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중립을 다시 해석하기 위한 메모

손석희가 MBC 라디오 시선집중을 진행하던 시절, 손석희는 영향력이 가장 큰 언론인이었으며, 언론인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이 인지도는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인 형태였다. 단적으로 많은 시위나 투쟁 현장 혹은 사고 현장에서 다른 언론은 불신으로 쫓겨날 대에도, 시선집중에서 왔다고 하면 인터뷰가 가능했었다. 이것은 언론인 신뢰성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손석희는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로 1위였다. 그런 손석희가 들었던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기계적 중립이었다. 이것은 손석희가 고민하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했고, 공중파 방송 혹은 공영방송의 역할 및 가치와 관련한 고민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미디어를 연구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영방송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말을 잇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은 중요한 의제다.
페미니즘 정치, 퀴어 정치를 배우는 이들은 알겠지만 이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정파성이다. 지식과 논의는 역사상 단 한 번도 가치 중립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판 이론을 하는 이들은 가치 지향을 중시했고, 투명하고 보편적 지식보다 맥락적 지식, 상황적 지식을 탐색하며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를 중시했다. 지난 칼럼에서 경험의 정치성을 다룬 이유도, 바로 가치 지향, 논의의 맥락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찬반 양론에 근거한 기계적 중립은 무책임하거나 논란을 피하고자 하는 태도로 읽혔고 때때로 권력에 공모하는 태도로 읽혔다. 많은 의제는 찬반 양론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인권 의제는 찬반 양론보다 가치 지향이 중요하다. 퀴어문화축제를 다루며 찬반 양론으로 배치한다면 혐오 발화를 공중파 방송에서 송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혐오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많은 공중파 방송은 퀴어를 비롯한 인권 의제를 찬반 양론으로 배치하곤 했다. (요즘은 이런 경향이 덜해서 퀴어 의제에 가치 지향을 담으며 퀴어 혐오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런데 기계적 중립은 논란을 피하거나 권력에 공모하는 방식인가라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는 시선집중의 역사가 말해주기도 하는데, 시선집중의 역사 그 자체였던 고정 패널 김종배는 10년도 더 전에 쓴 기사를 빌미로 좌파라며 방송에 쫓아냈다. 시선집중의 상징 그 자체였던 손석희 역시 계속해서 공격받았고 결국 라디오 진행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것은 기계적 중립이 한편으로는 혐오 발화를 정당한 의견으로 승인하는 문제를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권력의 행태를 비판하는 의견 역시 정당한 의견으로 채택한다는 뜻이었다. 기계적 중립은 어떤 상황에서는 듣기 괴로운 일이었지만,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너무도 소중한 태도였고 기계적 중립, 반론권 제공은 자리 즉 생계와 생활을 걸어야 하는 저항 행위이기도 했다.
지금 기계적 중립과 관련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요즘 방송과 관련한 다양한 뉴스 때문이다. 정부 혹은 대통령실은 공중파 방송을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수신료 분리 징수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고, 방송의 공공성을 파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는 TBS의 진행자가 싫어 그 진행자가 관둔 뒤에도 방송국 자체를 폐업에 준하는 상태로 내몰고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현재 상태에서 변화가 없다면 내년에는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당은 방송 패널의 정당 편향을 평가하며 방송을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2010년 전후, 즉 이명박 정권 당시의 행태와 비슷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게 정리하면, 유튜브가 있다. 유튜브에는 온갖 정보가 넘치고 온갖 영상이 넘치고 있다. 그 중에는 정파성이기보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방식의 영상이 넘쳐난다. 이것은 유튜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은 모두 등가의 가치로 수용된다는 데 있다. 개인이 가짜뉴스를 전파하는 영상, 개인의 귀여운 고양이 영상, 공중파 방송의 클립, 공영방송의 탐사보도는 모두 동일한 가치와 층위로 유통된다. 이명박 때도 대안언론은 있었지만 그 언론은 블로그의 형태를 취하거나 팟캐스트 형태를 취했다. 이 형식의 차이는 공영방송과 대안언론의 성격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모든 영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 상황은 공영방송의 가치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며, 한국 사회가 언론에 갖는 불신(나 역시 이 불신에 일정 부분 공모하고 있다)이 촉매한 변화이기도 하다.
