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의 정치학

화장실 이슈는 역시 할 말이 많은 주제다. 장애 범주가 의미있게 작동하는 찰나엔 장애 범주가, 트랜스젠더 범주가 의미잇게 작동하는 찰나엔 트랜스젠더 범주가, 젠더 표현이 의미있게 작동하는 찰나엔 젠더 표현이 중요한 변수로서 문제를 일으킨다. 어제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과 화장실 이슈로 여럿이 이야기를 나누는 귀한 자리가 있었다. 장애인에게 공중화장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장애인화장실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장실 출입문이 고장난 경우가 종종 있다거나,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안 된다거나, 시설이 고장난 경우가 왕왕 있다고 했다. 또한 거울이 있긴 한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거나, 비누가 있긴 한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식이다. 화장실이란 공간은 있지만 다양한 장애 범주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졌거나 비장애 중심으로 만들어졌거나. 트랜스젠더에겐 어느 화장실을 사용하느냐가 문제다. 트랜스젠더 개인이 어떤 화장실을 편하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도 있고 어떻게 패싱하고 어떤 젠더로 통하느냐에 따른 문제도 있다. mtf 트랜스여성인데 남성으로 더 잘 통하거나 ‘모호’한 모습이거나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과 사용해야 하는 화장실은? 여성으로 잘 통하지만, 남장하고 다닐 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다수여서 여자화장실에서 마주치기가 묘하게 불편할 땐? 더 많은 이슈가 있고, 참가한 분들이 정말 다양한 경험을 다양한 맥락에서 얘기를 했다. 화장실 만큼 중요한 공간도 없는데 화장실만큼 이야기가 안 되는 공간도 없고, 불편하고 불안한 공간도 없다. 공감의 행보에 응원을!

음식 관련 기억은 현재의 음식 욕망을 구성한다?

이제는 별로 없지만 한땐, 고기 먹는 모습을 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그럴 때면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든다고 답하곤 했다. 이건 채식인이 하는 관용어구는 아니었다. 단체로 고기를 먹는 자리에 가도 다른 사람들이 먹는 고기를 나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 몇 년 전부터 러빙헛에서 밥을 먹곤 하면서, 콩단백을 반찬으로 먹기 시작한 이후 ‘저게 육고기인가, 콩단백인가’가 가끔 헷갈릴 때는 있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내가 의지가 강하다거나 강성 채식인이어서는 아닌데도 그랬다.

지난 여름, E와 강릉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한 번은 E가 생선구이정식을 먹었다. 아마도 채식을 시작한 이후, 혹은 내가 어느 정도 기억을 검토할 수 있는 2000년 이후 처음으로 생선이 참 맛나겠다고, 먹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먹지는 않았지만 E에게 말하길 ‘내가 채식의 수위를 바꾼다면 생선 때문일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도 생선찌개나 생선찜 냄새가 나면 문득 어릴 때 맛나게 먹은 그 음식(생태찌개, 고등어조림, 갈치를 비롯한 생선구이 등)을 떠오르곤 했다. 그때 그 음식 참 맛있었지. 후후.

그러면서 깨달았는데 내 기억에 육고기를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일년에 몇 번, 특별한 날에나 먹는 것이 육고기였다. 육고기를 반찬으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본가의 형편이 바뀌었을 때, 육고기를 싸게 구매할 수 있는 경로가 생기기도 했을 때 나는 채식을 시작했고 육고기는 내 기억이 거의 없는 음식이다. 그나마 육고기를 먹을 기회가 있을 때도 잘 안 먹었다. 그냥 몇 점 먹고나면 더는 안 먹었다.

대신 생선은 참 자주 먹었다. 부산이라서 생선을 싸게 구매할 수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버지가 낚시광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생선을 자주 먹었고 그래서 생선을 먹은 기억, 그 중 유난히 맛나게 먹은 기억은 내 몸 깊이 남아 있다. 그때의 맛 역시 아련하게 혀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때 그 음식과 비슷한 냄새가 뇌를 자극하면 나도 모르게 예전에 맛나게 먹은 생선요리를 떠올리곤 한다. 이제 와서 생선이 먹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때 그 생선 요리는 참 맛있었지’ 정도의 기억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니 질문이 달라야 했다. 육고기를 보며 먹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내가 살아온 지역 배경, 육류 소비가 어쩐지 유난히 늘어난 요즘의 분위기, 그리고 내가 어릴 땐 닭고기나 치킨이 흔한 음식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음식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질문이다. 육고기를 보면 먹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엔 전혀라고 답하는 것은 어쩐지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생선 요리를 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드냐고 묻는다면 그땐 답변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 먹고 싶다기보다는 맛나게 먹은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는 답을 하겠지만.

공부하라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유명한 대목에서 1942년 프랑스의 어느 젊은이가 처한 딜레마를 그려 보인다. 젊은이는 의지할 곳 없고 노쇠한 어머니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와 레지스탕스에 들어가 독일군과 싸워야 한다는 의무 사이에서 고뇌한다. 물론 사르트르의 논점은 이 딜레마에 선험적인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한한 자유만을 근거로 삼아 결정을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떠맡아야 한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난 외설적인 제 3의 길은, 어머니에게는 레지스탕스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레지스탕스 동료들에게는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거라고 말한 뒤, 실제로는 외딴 곳에 틀어박혀 공부하라고 충고해 주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김희진, 정일권, 옮김. 31-32쪽.
지젝에게 호감도가 +1 상승하도록 한 문구다. 무엇이 공부인지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뭔가 즉시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일단 머뭇거리면서 고민을 하는 것, 좀 천천히 발언하는 것, 더디게 개입하는 것, 뭐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단 행동부터 하기보다는 공부를 하고 천천히 고민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구절이 좋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