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칼럼을 먼저 읽으세요.
놀랍게도 김도훈의 칼럼은 미국의 공화당 의원, 혹은 한국 자유공화당 소속 정치인이나 지지자가 쓴 글이 아니며, 조선일보나 데일리안, 크리스천투데이와 같은 매체에 게재된 글이 아니다. 이 놀라움이 내가 쓰고 있는 이 칼럼의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고, 그것이 지금 내가 쓰는 이 칼럼의 핵심이다.
올 초 세계육상연맹(IAAF)은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 이 문장을 정확하게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트랜스젠더퀴어의 스포츠 참여 금지가 아니라, mtf/트랜스여성의 여성 경기 참여 금지가 핵심이다.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에서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의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100년의 역사를 지니는데, 그럼에도 ftm/트랜스남성의 남성 경기 참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트랜스여성이 여성 선수로 스포츠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 다른 뉴스. 이곳의 뉴스브리핑으로 소개했고,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상황을 추가하자. 현재 미국은 공화당이 주류를 이루는 주(states)를 중심으로 반-트랜스 법안의 입법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트럼프 때보다 지금이 더 구체적이고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주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다음의 법을 제정했거나, 의회에서 논의하고 있거나, 입법 준비를 하고 있다. ㄱ. 트랜스여성의 공교육 및 대학교 여성 스포츠 팀 참여 금지, ㄴ. 청소년 트랜스젠더에 필요한 의료적 조치(2차 성징 억제 호르몬, 자신이 원하는 호르몬 투여, 수술 등 의료적 조치)에 접근 금지 및 이 과정에 도움을 주는 의료인 처벌, ㄷ. 트랜스젠더퀴어가 자기에게 더 편안한(혹은 덜 불편한) 젠더 범주의 화장실 사용 금지. 현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주도의 이러한 흐름에 비판적이지만, 미 행정부가 마련한 제안서는 예외를 허용함으로써 트랜스를 배제하는 현재의 흐름을 사실상 막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뉴스브리핑 #003에서 설명할 것이다).
스포츠에서 트랜스여성의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오래되었지만 언제나 그 논리 구조는 동일했다. 트랜스여성은 사실상 남성이고 남성은 여성보다 근육이나 체력 등이 더 뛰어나고 그러니 트랜스여성이 여성 경기에 참여하면 무조건 우승할 것이다. 1970년대 르네 리차드가 성전환 수술을 한 뒤 여성 선수로 계속해서 활동하고자 했을 때, 당시 대부분의 언론이 이런 기조로 기사를 썼다. 김도훈 역시 이 기조를 반복하는데, 이런 편견을 가장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는 제목과 본문 모두에 나타나는데, “남성부 462위에서 여성부 1위”이다. 남성 스포츠 선수의 400위권 능력은 여성 선수 1위에 준하는 능력이다라는 표현. 이 말은 여성 스포츠 선수 혹은 여성 전문가, 여성의 신체 능력은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라는 함의를 내재한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 능력이 열등하고, 그래서 여성 스포츠는 별볼일 없다는 암시를 내재한다. 그러니까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반대하는 논리는 트랜스여성은 여성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진입하지도 못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 능력이 열등하다는 오래된 차별 인식을 트랜스젠더퀴어를 경유하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김도훈이 [피지컬: 100]을 언급하는 이유도 정확하게 여기에 있다. ‘여성은 남성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체 능력이 열등하며 그러니 결코 이길 수 없다.’ 이 메시지를 먼저 독해해야 한다.
놀랍지 않게도, 미국에서 반-트랜스 법을 제정하고 있는 공화당 의원이 그 법안 제정을 정당화하는 논리 역시 동일하다. (비트랜스)여성 스포츠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비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mtf/트랜스여성의 여성 스포츠 참여를 막하야 하고 그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을 이룬다. 비트랜스여성이 스포츠에 참여하기 어렵고, 스포츠에서 차별을 받는 이유, 기회가 박탈되는 이유가 트랜스여성 때문이라는 논리가 생성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트랜스젠더퀴어의 차별을 법제화하는 그 법안들은 그 내용이 길지 않다. 예를 들어 메인주 오거스타는 트랜스여성의 여성 스포츠 팀 참여를 금지하는 법안을 단 한 문장으로 만들었고, 이름과 인칭대명사(pronouns)와 관련한 법안은 정의 조항을 빼면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뉴스브리핑 #003 참조 – 공개예정]. 논리 같은 것도 없고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냥 여성(female, woman, girl)을 보호하기 위해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한다고 선언할 뿐이다. 이 문장에 담긴 함의는 여성의 스포츠 능력은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인식이지만 교묘하게도 이 인식은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혐오로 인해 은폐된다. 트랜스젠더퀴어가 여성 혐오의 기나긴 연원이자 원인이며 여성 억압과 여성을 향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는 제1 이유가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학생이 운동장을 사용할 수 없다고 문제제기한 초등학교 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자.)