나의 고민, 기계적 중립과 관련한 고민은 현재의 변화가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측면도 있지만, 특정 정당을 향한 강한 지지를 표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정 정당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적이라는 식의 태도가 기본값으로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는 비판을 어렵게 만들고, 비판적 지지를 변절이나 적대로 만든다. 정확하게 이런 상황적 분위기에서 나는 기계적 중립이 그럼에도 유의미한 태도가 아니었나라는 “라때” 같은 고민을 한다. 이것은 이 칼럼의 시작과도 같은 SNS 시대에 라디오 듣기와도 같은 감각이자 고민이기도 하다. 나와 완전히 동일한 의견만 듣는 일은 나의 고민을 깊게 만들기 보다 얕게 만들고 나의 정치적 입장을 가치 지향으로 만들기 보다 편가르기로 만든다. 예를 들어 퀴어 정치는 완전히 동일한 성격을 갖는가, 프라이드의 의미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비판 이론은 권력을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나의 편이라고 불리는 집단, 내가 가장 신뢰하는 집단 내에서도 논쟁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논쟁이다. 완전한 동일성, 하나의 옮음만을 따르는 태도는 논의도 논쟁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며, 반대는 아니어도 다른 의견이 나올 때에만 비로소 갱신할 수 있는 정치학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여기에서 기계적 중립의 의미를 고민한다.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몇 가지 고민은 있다. 나는 SNS에 할 이야기의 팔 할은 친구와 수다로 끝내야 한다고 믿는데, 나 역시 일상의 대화에서 괜찮은 이야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중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SNS를 했다면 인생 퇴갤을 수십 번은 했을 거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SNS가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라, 나 역시 편파적이고 편협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자주 뻘소리를 하고, 잘못된 이야기를 하여, 한두 시간 뒤에 등골이 서늘한 느낌으로 후회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의 이런 감각은 종종 철지난 꼰대 같음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더 정확하게는 공중파나 기계적 중립과 같은 감각은 모두 그 시절의 산물이며, 특정 시절의 산물에 근거한 논의나 고민은 새로운 변화나 감각의 변화를 잘못된 것, 틀린 것으로 이해할 위험을 내포한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여러 가치 중 어떤 것에 근거하여 내가 잘못되었음에도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은 글을 쓸 때마다 문장을 이어나가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글을 계속 써야겠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글로 써봐야 내가 어떤 잘못된 생각을 하는지 거를 수가 있으니).
아무려나, 그럼에도, 혹은, 어쨌거나… 무수히 많은 접속사를 남발하면서도 결국 나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용어를 요즘들어 더욱 자주 떠올린다. 이 말이 지금 다시 어떤 재해석 과정을 통해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며. 물론 다시 널리 쓰인다면 나는 가장 빨리 이 용어를 비판하겠지만 그럼에도… (50H50 칼럼)
+가장 혼란스러운데 그럼에도 메모니까…

[부정기 퀴어 뉴스브리핑]#009

Glamorous의 주인공 미스 베니(Miss Benny)가 트랜스젠더퀴어로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습니다. 베니는 자신의 젠더 범주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베니를 염두에 둔 Glamorous라는 프로그램이 개발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이 프로그램은 젠더에 수응하지 않는 퀴어 라틴계 성인 코미디입니다. 직접 읽어보시면 좋을 글입니다.
