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꿈을 잃다.

어떤 사람은 여러 번 들었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부산 지역 모의고사를 치면 뒤에서 1-2등을 다투던 곳이었다. 공립이었기에 교사는 학생의 성적에 큰 관심이 없었다. 5년 정도 지나면 다른 학교로 가기 마련이었고, 그러니 어차피 공부 못 하는 학생이 모인 학교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고민하면, 다들 대체로 가난했다. 하지만 모두가 가난했기에 특별히 가난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어쨌거나 밥은 굶지 않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면 잘 산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내가 다닌 초중고등학교가 지금에 와선 어느 정도 가난한 동네에 있었지만 그땐 그런 고민이 없었다. 특별히 누군가가 가난하다고 지목하기에도, 특별히 누군가가 부자라고 지목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곳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있어 특출난 상상력이 없었다. 엄청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 특정 계급에서나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사람들의 상상력에 없었다. 그래, 정확하게 이것이 계급이다. 지금 내가 매달 벌고 있는 수입이 나의 계급이 아니라 내 삶을 상상하고 내 행동 관습을 규율하는 방식이 계급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많은 동기가 진학하고 싶은 학교와 학과가 있었다. 물론 한국에 대학교는 부산대학교 하나 뿐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보면 저 멀리 수능성적 기준 하위권 대학이 있었는데 누구도 그 대학엔 진학하지 않을 것이란 패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진학하고 싶은 학과, 그리고 이왕이면 가고 싶은 학교가 있었다. 다른 말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대충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IMF가 터지고 난 다음 누구도 원하는 학과, 원하는 학교를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실제 수능시험을 보고 대학교에 진학할 때 IMF의 효과는 확연히 드러났다. 더 좋은 대학교나 학과를 갈 수 있음에도 한 푼이라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지원했다. 그 전까지 하고 싶은 일을 얘기하던 많은 사람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 본가에서 다닐 수 있는 학교, 취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학과를 선택했다. 내게 IMF는 이 풍경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상상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내가 체감한 IMF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말하지 않았다. 취업을 얘기했고 취업할 수 있는 학과를 선호했고 대학생 시절 내내 취업 준비에 몰입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IMF 때문이라고 할 순 없다. 어떤 사람은 2000년대 자기계발 열풍의 효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식으로 말하리라. 그저 내겐 꿈을 잃고 먹고사니즘이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면피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IMF라고 기억할 뿐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 취직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 모두 정당한 말이다. 맞다. 먹고 살아야 하고 먹고 사는 건 중요하다. 이런 말이 내 삶을 더 옥죄는 체제를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뻔한 질문을 하고 싶진 않다. 그냥 IMF가, 지금의 사회 체제가 꿈 하나 없는 삶을 재생산하고 있는 게 아쉽고 속상할 뿐이다. 그러니 봉기하면 좋겠다. 꿈 꿀 수 있도록,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로렌스 애니웨이: mtf/트랜스여성 영화