앞서 말했듯,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100년의 역사를 지닌다. 그 역사는 반복되고 동일한 논리가 재생산되는 시간이었지만,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가 사후 허용된 경우가 있다. 그것은 트랜스여성이 여성부 경기에 참여했는데 여성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거나, 중간 정도의 성적을 낼 때였다. 패배는 여성다움의 상징인가? 패배는 여성되기의 핵심 조건이자 여성 스포츠 선수의 자격이 되는가?
김도훈은 미국이 트랜스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허용하는 반면 국제수영연맹이 12살 이전에 호르몬 투여를 시작했을 경우에만 트랜스여성도 여성부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것을 “규정과 규정이 부딪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니다. 미국은 이미 청소년의 의료적 접근권을 박탈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12살 이전에 의료적 조치에 접근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어렵고 곤란하며 트랜스 활동가들을 분노케하는 의제다. “후회하면 어떡하냐”, “그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리 없다” 기타 등등. 룸카페를 둘러싼 청소년 섹슈얼리티 논쟁이 구성된 방식을 떠올려보자. 아동이나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 의료적 조치는 더 큰 저항을 부르는다. 이 모든 것이 아동에게, 청소년에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혐오 세력은 언제나 아동 보호를 근거로 퀴어 혐오를 정당화하며, 이 논리는 2023년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시청광장에서 개최할 수 없도록 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니 규정과 규정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과 불가능의 중첩이며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기 위한 역사적 맥락과 현재 노력의 중첩이다. 규정과 규정이 부딪힌다는 식의 표현은 사실도 아니고, 중립도 아니며 혐오 세력의 논리를 정치적 의견으로 승인하는 태도다.
그래서 나는 김도훈의 칼럼을 읽으며 가장 화가난 문구는 이 의제를 “윤리적 딜레마”와 “다양성의 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를 둘러싼 논쟁을 윤리적 딜레마 즉 비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 권한과 트랜스여성의 스포츠 참여 권한의 대립으로 만드는 행태는 이 사안을 둘러싼 오랜 논쟁을 모두 은폐한다. 마치 지금 현재 발생하는 딜레마처럼 만들지만 스포츠에서 이 논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여성 범주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훨씬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지닌 의제다. 누가 여성인가, 여성 범주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정함에 있어 12살 이전에 성전환과 관련한 의료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거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비율 이하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여성 범주를 경험적 본질주의, 나이 본질주의,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환원시킨다. 결국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 혹은 의료적 진단을 통해 결정된다는 논리와 같다. 트랜스젠더퀴어의 스포츠 참여를 둘러싼 논쟁이 복잡한 이유는 여성 범주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훨씬 어렵고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는 사실이 한 축에 있고, 이 논쟁에서 ftm/트랜스남성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축에 위치하고 있다. 무엇보다 누가 인간으로, 스포츠를 할 적절한 자격이 있는 존재로, 안전하고 평등하게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로 논쟁이 진행되어온 역사를 “윤리적 딜레마’’로 만드는 것은 “다양성의 시대”를 적극 사유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다양성을 둘러싼 논의와 운동의 전략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며 윤리가 구성되는 방식을 사유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더 가깝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칼럼을 읽고 매우 분노했다. 이 글 서두에서 기독당이나 공화당 지지자가 쓴 칼럼은 아닌지, 크리스천투데이 같은 매체에서 쓴 칼럼은 아닌지 질문했던 것은 조롱의 의도가 아니다. 평소 진보적 입장을 취하거나, 퀴어 의제를 적극 지지하는 이들이 어떻게 트랜스젠더퀴어를 둘러싼 논쟁에서 재빠르게 김도훈과 같은 태세를 취하는지, 그런 칼럼을 읽을 가치가 있는 내용처럼 게재하는지를 질문하기 위해서다. 진보 진영에서 퀴어 의제는 지지하면서 트랜스젠더퀴어는 손쉽게 혐오하는 태도는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다. 현재 영국은 트랜스 혐오가 가장 극심한 국가 중 하나이며, J.K. 롤링이 트랜스 혐오를 표출함에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이유도 소위 진보 진영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혹은 여성 인권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신필규 “해리포터 작가 또 헛소리… 정치인들이 잘못했네” 혹은 숀 페이가 쓴 『트랜스젠더 이슈』(강동혁 옮김) 참조). 그러니 글 서두에 먼저 쓴 결론은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된 분노이며, 불안함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논쟁의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히기 위해서다. [50H5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