미국 캔자스주의 법무장관이 트랜스젠더퀴어의 출생 증명서의 변경을 금지하는 요청을 햇습니다. 캔자스 법무장관 크리스 코바흐Kris Kobach는 연방판사에게 7월부터 시해오딜 반-트랜스 법을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출생 증명서 변경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캔자스주의 퀴어 활동가, 지지자 그리고 인권 활동가는 이런 움직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미국 사라 맥브라이드(Sarah McBride) 델라웨어주 상원의뭔은 주 전체 의원으로 선출되는 의회에 출마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맥브라이드가 하원에서 근무하는 최초의 공개 트랜스젠더퀴어가 될 수 있는 역사적인 시도입니다. 맥브라이드는 캐시 제닝스(Kathy Jennings) 주 법무장관, 델라웨어주 선출직 공무원 및 지도자를 포함한 주요 인물의 지지를 확보하였습니다. 맥브라이드는 아바마 행정부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2016년에는 주요 정당의 전당대회에서 연설한 최초의 트랜스젠더퀴어이며, 인권 캠페인의 전국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맥브라이드는 2020년 총선거에서 70& 이상의 득표율로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맥브라이드의 이번 발표는 공화당이 주도하는 반-트랜스 법안이 계속해서 제출되는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국 테네시주의 판사는 트랜스젠더퀴어가 출생 증명성의 변경을 요청하는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트랜스젠더퀴어 집단은 법이 트랜스젠더퀴어를 위헌으로 차별하도록 한다며, 이것을 문제삼고자 했습니다. 트랜스젠더퀴어 원고들은 출생증명서의 섹스가 ‘개인의 젠더 정체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판사는 “출생 당시의 외부 생식기”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와이오밍대학의 Kappa Kappa Gamma 지부는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정에 대해 전현직 여학생 클럽의 회원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이 소송을 기각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지난해 3월 트랜스여성 아르테미스 랭포드(Artemis Langford)를 여학생 클럽에 포함시킨 것에 대해, 익명의 회원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소장에서 트랜스젠더퀴어는 관음증적으로 여성을 엿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 클럽은 그 소송이 매우 경솔한 것이며, 트랜스여성의 가입을 허용하는 것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 주지사 Kathy Hochul은 트랜스젠더퀴어 청소년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안은 부모가 사춘기 차단제 및 호르몬 투여를 포함하여, 트랜스젠더퀴어에게 필요한 의료적 조치를 제공하는 경우, 아동 청소년의 의료적 조치를 중지시킬 수 있는 다른 주의 법 집행을 뉴욕에서는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아동 청소년의 사춘기 차단제 등의 허용을 아동 학대로 간주하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이제는 새로울 것 없는 정보 같지만, Dr. Morten Frisch는 덴마크에서 40년(1980-2021)에 걸친 건강 데이터를 활용해서, 트랜스젠더퀴어의 자살 위험이 훨씬 더 높다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이전에도 이와 같은 연구는 나왔지만, 이 연구는 국가의 자살 데이터를 분석한 세계 최초의 연구라고 합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모든 집단의 자살률은 시간이 지날 수록 감소했지만, 트랜스젠더퀴어의 자살 시도율은 7.7배, 자살율은 3.5배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덴마크의 트랜스젠더퀴어는 다른 범주의 사람보다 어린 나이에 자살이나 여타 다른 이유로 사망했습니다. 미국의학협회저널(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서 발표된 이 연구 결과는, 공화당의 반-트랜스 법안이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Psychiarty Advisor에서 낸 기사로 기사 제목은 “의료 망명자Medical Exiles”입니다. 트랜스젠더퀴어의 의료 접근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법 제정에 따라 이사하거나 거주지를 바꿔야 하는 이들에 대한 기사입니다.  반-트랜스 법안이 확산되면서, 2022년 말 KFF와 워싱턴포스트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www.kff.org/report) 미국 성인 트랜스젠더퀴어의 1/4 이상이 다른 동네나 주로 이사했다고 합니다. 미국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데니스Dennis는 플로리다의 반-트랜스 법으로 인해 올 들어 더이상 호르몬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가족과 함께 메릴랜드로 이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라면 데니스는 고펀드미를 통해 5,600달러 이상을 모금했다는 점입니다. 텍사스에 거주하는 틸리슨 가족은 딸의 안전과 삶을 위해 워싱턴주로 이주한다고 합니다.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웬돌린 슈워츠는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계속 머물며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주의 반-트랜스 법으로 인해, 결국 주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삶의 거점, 학교 생활, 직장 등 모든 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 사회정의부(Social Justice Department)는 주states의 모든 트랜스젠더퀴어 고용에 따른 비용을 보장해준다고 밝혔습니다. 트랜스젠더퀴어 커뮤니티의 지식 부분 고양을 보장하기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로, 사회적 차별과 배제로 인한 괴롭힘이 만연한 상황에서 안정적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 제공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경험의 위험성에 대하여: 수능 논란이 만드는 규범성

한국의 정치적 감각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상당히 무서운 말 중 하나다. 비록 이 말에 조롱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할 때가 더 많다고 해도, 그 말에는 위험과 두려움을 내재한다. 그 이유는 실제 능력이 없거나 잘못된 판단을 할 때에도, 대통령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통해 필요한 모든 토론과 논의, 복잡한 쟁점에 대한 더 많은 연구의 필요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경험 본질론은 한국의 오래된 속담 ‘백문이 불여일견’처럼 시각에 기반해서 경험하면 곧 알 수 있다는 심각한 오만과 오해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경험은 곧 알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해석과 재해석이라는 정치적 투쟁의 장이 된다.
