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나를 만나다

공연을 보러 마포아트센터에 갔다. 마포아트센터라니, 나로선 마포문화체육관이란 명칭이 더 익숙하다. 건물을 처음 지었을 땐 마포문화체육관으로 부르더니, 몇 년 지나 뜬금없이 마포아트센터로 변경했었다. 영어로 명칭을 바꾸면 뭔가 더 있어 보이는 걸까? 무슨 이유에서일까?
명칭의 바뀌었다는 걸 아는 건, 마포아트센터에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다. 전혀 다른 이유, 마포아트센터 근처에 살았기 때문이다. 걸어서 1분도 안 될 거리에서 자취를 했다.
마포아트센터 근처, 듬성듬성 있는 아파트 사이로 오래된 주택이 밀집해 있다. 혹자는 그곳을 두고 “무슨, 달동네인 줄 알았다. 지금도 저런 동네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네.”라고 했다. 경찰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곳. 이태원의 보광동이 무슨 일이 생길 줄 몰라서, 혹은 인종차별주의로 경찰이 수시로 감시하는 곳이라면 마포아트센터 근처는 그냥 방치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곳에서 미국바퀴가 날아다니는 것만 빼면 나는 무척 잘 살았다. 2년을 채우고 바로 이사를 했지만 미국바퀴를 피하려는 이유에서였다. 명절에 본가에 갔다 오기 위해 집을 비우면서 화장실의 작은 창문을 약간 열어두면, 귀가했을 때 화장실 변기 안에 죽은 미국바퀴가 두어 마리는 있고 바닥에도 죽은 미국바퀴가 몇 마리 있곤 했다. 미국바퀴가 싫어서 혹은 무서워서 이사를 했지만 나는 괜찮은 동네라고 여겼다. 그 동네를 떠나고도 한동안 그 동네가 그리웠다.
마포아트센터를 찾은 김에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갔다. 동네는 여전히 낡았고 한적했다. 살던 집으로 가니 내가 살던 방 위에 있던 창고(?)의 일부분이 헐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쥐들이 뛰어다니면, 방에 있던 나는 우다다하는 소리를 들었지. 동네 분위기는 어쩐지 재개발을 앞둔 느낌이었다. 붉은색 락카로 번호가 적혀 있었고 철거 예정을 알리는 문서가 문 앞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곳 불켜진 곳이 없었다.(다음날 다시 방문했을 때 불 켜진 집이 한 곳 있었다.)
얼추 10년 전이다. 그때 나는 많이 힘들었다. 잠깐이지만 본가와 완전히 연락을 끊기도 했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휴학한 다음 창고정리알바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마음이 안 좋았다. 마음이 가장 불안했던 시기였다. 여전히 열광하는 뮤즈(Muse)와 니나 나스타샤(Nina Nastasia)를 들으며 간신히 버틴 시기기도 하다. ‘루인’이란 이름을 처음 만들고 사용한 곳/시기이기도 하다. 장마철 습기로 모든 옷에 곰팡이가 연하고 넓게 피었고, 옷에서 튿어진 실밥을 없애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가 옷에 핀 곰팡이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내 몸도 불에 탈뻔 했었다. 그리고 팔에 붉은 꽃이 여러 번 피었다.
내겐 생생한 느낌인데 벌써 10년 전이라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언젠가 나는 또 다시 천장에서 쥐가 뛰어다니는 문간방에 살 수도 있고, 지금과 같은 동네에서 어떻게든 삶을 유지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떤 곳이건 나는 또 좋다고 살아가겠지. 그저 10년 전의 나를 만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위에 부서진 창고 같은 건물이 보인다. 그 아래, 문간방에서 살았다.

위에 부서진 창고 같은 건물이 보인다. 그 아래, 문간방에서 살았다.

티셔츠로 하는 퀴어 실천

책을 보던 E가 이미지를 하나 보여줬다. 아마도 퀴어를 혐오하는 듯한, LGBT를 혐오하는 듯한 가족이 피켓을 들고 있는 장면이었다. 피켓엔 “It’s not Diversity. It’s Perversity.”(다양성이 아니다. [성]도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E와 나는 둘다 이 문구를 보며 좋아했다. 바로 이거야! 사진 속 비장한 표정의 이 가족은 it(그것)으로 표현한 그 무언가를 혐오하는 듯했지만, 이 문구는 퀴어정치학의 지향점(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을 매우 잘 표현한다고 느꼈다. 정말 바로 이것이다. 퀴어정치학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착성을 이야기한다. 비규범적 삶을 이야기하고, 규범성의 문제적 작동을 이야기한다.
때마침 긴팔용 티셔츠를 제작하려고 했던 나는 E와 신나게 떠들며, 이 문구를 사용하기로 했다. “Queer Is Not Diversity. Queer Is Perversity.”라고. 나는 이것 자체로 무척 좋다고 판단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E는 이 구절을 읽은 어떤 ‘퀴어’는 이 구절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I’m Queer.”란 구절을 덧붙이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구절을 이용해서 티셔츠를 만들었다.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내년 봄까지 입을 옷이다.

