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퀴어이론 입문 ver.01

지난 번 블로그에서 썼듯, 뜬금없이 삘 받아 만들어본 “불법! 퀴어이론 입문” 입니다. 퀴어이론을 처음 공부하고자 하는 분이 처음에 이런 논문 정도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라는 의도로 선별해서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총 922쪽이고 250MB 용량이라 모바일에서 함부로 받진 마시고요!
다운로드: http://goo.gl/6xAKfc

*상단에 “퀴어이론입문” 메뉴를 추가했습니다.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입
01 박미선. “젠더” <여/성이론> 1 (1999): 317-327.
02 조심선희. “섹슈얼리티” <여/성이론> 14 (2006): 227-240.
03 운조. “트랜스젠더” <여/성이론> 12 (2005): 297-313.
04 루인. “규범이라는 젠더, 젠더라는 불안 :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는 메모, 세번째” <여/성이론> 23 (2010): 48-75.
05 한주희. “퀴어 정치와 퀴어 지정학” <문화과학> 83 (2015): 62-81.
역사
06 박차민정. “1920~30년대 ‘성과학’ 담론과 ‘이성애 규범성’의 탄생” <역사와 문화> 22 (2011): 29-52.
07 박관수. “1940년대의 남자동성애 연구”  <비교민속학> 31 (2006): 389-438.
08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의 동성친밀성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학> 26.1 (2010): 97-126
09 루인. “캠프 트랜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의 역사 추적하기, 1960~1989” <문화연구> 1.1 (2012): 244-278.
10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 “한국 레즈비언 인권운동 10년사” <진보평론> 20 (2004): 39-68.
11 한채윤. “한국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역사” <진보평론> 49 (2011): 100-128.
12 친구사이. “‘친구사이’와 한국의 게이 인권운동” <진보평론> 49 (2011): 60-99.
교차성, 복잡성
13 지혜.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영미문학페미니즘> 19.2 (2011): 53-77.
14 지혜.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영미문학페미니즘> 20.2 (2012): 63-92.
15 박미선. “글로리아 안잘두아의 교차성 이론: 초기 저작에서 『경계지대/경계선』까지” <여성학연구> 24.1 (2014): 95-126.
16 루인. “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폭력: 트랜스(젠더)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네 번째” <여성학논집> 30.1 (2013): 199-233.
17 전혜은. “수잔 웬델 : 손상의 현상학자” <여/성이론> 27 (2012): 186-204.
18 루인. “수잔 스트라이커 :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역사, 그리고 동성애규범성” <여/성이론> 26 (2012): 81-103.
19 박미선. “섹슈얼리티 권력체계와 일탈의 성정치: 게일 루빈” <안과밖> 40 (2016): 211-229.
비평Critique
20 지혜. “〈프리실라〉(Priscilla), 스크린과 무대 사이의 횡단과 번역” <현대영미드라마> 28.2 (2015): 59-86.
21 우주현, 김순남. “‘사람’의 행복할 권리와 ‘좀비-동성애자’의 해피엔딩 스토리 : <인생은 아름다워> 시청자 게시판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28.1 (2012): 71-112.
22 지혜. “역사와 기억의 아카이브로서 퀴어 생애 :  『나는 나의 아내다』(I Am My Own Wife) 희곡과 공연 분석” <여성학논집>, 30.2 (2013): 205-232.
23 강오름.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 현대 한국의 성적소수자와 공간” <비교문화연구> 21.1 (2015): 5-50.
24 루인. “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 <진보평론> 57 (2013): 235-255.
25 나영정.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진보평론> 63 (2015): 228-257.
혐오
26 한채윤. “동성애와 동성애 혐오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명연구> 30 (2013): 15-38.
27 시우. “혐오 없이, 혐오 앞에서, 혐오와 더불어 : 한국 LGBT/퀴어 상황을 기록하는 노트” <문화과학> 84 (2015): 288-305.
28 루인.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 두려움과 혐오 폭력” <판결문과 사례 분석을 통해 본 성적 소수자 대상‘혐오 폭력’의 구조에 대한 연구>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2015
번역
29 존 W. 스코트[조안 W. 스콧]. “젠더: 역사 분석의 유용한 범주” 송희영 옮김. <국어문학> 31 (1996): 291-326.
30 주디스 버틀러. “단지 문화적” 임옥희 옮김. <오늘의 문예비평> 56 (2005): 279-300.
31 수잔 웬델. “건강하지 않은 장애인 : 만성질환을 장애로 대우하기” <여/성이론> 27 (2012): 158-185.
32 셰릴 체이즈, 피터 헤가티. “피터 헤가티와 셰릴 체이즈의 대화: 인터섹스, 페미니즘 그리고 심리학” <여/성이론> 27 (2012): 130-157.
33 애너매리 야고스. “페미니즘의 퀴어이론” <여/성이론> 23 (2010): 117-151.

