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부모에게

어제 쓴 글에 이어서…
내가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애당초 커밍아웃은 내가 결정할 문제지 다른 누군가가 하라, 하지 마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매우 순진한 언설 같아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행위는 특정 범주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차별이나 편견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덮어씌움과 같다. 트랜스젠더에게 커밍아웃을 요구하며 네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니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 아니냐라는 말은 결국 모든 책임은 트랜스젠더에게 있다고 말함과 같다. 트랜스젠더라고 주변에서 욕하는 것도, 여성답지 못하다 혹은 남성답지 못하다고 아무나 함부로 지껄일 수 있는 것도, 법적 제도가 없는 것도,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잘 모르는 것도, 다른 모든 것도 트랜스젠더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함과 같다.
누군가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차별하는 건 트랜스젠더 때문이야”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한 사람을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변하기 위해선 네가 커밍아웃을 해야 해”라고 말하면 많은 이들이 쉽게 수긍한다. 슬픈 일이다. 앞의 말과 뒤의 말 사이에 인식론적 차이는 거의 없다. 커밍아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커밍아웃이 모든 일을 해결할 궁극의 해법이 아니란 얘기다. 커밍아웃은 그저 시작일 뿐이며 그것도 시작하는 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기획에 많은 힘을 쏟는다면, 비록 유명인사의 커밍아웃이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주체만 힘들 뿐이다.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오랜 시간 골몰했다. 여전히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못 찾고 있다. 무슨 뜻이냐면, 나는 ‘활동가라면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웃기다고 믿는다. 부모에게 커밍아웃 하는 일이 가장 의미있는 커밍아웃이라고 의미 부여 하는 행위에도 얼마간 불편함을 느낀다(가장 쉽지 않은 일이란 점엔 동의한다). 활동가라면 부모에게 당연히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거나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진정한 커밍아웃이란 언설은 한국의 규범적 가족제도를 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말하는 가족 가치를 비이성애-트랜스젠더 실천에도 고스란히 이식하겠다는 기획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식의 언설을 들을 때면 속으로 혈연가족제도가 그렇게 좋으냐고, 소중하냐고 되묻곤 한다. 소심하여 속으로만 구시렁거리지만…
다른 한편, 부모는 나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아야 하는 존재인가? 부모는 나와 친밀한 존재인가? 나의 경우엔 이 질문에 부정적이다. 나는 부모 누구에게도 내가 사는 방식을 얘기하지 않는데 이것은 내가 부모와 어떤 특별한 친밀감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작년 어느 시점부터 매일 아침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고 있지만 나와 어머니의 친밀감은 딱 여기까지다. 나는 그 이상을 어머니와 혹은 부모와 나눌 의지가 없다. 그렇게 친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데 굳이 왜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하지? 내가 부모에게 혹은 원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건, 그들과 친밀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것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친밀하지 않음에도 원가족은 내게 많은 것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피곤함, 고단함 때문에 원가족에게만은 커밍아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농반진반으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건 농반진반이고.)
커밍아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지만, 커밍아웃 하나로 뭔가 엄청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아도 관련 이슈에 상당히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지만 어떤 이슈에 큰 기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커밍아웃 했다는 것만으로, 소위 대사회적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만으로, 부모나 원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만으로 기고만장하다면 그건 가장 부정적 용법으로서 커밍아웃 페티시일 뿐이다(다양한 페티시가 있는 1인으로서 이런 표현이 상당히 불편하지만요..;; ).

