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낮잠

어젠 맛난 점심을 먹고 조금 노닥거린 다음 달콤한 낮잠을 잤다. 마치 하루가 끝난 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런 잠에 들었다.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아니 깨어나지 않을 것이란 인식조차 없이.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몇 시간을 잤는지 알 수 없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개운했고 또 잠이 더 아쉬웠다. 그간 피곤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고 그럼에도 자는 시간이 포근하고 또 달콤했다. 이번 주말 내내 계속 잘 예정이다. 자고 또 자며 7월을 맞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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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른 글을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공개하기 전에 아무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공개 일정이 밀렸다. 그 글은 월요일에 공개될 것이고 오늘은 이렇게 가볍게 주말 느낌으로.

피곤한 한 주

괜찮을 줄 알고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이번 주 내내 피곤에 쩔어 지내고 있다. 해가 있는 시간에도 거의 졸린 상태랄까.
시작은 지난 주말 부산에 가면서다. 토요일 이른 아침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는데 다음날 집에 일찍 와야 해서 역시나 새벽에 일어나 기차를 탔다. 일요일 오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재밌는 일도 있었고. 그런데 일요일에 좀 많이 돌아다닌 것이 문제였을까? 월요일 오전부터 알바하는 곳에서 깜빡깜빡 졸기 시작했다. 그 피로가 풀리지 않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좀 괜찮다 싶으면 또 졸고 또 졸고…
그나마 나 자신에게 준 휴식기간이라 다행이라면 다행. 할 일이 많은 시기에 이랬다면 난감할 뻔했다. 아.. 아닌가? 할 일이 많은 시기였다면 체력을 이렇게 운용하지도 않았겠지만.. 알바는 하지만 아무려나 휴가기간이라고 마구 논 것이 문제였구나.. 흐흐.
암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졸린다. 졸린 눈을 부비며 간신히 쓰고 있달까. 주말엔 늦잠 자고 저녁에 낮잠도 잘 예정이다. 그래서 계속 잘 계획이다…라지만 주말에도 낮에 계속 일정이 있네.. 홍홍홍.
아.. 지금도 졸린다. 아침부터 이 글을 읽는 분에겐 다시 주무시란 얘기다. 😛

쉽고 친절하게, 글쓰기

오랜 시간 내 글의 유일한 독자는 나였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을 유일한 독자였다. 글을 쓰는 데 있어 관건은 내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가였다. 물론 지금도 내 글의 유일한 독자는 바로 나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족한 적 없지만…ㅠㅠ
아무려나 유일한 독자를 나로 삼으며 쓴 글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폐적 글쓰기’라고 했는데 딱 맞는 표현이다. 다른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극소수의 아는 사람만 읽을 수 있고 그 외 사람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쉽게 쓰라는 말, 친절하게 쓰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나는 내 글의 색깔이란 걸 유지하고 싶었다. 착각이었다. ‘자폐’적으로 쓰는 것이 글의 색깔은 아니다. 글의 색깔을 유지하는 것과 쉽고 친절하게 쓰는 건 별개다.
언제부턴가 쉬운 글쓰기를 좀 더 확실하게 지향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단 한 번도 쉬운 글, 독자에게 친절한 글쓰기를 지향하지 않은 적 없다. 내가 애호하는 몇몇 저자는 다들 쉽고 또 친절한 글쓰기를 한다는 점에서 나의 지향점도 그러했다. 그래서 결코 쉽게 쓴 글이 아닌데도 쉬운 글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의도적으로 쉬운 글을 지향하고 있다. 쉽게, 더 친절하게. 물론 지금도 성공적이진 않다.
쉽고 친절한 글쓰기로 조금씩 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계기는 독자를 상상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이 글의 독자는 누구인가? 결국 관심 있는 사람만 읽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을 읽었으면 하는 독자는 누구인가? 혹은 이 글이 실릴 잡지의 주요 독자는 어떤 사람인가? 이 지점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도 잘 못한다.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헤맨다. 내가 가정하는 독자를 매우 추상적으로 상상하며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문제도 있다. 그럼에도 독자를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용어를 사용하거나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걸 확연히 깨닫는다.
상반기에 마무리한 몇 편의 원고를 예로 들자. 많은 글에서 ‘이원 젠더’란 용어를 사용했다. 내가 쓴 글에 빠질 수 없는 용어다. 내가 늘 문제 삼는 용어다. 이 용어를 쓰며 어떤 글에선 이 용어의 뜻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그 글이 실릴 매체의 독자라면 이원젠더란 용어의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용어를 설명하는데 두어 문장을 할애하고, 그리하여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두어 문장 못 하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다른 어떤 원고는 달랐다. 그 원고를 읽을 소수 독자는 이원 젠더란 용어가 낯설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어떤 사람이 읽을지 가늠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젠더 이슈 자체를 낯설어 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야 했다. 핵심은 이것. 이원 젠더가 아니라 젠더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독자라면 이 용어와 관련한 간결한 설명을 ‘이원 젠더’란 용어가 등장할 때 함께 제공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엄격하게 설명하면 ‘이원 젠더’만으로 논문 한 편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매우 간결한 설명이면 충분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인식하고 이를 자연질서 삼는 사회 제도’ 정도? 이원 젠더는 이것 이상이지만 그 이상을 설명하는 건 무리였다. 이원 젠더 자체를 논하는 글이라면 더 정교하게 설명해야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충 이 정도? 이 글에서 사용하는 이원 젠더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예전엔 몇몇 주요 용어에 설명을 제공하는 일을 꺼려했다. ‘어떻게 이 정도도 모를 수 있어’라는 오만함 혹은 건방진 태도의 반영이다. 그래서 편집자가 설명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제안했을 때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 협상을 하고서야 겨우 반영했다. 하지만 나 역시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이슈의 글을 읽을 때, 모든 용어를 익숙해하며 읽지 않는다. 어떤 용어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는데..라고 구시렁거리며 읽는다. 그러니 쉽고 친절하게 글을 쓰는 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원 젠더’를 친절하게 설명한 구절이 들어간 글이 출판될지는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런 식의 고민을 조금씩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하면서 더 쉽고 친절하게 글을 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