‘그래 나 퀴어다’의 의미 탐문

원고에 쓰려고 작성했으나 대거 날리고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인데, 그 중 날려야 하는 구절 일부… 퀴어란 용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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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란 용어가 사용된 맥락을 설명하는 방식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LGBT를 적대하는 개인이나  LGBT를 향해 “야이, 퀴어[기괴한, 이상한, 괴상한]야”라고 말했을 때 “그래, 나 퀴어다”라고 반응하며 그 의미를 재전유하면서 퀴어란 용어가 LGBT 커뮤니티에서 쓰이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실제 많은 퀴어 이론이나 퀴어 연구자가 퀴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역사적 맥락 중 하나로 채용하는 설명 방식이다. 그런데 “그래, 나 퀴어다”라는 방식의 의미 재전유는 퀴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범주 용어로 사용할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신화적 근거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런 식의 설명에서 퀴어를 정체성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퀴어 정치학을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매우 ‘잘’ 사용하는 것이다.
아울러 퀴어문화축제를 반퀴어 집단이 동성애축제로 부르는 것을 두고, LGBT/퀴어나 그 지지자 집단에선 ‘이름이나 제대로 불러라’라는 반응이 많지만, 퀴어를 동성애로 치환했던 역사는 퀴어이론 역사부터 현재의 퀴어문화축제까지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1991년 퀴어이론이란 용어가 처음 학제에서 쓰이기 시작한 이후, 퀴어 혹은 퀴어이론은 대유행처럼 널리 쓰였다. 그런데 그때 퀴어는 거의 항상 동성애를 지칭했고, 학술대회 제목이 퀴어이론일 때 부제는 게이와 레즈비언만 나열하곤 했다(Goldman 1996). 이런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퀴어 이론 논문을 묶은 독본[Reader]의 경우, 해당 독본에 실린 논문의 대부분은 게이나 레즈비언 관련이며 트랜스젠더퀴어 관련 글은 한 두 편, 바이섹슈얼 관련 글은 전혀 없는 일이 허다하다. 퀴어문화축제를 동성애축제로 부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퀴어를 동성애로 인식하는 방식 자체는 반LGBT/퀴어 집단의 무지가 아니라 LGBT/퀴어 커뮤니티나 연구 집단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퀴어 비평은 퀴어만 할 수 있는가

LGBT/퀴어 논의는 이른바 LGBT/퀴어에 해당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가? 이성애자-비트랜스는 LGBT/퀴어 비평과 연구에 참여할 수 없는가? 이것은 오랜 질문이고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른바 LGBT/퀴어 바닥이란 곳(여기가 어딘지는 애매모호하지만)에 있다보면 어쩐지 퀴어 비평은 퀴어일 때에야 비로소 자격을 얻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떤 퀴어 운동이 문제라고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퀴어가 아니라면 그 의견은 다소 무시당하고, 퀴어가 이성애규범적이고 동성애규범적 발언을 할 땐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는 어떤 분위기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럼 퀴어 비평은 퀴어인 사람이 하는 비평일까? 퀴어 비평은 퀴어라는 규정된 어떤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 이득인가? 퀴어 비평과 퀴어 연구는 퀴어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논의인가?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퀴어 연구를 젠더 및 섹슈얼리티와는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몇 편의 글을 읽고 있는데(이와 관련해선 10월 즈음에 나올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나는 이 논의에 상당히 동의한다. LGBT/퀴어를 다루거나, 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만이 퀴어 이론이나 연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분석 프레임과 큐레이팅이 필요하다. 퀴어가 정체성 범주가 아닐 때 퀴어 연구 역시 어떤 형태로건 정체성 범주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어떤 이론적 토대가 필요하며, 이것이 퀴어 인식론이지 않을까? 뭐, 이런 식의, 이미 누군가가 다 한 고민을 뒤늦게 하고 있다.
이 다른 어떤 인식론을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려나 그것이 퀴어 이론에,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과 정치학에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번 글에선 이것을 쉽게 쉽게 풀어가겠지만 어떻게 하면 전혀 다른 인식론을, 내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것을 깨달으며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을까? 쪼렙인 내겐 어려운 일이겠지만, 또 계속 공부하다보면 언젠가 뭔가를 찾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