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가 MBC 라디오 시선집중을 진행하던 시절, 손석희는 영향력이 가장 큰 언론인이었으며, 언론인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이 인지도는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인 형태였다. 단적으로 많은 시위나 투쟁 현장 혹은 사고 현장에서 다른 언론은 불신으로 쫓겨날 대에도, 시선집중에서 왔다고 하면 인터뷰가 가능했었다. 이것은 언론인 신뢰성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손석희는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로 1위였다. 그런 손석희가 들었던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기계적 중립이었다. 이것은 손석희가 고민하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했고, 공중파 방송 혹은 공영방송의 역할 및 가치와 관련한 고민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미디어를 연구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영방송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말을 잇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은 중요한 의제다.
페미니즘 정치, 퀴어 정치를 배우는 이들은 알겠지만 이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정파성이다. 지식과 논의는 역사상 단 한 번도 가치 중립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판 이론을 하는 이들은 가치 지향을 중시했고, 투명하고 보편적 지식보다 맥락적 지식, 상황적 지식을 탐색하며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를 중시했다. 지난 칼럼에서 경험의 정치성을 다룬 이유도, 바로 가치 지향, 논의의 맥락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찬반 양론에 근거한 기계적 중립은 무책임하거나 논란을 피하고자 하는 태도로 읽혔고 때때로 권력에 공모하는 태도로 읽혔다. 많은 의제는 찬반 양론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인권 의제는 찬반 양론보다 가치 지향이 중요하다. 퀴어문화축제를 다루며 찬반 양론으로 배치한다면 혐오 발화를 공중파 방송에서 송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혐오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많은 공중파 방송은 퀴어를 비롯한 인권 의제를 찬반 양론으로 배치하곤 했다. (요즘은 이런 경향이 덜해서 퀴어 의제에 가치 지향을 담으며 퀴어 혐오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런데 기계적 중립은 논란을 피하거나 권력에 공모하는 방식인가라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는 시선집중의 역사가 말해주기도 하는데, 시선집중의 역사 그 자체였던 고정 패널 김종배는 10년도 더 전에 쓴 기사를 빌미로 좌파라며 방송에 쫓아냈다. 시선집중의 상징 그 자체였던 손석희 역시 계속해서 공격받았고 결국 라디오 진행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것은 기계적 중립이 한편으로는 혐오 발화를 정당한 의견으로 승인하는 문제를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권력의 행태를 비판하는 의견 역시 정당한 의견으로 채택한다는 뜻이었다. 기계적 중립은 어떤 상황에서는 듣기 괴로운 일이었지만,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너무도 소중한 태도였고 기계적 중립, 반론권 제공은 자리 즉 생계와 생활을 걸어야 하는 저항 행위이기도 했다.
지금 기계적 중립과 관련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요즘 방송과 관련한 다양한 뉴스 때문이다. 정부 혹은 대통령실은 공중파 방송을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수신료 분리 징수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고, 방송의 공공성을 파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는 TBS의 진행자가 싫어 그 진행자가 관둔 뒤에도 방송국 자체를 폐업에 준하는 상태로 내몰고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현재 상태에서 변화가 없다면 내년에는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당은 방송 패널의 정당 편향을 평가하며 방송을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2010년 전후, 즉 이명박 정권 당시의 행태와 비슷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게 정리하면, 유튜브가 있다. 유튜브에는 온갖 정보가 넘치고 온갖 영상이 넘치고 있다. 그 중에는 정파성이기보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방식의 영상이 넘쳐난다. 이것은 유튜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은 모두 등가의 가치로 수용된다는 데 있다. 개인이 가짜뉴스를 전파하는 영상, 개인의 귀여운 고양이 영상, 공중파 방송의 클립, 공영방송의 탐사보도는 모두 동일한 가치와 층위로 유통된다. 이명박 때도 대안언론은 있었지만 그 언론은 블로그의 형태를 취하거나 팟캐스트 형태를 취했다. 이 형식의 차이는 공영방송과 대안언론의 성격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모든 영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 상황은 공영방송의 가치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며, 한국 사회가 언론에 갖는 불신(나 역시 이 불신에 일정 부분 공모하고 있다)이 촉매한 변화이기도 하다.
나의 고민, 기계적 중립과 관련한 고민은 현재의 변화가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측면도 있지만, 특정 정당을 향한 강한 지지를 표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정 정당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적이라는 식의 태도가 기본값으로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는 비판을 어렵게 만들고, 비판적 지지를 변절이나 적대로 만든다. 정확하게 이런 상황적 분위기에서 나는 기계적 중립이 그럼에도 유의미한 태도가 아니었나라는 “라때” 같은 고민을 한다. 이것은 이 칼럼의 시작과도 같은 SNS 시대에 라디오 듣기와도 같은 감각이자 고민이기도 하다. 나와 완전히 동일한 의견만 듣는 일은 나의 고민을 깊게 만들기 보다 얕게 만들고 나의 정치적 입장을 가치 지향으로 만들기 보다 편가르기로 만든다. 예를 들어 퀴어 정치는 완전히 동일한 성격을 갖는가, 프라이드의 의미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비판 이론은 권력을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나의 편이라고 불리는 집단, 내가 가장 신뢰하는 집단 내에서도 논쟁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논쟁이다. 완전한 동일성, 하나의 옮음만을 따르는 태도는 논의도 논쟁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며, 반대는 아니어도 다른 의견이 나올 때에만 비로소 갱신할 수 있는 정치학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여기에서 기계적 중립의 의미를 고민한다.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몇 가지 고민은 있다. 나는 SNS에 할 이야기의 팔 할은 친구와 수다로 끝내야 한다고 믿는데, 나 역시 일상의 대화에서 괜찮은 이야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중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SNS를 했다면 인생 퇴갤을 수십 번은 했을 거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SNS가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라, 나 역시 편파적이고 편협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자주 뻘소리를 하고, 잘못된 이야기를 하여, 한두 시간 뒤에 등골이 서늘한 느낌으로 후회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의 이런 감각은 종종 철지난 꼰대 같음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더 정확하게는 공중파나 기계적 중립과 같은 감각은 모두 그 시절의 산물이며, 특정 시절의 산물에 근거한 논의나 고민은 새로운 변화나 감각의 변화를 잘못된 것, 틀린 것으로 이해할 위험을 내포한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여러 가치 중 어떤 것에 근거하여 내가 잘못되었음에도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은 글을 쓸 때마다 문장을 이어나가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글을 계속 써야겠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글로 써봐야 내가 어떤 잘못된 생각을 하는지 거를 수가 있으니).
아무려나, 그럼에도, 혹은, 어쨌거나… 무수히 많은 접속사를 남발하면서도 결국 나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용어를 요즘들어 더욱 자주 떠올린다. 이 말이 지금 다시 어떤 재해석 과정을 통해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며. 물론 다시 널리 쓰인다면 나는 가장 빨리 이 용어를 비판하겠지만 그럼에도… (50H50 칼럼)
+가장 혼란스러운데 그럼에도 메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