커밍아웃, 비가시성

*이 글은 지금까지 제 주장의 일부를 배반하고 있습니다. 고의입니다. 뭔가 다른 모색을 위한 거니까요.*
E의 글을 읽고 아이디어를 얻은 단상..
흔히 트랜스젠더나 바이, 동성애자 등의 가시성을 성취하는 방법 중 하나로 커밍아웃을 언급한다. 많은 사람이 커밍아웃을 하면, 방송에 나오면 소위 말하는 ‘대중’은 트랜스젠더 등의 범주를 더 잘 이해/인식할 거란 얘기다. 물론 많은 트랜스젠더가 방송에 꾸준히 등장한다면, 한 명의 아이콘 말고 여러 명이 여기저기 꾸준히 등장한다면, ‘대중’은 트랜스젠더에 좀 더 익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짐이 가시성 확보를 담보하는가? 나는 이런 상상력에 회의적이다.
트랜스젠더가, 바이가, 동성애자가, 혹은 그 어떤 변태가 방송에서, 혹은 다른 어떤 미디어를 통해 커밍아웃을 하고 그 수가 늘어나면, 이건 그저 방송에 등장하는 변태가 늘어나는 걸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대중’은 한 명 이상의 트랜스젠더 등을 조우하며 ‘다양한 변태가 있네..’라는 걸 알게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방송에, 미디어에 등장하는 변태가 늘어난 것 뿐이다. 이것은 트랜스젠더 등의 가시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커밍아웃은, 그것도 방송 등 소위 대사회 커밍아웃이 퀴어의 가시성을 성취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는 착각인지도 모른다.
하리수 씨가 사회적 인식론을 뒤흔들며 방송에,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 등장했지만 사회적 인식은 그렇게까지 변하지 않았다. 한 명의 예외를 구성했을 뿐이다. 대다수의 학제/연구자를 비롯한 ‘대중’은 하리수 씨를 통해 인간을 인식하는 기본 조건으로 트랜스젠더를 사유하기보다 그저 ‘색다른 연예인’으로 기억할 뿐이다. 하리수 씨의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방송 등을 통한 커밍아웃이 야기하는 파장은 의외로 적고, 서둘러 수습됨을 말하고 싶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조광수 씨의 결혼이 비이성애 결혼에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질까? 글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으로는 좀 회의적이다.)
방송을 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커밍아웃은 가시성을 성취하지 않는다. 물론 주변 지인에겐 어떤 식의 가시성을 성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리수 씨처럼 방송에 꾸준히 등장하여, 길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수준이 아닌 이상 커밍아웃은 언제나 벽장과 함께 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가 만든 벽장을 이고 다닌다. 물론 그 벽장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사회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만든 거대한 벽장이다. 벽장을 만든 건, 벽장에 사는 건,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존재가 아니라 소위 규범이라 여기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다. 커밍아웃은 그 벽장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행위지만 아무런 대답을 못 들을 때도 많다. 그리하여 커밍아웃은 벽장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회가 짊어진 벽장의 무게, 두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천 명의 퀴어가 방송에 나와 동시에 커밍아웃을 하면 퀴어의 가시성이 성취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세상이라 성취된다고도 안 된다고도 말을 못 하겠다. 내 상상력의 한계다. 이런 한계를 전제하고 계속 얘기를 하자면… 내가 전제하는 가시성은, 예를 들어 인간의 젠더 범주에서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 등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인식하면서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타인에게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젠더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인간의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에서 가시성이 시작된다. 커밍아웃이 이런 인식론적 변화에 어떤 식으로건 영향은 끼치겠지만 커밍아웃 여부가 인식론적 변화의 핵심이라곤 믿지 않는다. 단적으로, 내가 트랜스젠더 이슈를 이야기할 때 내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알 때와 모를 때 내용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이건 매우 슬픈 일이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커밍아웃 요구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비이성애-트랜스젠더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과 얼마나 다른지 되물어야 한다. 문제는 커밍아웃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사람을 인식하는 틀 자체를 바꿔내는 작업이다.
(어쩌면, 계속…)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에서

정말 잘 만든 책이다. 이런 책이 나와 기쁘기도 하고. 나중에 이 책의 리뷰를 쓰거나 이 책을 매개로 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단순히 어떤 약속을 해서만이 아니라 읽고 나니 이런 다짐이 자연스럽게 든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파주: 오월의봄, 2013.
30 그래도 누군가 미혼모라서 뭐가 제일 힘드냐고 굳이 물어보면 제 대답은 분명해요.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보는 게 싫다.
31 남들이 정상가족이라고 흔히 부르는, 엄마도 아빠도 있는 가족에게는 결핍이 없나요? 무관심, 방치, 폭력, 이런 문제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여러 가지 결핍 중 하나일 뿐인데,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면, 좀 웃겨요.
45 저는 저보다 변변하지 못한 모습을 가진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데 그들은 저에게 여자답지 못하다고 나무라더군요.
51 애초에 법관이 의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걸 왜 의사에게 떠넘깁니까?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본인이 알고 있습니다. 성별정체성의 주체인 나 자신은 배제되고 제삼자인 법관이 제삼자인 의사의 조언을 받아서 판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거 아닙니까?
52 저는 병원에서 얘기하는 ‘성별주체성장애’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주체성을 상실한 적이 없거든요.
54-55 스님이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참다보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힐 수 있습니다. 나는 말해야겠습니다.” 내가 참으면 무시하고 모르는 척합니다.
55 부모는 저를 버렸지만 나라는 저를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25-126 내가 그때 타파를 만났더라면, 타파의 월급을 조금이라도 받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질문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권리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151 우리나라는 장애인학교나 특수학교는 잘 갖춰져 있지도 않으면서 조금만 장애가 있으면 그런 학교로 보내라, 일반 학교에선 못 따라 간다고 이야기 한다.
172 네 입장에서는 당사자가 나서서 막 소리를 내고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면, 목소리를 내주면 더 큰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힘겨루기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거야. 항상 그랬으니까. 항상 권력과 재력이 우선인 사회잖니. 그러니까 취약 계층들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어. 예전부터 그렇게 당해왔기 때문에.
198 나한테 적대감을 가진 아이들한테 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요.
227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정규직은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돈은 다 받고, 욕 안 나오게 생겼냐고? 걔들은 고용이 보장됐으니 뭐 대충대충 하면 되는데, 우리는 시간대별로 쪼이고 늦게까지 시키는 일 하고, 토요일도 평일처럼 나와 일하고, 일요일도 교대로 나와서 일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