Queer Is Not Diversity. Queer Is Perversity. [퀴어는 다양성이 아니다. 퀴어는 도착이다.]라고 적었다. e가 번데기처럼 보이는 건 그냥 넘어가기로… 디자인을 할 땐 글꼴이 괜찮았는데 출력하니 이런 문제가 생기네… 같은 문구에 글꼴을 바꾸고 색깔 등도 바꿔서 한 번 더 제작할 수도?

Queer Is Not Diversity. Queer Is Perversity. I’m Queer. [퀴어는 다양성이 아니다. 퀴어는 도착이다. 나는 퀴어다.]라고 적었다. E의 의견을 반영한 것. 디자인할 때 글꼴이 얇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가장 잘 나왔다. 가독성도 좋아서 이 글꼴을 애용할 듯.

마지막 구절을 I’m Genderqueer.[나는 젠더퀴어다.]라고 쓴 것도 있다. 나는 퀴어며, 트랜스젠더 역시 퀴어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이 퀴어를 성적지향만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젠더퀴어라고 적었다. 종종 나를 젠더퀴어로 설명하기도 하고.

I am Transgender. Look at YOU through Me! [나는 트랜스젠더다. 날 통해 널 봐라!]라고 적었다. 글꼴이 걱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느낌표가 애매하게 나왔다. 그래도 괜찮아.
그나저나 얇은 긴팔 티셔츠겠거니 했는데 두껍고 따뜻한 티셔츠다. 그리고 꽤나 예뻐서 스키니진과 입으니 잘 어울린다. 우후후. 매우 만족.
+”나도 이런 거 원해!”라는 분은 안 계시겠지? 흐흐흐.
++한국어로 디자인한 티셔츠도 있는데 제작은 않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글꼴이 안 예쁘다. 영어 철자는 다양한 글꼴이 예쁘게 적용되는데, 한글은 글꼴을 바꿔도 크기만 조금씩 변할 뿐이다. 그래서 주문제작을 포기했다. 외국사이트를 이용하니 이런 문제가 있네. 퓨우…
+++근데 이런 거 만들어 입고 다녀봐야, 안전하다. 정말 안전하다. 한국어로 제작하면 좀 알아보려나… 영어와 한국어의 문제일까, ‘남의 티셔츠에 적혀 있는 문구 따위’일까. 결국 티셔츠로 하는 퀴어 실천 따위, 그냥 깨작거리는 행동일 뿐이다. 그저 나를 위로하는 행동일 뿐이다.

수제비, 러빙헛 레인보우점(신촌점)

중학교 시절, 어느 비오는 날 오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어쩐 일인지 수제비가 있어서 수제비를 맛나게 먹었었다. 이런 경험과 기억은 참 신기하지. 그 이후로 비가 오거나 하면 수제비가 생각이 났다. 남들은 비오는 날엔 부침개라고 하는데 부침개가 끌린 적은 별로 없었다.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런가보다 했을 뿐, 비온다고 부침개가 끌리진 않았다. 하지만 수제비를 만들어 먹긴 쉽지 않은 일. 채수를 내는 게 간단하지 않아서, 그 전에 내가 요리 자체를 잘 못해서 수제비와 같은 음식을 만드는 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대신 비가 내리는 날 러빙헛에 갈 때면, 국물이 있는 면요리를 먹었다. 짬뽕이라던가, 이제는 없어진 뚝배기우동이라던가.

어제 저녁 미르젠카 체코바(Mirenka Cechova)의 공연을 보러 가기 전, E를 만나 러빙헛에 갔다. 간단하게 주전부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오오 수제비가 등장했다. 들깨칼국수, 들깨수제비, 맑은(?)수제비, 이렇게 세 가지 면요리가 새로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맑은수제비를 주문했다. 우후후. 어쩐지 이제는 없어져서 무척 아쉬운 뚝배기우동의 국물과 많이 비슷하단 느낌도 들지만, 나로선 만족스러웠다. 들깨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칼국수를 좋아하니 들깨칼국수와 들깨수제비도 먹어봐야지. 후후후.

근데… 러빙헛 레인보우점(신촌점)은 가격을 올려도 너무 올린다. 내 기억에 뚝배기불구이가 4,500원인가 5,000원인가 할 때부터 러빙헛에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7,000원이다. 10월 들어 가격인상을 한 번 했는데, 이번엔 6,000원에서 7,000원으로 한 번에 천 원을 인상! 이 패기! 아우, 정말이지.. 호ㅑ애푸애ㅔ초린ㅇㄹㅀㄹㄴㅛㅗㅎ뤄오ㅓㅇ호이허아. 놀랍게도 신촌에 채식전문점이 러빙헛 뿐이고, 채식으로 먹을 수 있는 곳이 매우 적어서(비빔밥을 제외하면 한두 곳인가.. 그곳에도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한두 개 정도) 신촌에선 러빙헛에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독점으로 인해 그리 맛있지도 않음에도 장사가 잘 되고 가격을 팍팍 올릴 수 있는 거겠지. 러빙헛도 맛난 곳은 정말 맛있는데, 내 기준으론 무척 멀지만 남성역 근처 러빙헛 티엔당점은 정말 맛있다. 티엔당점에 비하면 신촌점(레인보우점)은 러빙헛계의 김밥천국이랄까. -_-;; 신촌에 다른 괜찮은 대체제가 생기면 좋겠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