지난 화요일 오전에 아트레온에서 mtf/트랜스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를 봤다. 요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후반부엔 몸이 힘들었지만 괜찮게 봤다. 극장에서 다시 볼 엄두는 안 나고 나중에 DVD가 나오면 구매 예정!
일단 인상적인 장면.
영화 시작은 안개에서 누군가(라고 쓰고 로렌스라고 읽는다)가 나와서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다시 누군가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것은 로렌스가 정확하게 어떤 존재인지 포착하기 힘든 지점을 암시한다. 범주의 모호함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범주보다는 성격이 더 정확할 듯도 하고…;;;
영화 초반, 손가락 끝에 클립을 끼우는 장면이 있다. 그 모습이, 소위 여성의 긴손톱을 형상한 느낌이라 정말 좋았다. 남성으로 통하지만 자신을 남성이 아닌 젠더, 혹은 여성으로 인식하는 로렌스가 자신의 억누른 삶을 표현하는 찰나라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슬프기도 했고.
로렌스가 가장 예쁘게 나온 순간은 처음으로 ‘여장’하고 수업에 들어간 모습. 이때 로렌스는 투피스 정장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반삭의 머리였다. 이 모습이 가장 좋았고 영화 전반을 통틀어 이 순간이 가장 예뻤다. 영화 흐름에서 중간 시기의 헤어스타일은 정말 안 어울렸고 후반부 곱슬머리는 그냥 평범했다. 반삭에 치마 투피스 정장에 화장이라니!
(대충 이런 모습인데.. http://i.ytimg.com/vi/Lj3JvLYZyDs/hqdefault.jpg )
처음으로 여자화장실에서 치마로 갈아입으려다가 포기하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포기한 이유가, 화장실에 있는 다른 몇 명의 여학생이 강사/교수를 평하는 얘기를 나누는데 로렌스는 매력적이라고 얘기한다. 이 얘기를 들은 로렌스는 학생을 실망시킬 수 없다며 치마 입기를 포기하고 나온다. 나는 이 갈등, 이 순간의 감정이 정말 좋았다. 자신의 원하지 않는 외모지만 그 외모에 매력을 느낀다는 누군가의 말에 잠시나마 기뻐하는 찰나의 감정을 그려서 정말 좋았다.
별로인 순간은 샤를로테와 지내는 시기. 로렌스는 프레드와 헤어지고 샤를로테와 몇 년을 함께 하는데 그 동안 로렌스는 샤를로테에게 어떤 애정도 주지 않는다. 샤를로테가 로렌스를 위해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등 온갖 일을 하지만 로렌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대신 프레드에게 연락이 왔을 때 샤를로테를 붙잡는 대신 프레디를 찾으러 간다. 정말정말 화가 난 순간이다.
전반적으로 재밌었고 영상은 특히 아름다웠다. 이를테면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색감을 정말 예쁘게 잡았고 그래서 화면에 빠져들었다. 아울러 감독이 168분에 가까운 편집을 할 수밖에 없겠다 싶기도 했지만 120분으로 편집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솔직히 지루한 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 나는 좋다.

크리스마스 후일담

24일에 잠들어서 26일에 깨어난다거나 23일에 잠들어서 25일 밤에 깨어나는 일. 혹은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는 일.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이 시기를 피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나누는 농담인데..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집에 조용히 지내는 것 아니냐며, 나는 종일 집에 있으며 바람과 빈둥거렸다. 올 크리스마스엔 <나 홀로 집에>도 봤는데, 재미는 없더라. 가족을 그리워하고 가족애를 강조하는 것도 별로지만(그래서 크리스마스에 방영하는 것이겠지만) 그냥 전반적 구성이 별로랄까. 케빈의 전략이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것도 별로고.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최근 읽은 <그랜드 펜윅 공화국> 시리즈가 더 낫다.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았다는 식의 황당함이 있지만, 그래도 가볍고 재밌게 읽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밥은 맛나게 잘 먹었다. 아침은 버섯과 양파, 콩단백을 볶아서 먹었고, 점심은 버섯구이를 쌈채소와 먹었다. 일요일 대청소를 할 때면 무한도전을 틀어두곤 하는데, 무한택시 에피소드를 보고 있노라면 쌈채소를 먹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점심은 버섯구이를 쌈채소에 싸서 맛나게 냠냠 먹었다. 잠시 쉬다가 낮잠을 잤다. 요즘 계속 미세한 두통이 있어 눈을 붙였달까. 두어 시간 눈을 붙이니 좀 괜찮았지만 일어나니 휘어청. 미세한 두통은, 한동안 홍차를 매일 마셨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카페인이 또 몸에 각인된 것인가 싶기도 하고. 집에서 조금 쌀쌀하게 지내는데 그래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두통으로 집중하기 힘들어 가벼운 읽을 거리를 선호한다. 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두통이.. 끄응..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간다. 올 해의 퀴어 이슈를 정리하고 싶기도 한데 할 수 있을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이슈를 중심으로 정리한다면 재미가 없을 듯한데.. 흠.. 암튼 이렇게 크리스마스도 조용히 지나갔다. 아니, 이렇게 올 한 해도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