도 어느 정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구입하고 있는 옷의 라인이 다르다는 뜻이다.

최근 들어, 오랜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뭔가 스타일이 변했다고 말하곤 하는데, 어쩌면 이런 변화를 감지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것보다 재밌는 일이 있었으니. 어느 점심 시간에 비빔밥을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며 조용히 있었다. 얼마 후 서빙하는 분이 “언니, 비빔밥 나왔어요”라며 음식을 주고 가셨다. 우오호. 이것은 스타일 변화의 빠워, 라인 변화의 빠워!

딱 한 번 있은 일이 아니다. 언젠가는 다른 어떤 식당에서 비빔밥을 주문했을 때,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삼촌이네라며 밥을 더 퍼준 일도 있었다. 그 이후 주문을 받는 방식을 신경 썼더니, 여자 밥 몇 개, 남자 밥 몇 개란 식이었다. -_-;;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아가씨 밥이었다가)삼촌밥을 받은 나는 아가씨 밥만큼만 먹고 남겨서 트랜스밥을 만들었다. 😛

정말 내가 듣고 싶은 얘기는 언니나 삼촌 같은 표현이 아니다. “넌 도대체 뭐냐?”란 반응이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사람 중에, 그것도 한창 바쁜 점심시간에(내가 일하는 곳은 정부청사와 기업 사무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렇게 질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이렇게 질문하느니 그냥 대충 판단해서 응대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