이것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역사학자들이 오랜 세월 논쟁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경험하면 곧 알 수 있다는 말은 중요한 쟁점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첫째, 가부장제 사회에서 특권적 권력을 누리는 이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 피해와 같은 일은 인지 불가능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그렇기에 가부장제의 폭력적 작동 양상은 경험한 적 없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사건으로 취급되었고, 이는 억압과 피해를 계속해서 투쟁하며 입증해야 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경험은 자연스러운 것, 자명하게 모두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어떤 위치,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가 경험 인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다시 확인된다.
둘째, 경험한 피해나 억압이 그 자체로 자명하게 알 수 있는 사건인가를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여성학 강의나 강좌를 처음 듣고 나면, 그동안 자신이 겪은 그 많은 사건이 성폭력이나 성차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한다. 퀴어와 관련한 인터뷰 문헌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에서는 억압과 피해가 당연한 것으로 인지했다가, 유학이나 어학연수 등을 이유로 외국 생활을 하면서 억압과 피해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다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서사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억압과 피해의 경험 역시 자명하기보다 해석과 지식의 영역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페미니즘 정치가 경험을 자명한 것으로, 경험했으면 알 수 있는 것으로 논했던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경우 페미니즘은 경험을 자명한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기존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장을 마련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작업을 한다. 이것은 경험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경험의 의미, 경험을 인지하는 방식을 본질화하지 않는 것이며 경험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언어를 모색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셋째, 경험이 본질화되면 유사한 범주의 속한 사람은 같은 사건에 대해 동일한 해석을 한다고 가정된다. 이것은 성희롱 피해와 같은 폭력의 피해에 모든 여성은 동일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며, 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은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느낄 것이며, 모든 퀴어는 동일한 정체성이면 그 경험과 생애사도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미 익숙하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비규범적 질서를 규제하고 통제, 관리하기 위한 지배 규범적 상상력이다. 폭력이나 차별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 차별과 폭력을 덜 심각한 것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폭력이나 차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 논의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경험이 본질화되면 이성애규범성을 뒤트는 퀴어의 등장은 불가능하고 가부장제 질서를 문제 삼는 페미니스트의 등장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험 본질론에서 이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우발적인 오류다. 교육 제도에서, 가족 제도에서 누구도 퀴어한 실천을 가르치지 않는데 어떻게 퀴어로 고민하고, 페미니스트로 고민할 수 있겠는가? 반-퀴어 혐오 세력이 퀴어를 오류로 주장하는 이유도 인간의 경험을 동질화, 본질화하는 경향과 연관된다. 경험은 본질적이기보다 엄청나게 많은 편차와 우발성이 중첩되고 여기서 해석과 새로운 인식론이 다시 겹쳐지면서 변주와 변형이 발생하며 그렇기에 언제나 해석과 재해석의 장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구 방법 중 인터뷰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이 고민에 위치한다. 경험에 대한 해석은 동일하지 않고 그렇기에 세상을 이해할 새로운 언어는 갱신되어야 하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인터뷰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에 대한 이런 (매우 축약된) 논의는 경험을 말할 때 언제나 가장 첨예한 논쟁의 장에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더 정확하게, 당사자주의를 알게 모르게 지지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언제나 경험을 본질화하는 위험을 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가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가정은 내부 구성원을 동질화하고, 동질화나는 내적 다양성을 논의할 수 없게 만들고, 이것은 규범성을 생산하는 위험한 촉매가 된다. 