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젠더, 아니 그냥 젠더

아이디어 메모.
케이트 본스타인은 “섹스는 성행위고 나머지는 모두 젠더다”라고 말한 적 있다. 얼마전 수업교제를 읽다가 이 구절이 떠올랐다. 그래… 아무리 고민해도 탁월한 성찰이야.. 하지만 이렇게 사유하고 실천하기란 참 어렵겠지.
섹스는 성행위고 나머지는 모두 젠더라는 성찰은, 소위 생물학과 사회문화의 이분법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구분 공식으로는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물질적 몸, 젠더라는 사회문화적 양육과 해석이라는 구분은 차별과 억압의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비판하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젠더를 강조하면 그럼에도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는 섹스를 놓치게 되고, 섹스를 강조하면 섹스 자체가 해석이란 점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섹스-젠더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냥 모든 게 젠더다. 바로 여기서 시작하면 된다. 의외로 간단한 일이다. 소위 물질이라는 어떤 몸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담론-물질 구분으로는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죽었다 깨어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한 성찰이다. 그냥 모든 게 젠더다.
여기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다.

시간, 나, 그리고 얽히고설킨 순간

어제 수업에 쓴 쪽글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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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0.화. 15:00- 수업쪽글.
시간, 나, 그리고 얽히고설킨 순간
-루인
집에 놀러온 지인이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집에 시계가 없네요.” 자취하며 많은 것 없이도 불편하지 않게 살지만 고집스럽게 두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달력이 없고 시계가 없다.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해가 중천이거나 배가 고플 때 점심을 먹는다. 문득 쓸쓸하면 오후 세 시즈음이다. 몸이 찌뿌드드하면 저녁이다. 시계가 없다고 구체적 시간을 알 수 없는 건 아니다. 핸드폰이 있다. 시간을 알 수 있는 기기는 일부러 켜야만 확인할 수 있는 핸드폰으로 충분하다. 시간 감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눈에 걸리는 시계시간의 표식을 집에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 시계시간의 흐름과 내가 생활하는 방식의 흐름의 속도가 같지 않으니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계시간에 맞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집에 있을 때마저 몸이 피곤한 방식으로 지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나는 시간 강박적이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아 약속 시간에 1-2분이라도 늦는 일이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고 아르바이트엔 지각한 적 없다. 늦기보단 늘 일찍 도착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곤 한다. 시간을 어기면 안 된다는 나의 강박은 나의 늦음이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믿음과 상대에게 괜한 낭비를 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시간이 예의가 되는 찰나이자 재화가 되는 찰나다. 이 찰나를 매일 매순간 겪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편하지 않다. 아니, 피곤하다. 주 5일, 아침마다 알바하러 출근하고 저녁 5시에 퇴근하고, 나머지 시간에 수업을 준비하는 빠듯한 생활. 공부할 시간이 빠듯하니 시간 조율에 신경이 곤두서고, 그래서 시간을 아는 건 피곤한 일이다.
시간에 강박적이라고 시간의 규율에 잘 맞춰 사는 것도 아니다. 내 인생부터가 ‘에러’다. 몇 살에 무얼 해야 하고, 몇 살에 무얼 해야 하고… 20살 대학 진학까지는 대충 생애주기라는 시간을 산 것 같다. 그 이후로 틀어졌다. mtf 트랜스젠더여서 틀어진 것일 수도 있고 대학원생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아버지 장례식 때 많은 조문객이 내게 말했듯 퀴어이자 대학원생인 나는, 번듯한 직장도 없고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 나는 ‘성장을 거부하는 철없는 아이’다. 태어난 년수로는 성인이지만 이성애규범적 생애주기에서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고 이기적이고 철없는 아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아이의 시간과 성인의 시간을 동시에 산다. 퀴어이자 대학원생으로서 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무언가를 기획한다. 아직 정신을 못차린 아이로서 나는 무엇도 제대로 할 줄 몰라 원가족과 그 지인에게 깊은 한숨을 야기하는 묵직하고 뜨거운 돌덩이일 뿐이다.
가정하기를, 만약 나이 마흔에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면 나는 또 다른 시간의 동시성을 겪을 것이다. 호르몬 투여는 청소년기의 “2차 성징”과 같은 몸의 시간/경험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흔이라는 시계시간과 호르몬이 야기하는 ‘십대 사춘기’를 동시에 겪으리라. 이미 겪었다고 얘기하는 십대의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혹은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겪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 되풀이 되지만 지금 겪는 ‘과거’의 시간이 과거의 그것과 같지 않고 지금의 시간과 얽히며 그 꼴을 갖춰간다. 불혹과 ‘질풍노도’를 동시에 겪는 건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르지만 마냥 흐르기보다 뒤엉키면서 움직인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시간경험이 내 몸에 동시에 일어난다. 뜻을 분명하게 하자. 그것은 서로 다른 시간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겐 분리할 수 없는 사건이 기존 시간경험에선 분리해서 설명된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불화하는 건 젠더가 아니라 (어떤 규범적)시간(강박)인지도 모른다.

제도의 틈새

길게하려는 얘기는 아니고..
어떤 상황에 대한 법적/사회적 제도가 있다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제도 없는 게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때론 제도가 상황을 더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의료조치를 제도화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동성결혼을 제도화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어떤 현상을 제도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지, 어떤 현상에 불이익을 야기하는 다른 어떤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중요한지는 늘 선별적/논쟁적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고민할 부분이다.
아울러 제도가 배제한 삶이 때론 더 편하다. 제도가 규정한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면, 제도가 배제한 삶과 나의 욕망이 일치한다면 좋은 일이기도 하다.
제도의 부재를 차별 상황이나 억압으로만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부터 조심할 일이고.
결국 또 뻔한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