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

지난 8월, 여름엔 글을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던 당시에 투고한 원고가 출판되었습니다. 출판은 이미 두어 주 전에 되었지만 파일은 이제 나온 듯하여..

글 제목처럼 “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입니다. 장례식장에서 겪은 일을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는 장례식을 감정의 정치로 독해한 글입니다. 좀 더 잘 쓰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젠 어쩔 수 없지요..
사실 현재 출판 판본으로 “1. 감정/정치”라고 짧게 쓴 부분은 뒤늦게 급히 추가했습니다. 감정과 관련한 논의를 정치적 이슈로 여기지 않는 인식이 만연한 편이라, 이 글의 논의를 맥락화해야겠다고 판단했거든요. 하지만 없는 게 더 좋다고 믿어요. 나중에 단행본으로 재출간하는 기회가 생긴다면 이 부분은 삭제했으면 하고요.
암튼 뭔가 또 하나 시작했구나 싶습니다. 감정의 정치는 워낙 할 얘기가 많은 이슈라, 저도 이번 글을 ‘이 이슈로 앞으로 계속 고민하고 글을 쓰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기분으로 투고했고요.
관심 있으시면 언제나처럼 위의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치졸함의 힘

저란 인간은 참 치졸하지요.. 네.. 치졸해요.. ;ㅅ; 옹졸해서 어떤 상황에선 꿍하니 품고만 있다가 나중에 터뜨릴 때도 많아요.. 뒤끝은 확실하니까요.

암튼 이 치졸함으로 10월 마감인 원고 중 하나의 절반은 휘리릭 쓰긴 했습니다. 치졸함은 글쓰기에 속도를 더하는 힘이긴 합니다. 치졸함이 아닌 척하기 위해 글을 쓰다보면 글에 불이 붙거든요. 마구마구 휘리릭 쓸 수 있어요. 물론 수위 조절은 잘 해야죠. 마치 이 글이 치졸함의 산물이 아닌 것처럼 이해되어야 하니까요. 치졸함의 산물인 게 티가 나면 그건 실패한 거죠. 물론 지금 이렇게 블로깅을 하고 있으니 제 글이 치졸함의 산물인 건 공개되었지만요… 후후후. 뭐, 아무래도 좋아요. 치졸함의 산물이라도 글을 휘리릭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으니까요.
치졸함의 힘으로 절반은 휘리릭 썼는데 그 다음 절반이 안 풀리네요.. 치졸함으로 글을 썼으니 이럴 수밖에요.. 어떻게 연결해서 이으면 좋을까요… 치졸함이 제게 힘을 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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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쩐지 찌질하네요.. 옹졸한 것도 같고..;;;

시간과 젠더

이번 학기에 듣는 과목 중 하나는 시간과 젠더의 관계를 주제 삼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수업의 쪽글입니다. 논문 두 개를 읽고 대충 요약 정리한 것이랄까요..;; 뭐, 그렇습니다.
2013.09.24.화. 15:00- ‘여성의 시간, 젠더화된 시간’
-루인
시간은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경험인가? 아니 시간은 경험 혹은 인식의 대상일 수 있는가? 시간이 경험이라면, 조안 스콧이 지적했듯, 시간은 자연스럽고 투명한 무언가가 아니라 사후 해석을 통해 재구성되는 사건이다. 시간이 해석을 통해 구성되는 사건이라면 시간은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일 수 없다. 아울러 시간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린다 알코프와 니키 설리반 등이 지적했듯, 이것은 곧 해석과 경합의 영역이다. 만약 시간이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어떻게 경험이자 인식의 대상일 수 있겠는가? 또한 만약 시간이 경험도 아니고 인식의 대상도 아니라면 나는 시간을 어떻게 지각하거나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지각하는 것이 시간인가란 질문은 차후로 남겨두자.)
시간이 경험이자 인식의 대상이라면, 모든 사람이 시간을 동일하게 의미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겪느냐에 따라 시간의 속도, 시간의 의미 등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포만과 펠스키의 글은 시간의 젠더화된 의미를 탐문한다.
여성의 시간은 남성의 시간과 다른가, 혹은 여성적 시간은 있는가란 질문에 포만은 긍정적이다. 남성 지배적 세계에서 여성은 이방인이자 집이 없다는 표현처럼,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시간 체계에서 여성은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시간을 겪는다. 남성이 성취 중심에 평가 단위가 분명한 시간을 겪는다면 여성은 분절된 평가 단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겪는다. 남성의 시간이 우울과 죽음을 향한다면 여성의 시간은 미래와 희망을 향하고 출생으로 얘기된다. 그리하여 포만에게 여성의 시간은 남성의 시간과 다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으로 시간 개념을 논하는 펠스키는 포만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비록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시간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경험은 아니란 것이 펠스키의 지적이다. 남성은 직선의 시간을, 여성은 나선형 시간을 겪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남성도 여성도 모두 직선의 시간과 나선형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동시에 겪고 있다. 즉 누구는 특정 시간을, 다른 누구는 또 다른 특정 시간을 겪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이질적 시간을 동시에 하지만 마치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겪는다. 그리하여 비록 이원젠더화된 시간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것이 각 젠더에게 대당으로 할당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포만과 펠스키의 논의는 시간 경험과 시간 인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하지도 않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특정 해석체계가 유일하게 옳은 해석 방법이란 뜻이 아니다. ‘철지난’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하는 것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란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삶과 시간 경험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체계가 필요하단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삶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매일매일의 삶, 알바를 위해 아침마다 출근하는 나의 삶은 이 시대 많은 사람과 유사하며 불혹과 질풍노도를 같이 겪을 가능성은 상당한 차이를 야기한다. 차이와 공통점을 동시에 겪는데 ‘직선 시간 아니면 선형적 시간’이란 식의 어느 한가지 방법론으로 삶을 해석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