그렇기에 한 공간에, 친밀한 공동체에 있는 이들이 경험을 공유할 것이라는 믿음은, 때때로 안전함과 편안함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가장 폭력적인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누군가가 자신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질문을 하는 순간이 매우 고맙고, 또 반성한다. 그 질문은 나 역시 익숙한 그리하여 동질적인 폭력적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대화 요청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관련한 여기까지의 논의는 사실 여기저기서 여러 번 쓴 적이 있는 기분이고, 변주되지만 대체로 유사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경험과 관련한 논의를 반복하는 이유는, 경험을 본질화하며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너무도 많은 곳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수능과 관련한 최근 논의와 연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고민이 많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이와 관련해서 발언을 하는데, 나까지 여기에 말을 보태야 할 것인가. 그럼에도 이 주제에 말을 보태기로 한 이유는 경험과 관련한 질문 없음이 모든 논의를 망치고, 단순히 논의를 망치는 문제를 넘어 그 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이들을 가장 빨리 배제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에서 모든 성인은 아동 청소년 시기를 겪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겪었기에 그 시기와 관련해서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발언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 교육 문제가 겹치고, 수능이나 대학 입시와 관련한 주제가 겹치는 그 논쟁은 더욱 뜨겁고 복잡하고 지저분해진다. 많은 성인이 대학 입시 공부를 했고, 방송에 출연하는 상당수의 패널이 대학에 입학했거나, 졸업한 이들이기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더욱더 가볍게 말을 얻는다. 하지만 그래서 또 안다. 요즘의 십대는 어떤 모습인지 성인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또 안다. 그래도 십대 시절을 경험했으니 그 시절과 관련해서 말을 보탤 수 있다. 요즘 십대가 어떤 지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십대 시절을 겪었으니 그 시기와 관련해서 말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 마찬가지로 요즘 입시 제도가 어떤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교육 과정을 거쳐서 입시를 경험했기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말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 이 모든 믿음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겪었으니 알 수 있다는 오만함 혹은 위험성을 내재한다.
 
오만함 혹은 위험성은 단순히 경험했으니 알고, 경험했으니 그 주제에 대해 떠들 수 있다는 믿음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아동 청소년의 삶을 입시와 연결짓고, 이 연결은 입시를 준비하고 정규 학교 과정에 참여하는 청소년을 보편으로 삼는다. 더 정확하게, 이 논의에서 학교밖 청소년이나 대학 진학을 고려하지 않는 청소년은 아예 청소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으며, 이와 관련한 논의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 중심의 학교 제도가 청소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킬러문항으로 촉발된 모든 논쟁은 단순히 수능의 문제가 어려우냐, 쉬우냐의 문제, 모든 학생을 등급제로 나눠서 위계를 만드는 문제 뿐만 아니라 누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느냐의 문제, 모든 청소년은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존재인가라는 문제를 반드시 같이 질문토록 한다. 이것이 누락되는 현재의 많은 논의나 발언은 한편으로 의제에 집중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락과 배제를 아예 사유하지 않는 문제의식이 된다.
이런 질문을 경험 논의와 연결지으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단순히 반지성주의나 오만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경험 자체가 배제와 추방, 누락의 실천 속에서 구축되는 상상력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경험은 내 삶의 일부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논쟁되지 않으면, 배제의 본질주의, 추방의 규범 생성을 전제한다. 이것의 가장 익숙한 판본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며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만들고자 했던 일군의 주장이다. 그러니 경험은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경험을 말할 때 그 경험이 전제하는 규범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부하지만, 익숙하지만,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쟁점이라고 믿는다. (50H5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