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유지하는 감정 형식

아내폭력으로 가족이 깨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내폭력으로도 가족이 안 깨지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가족이란 그런 거다. 무수한 폭력에도 깨지지 않는 견고함. 이것이 가족과 이성애주의를 유지하는 힘이겠지. 그런데 이런 견고함에서 뭔가 다른 걸 고민했다.
당연히 깨질 수 있다고 여기는 관계와 깨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관계는 화를 내는 방식부터 다르다는 걸. 관계를 깨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애인관계에서 뭔가 틀어지면 “우리 헤어질까”란 발화를 통해 관계는 끝날 수 있다. 우정관계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가족은 다르다. 가족 간의 불화에서 ‘이 관계를 깰까?’란 감정은 쉽사리 개입되지 않는다. 미친 듯이 싸우면서도, 서로에게 무수한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 이를테면 난 꽤 오래 전 아버지와 2년 가까이 말도 안 하고 지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만났다. 그리고 결국 어색한 인사를, 다시 그냥 익숙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기도 하다. 만약 친구나 애인이라면? 통상 2년 간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 끝난 사이다. 다시는 안 볼 것이며 상대가 죽는다고 해도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같은, 정말 치를 떨고 때때로 상처만 주고받는 사이면서도 관계 자체는 깨지 않겠다는 어떤 암묵적 협의를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엔 적용할 수 없는 걸까? 깨져야 할 관계를 깨지 않고 유지하자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유지하고 다시 만날 관계’란 어떤 정서를 원가족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는 고민이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는 헷갈린다. 하지만 뭔가 다를 것 같기는 하다. 이런 끈기를 다양한 관계에 부여한다면 ‘에잇 수틀려.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와는 다른 어떤 방식과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법적으로, 관습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관계에 이런 태도가 개입된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물론 깨져야 할 상황에선 깨져야하지만.
이것은 원가족에게 왜 이렇게 관계의 독점적 정서가 부여되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관계가 그토록 쉽게 깨지는 관계라면 원가족도 그렇게 쉽게 깨질 수 있어야한다는 고민이기도 하다. 원가족에게 부여된 정서를 다른 관계에도 공평하게 적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원가족을 유지하는 폭력적 방식이 “가족 같은 우리 회사”란 언설로 통용되는 상황은 끔찍할 따름이다. 그저 화를 내는 방식,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좀 다르게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원가족에게 배울 몇 안 되는 지점이다.

잡담: 감사, 고양이 관련 글, 폭력과 글

ㄱ.
<나는 나의 아내다>와 관련해서 며칠 전 또 한 번 수정하였습니다… ;ㅅ;
이와 관련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가르침을 주신 지혜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해요.
ㄴ.
세상엔 고양이와 관련한 책도 많지만 온라인에 관련 글을 쓰는 사람도 참 많다 싶어요. 정말 전문가에 준하는 수준으로 얘기하는 분이 차고 넘쳐서 저 같은 사람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싶죠. 뭐, 제가 고양이와 살고는 있지만 고양이를 잘 알고 있는 건 아니기도 하고요. 여전히 고양이는 제게 낯설어요. 그래서 바람과 관련한 그 어떤 일도 확신할 수 없죠.
그럼에도 블로그에 고양이와 관련한 글을 쓴다면 그건 제가 쓰는 글이 고양이와 관련한 전문 지식이 아니라 고양이와 살며 겪는 고민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겠죠.
그나저나 제가 가진 책 중에, 선물로 받았는데, 찹쌀떡 신도를 위한 책이 있습니다. 오직 고양이 발만 찍은 사진집… 기획은 초등감성훈련 운운하는데, 그냥 고양이 집사와 신도를 위한 책입니다.
ㄷ.
4월부터 6월까지 총 여섯 편의 글을 쓰면서… 허덕거리고 있기도 하지만… 흥미로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중 세 편의 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데요..
첫 번째로 마무리한 글(하지만 출판된다면 가장 늦게 나올 글)은 젠더폭력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저에겐 익숙한 주제지만 해당 학술지의 독자에겐 어떨는지… 이 글을 쓰며 2010년 5월에 있은 트랜스젠더 살인사건( https://www.runtoruin.com/1695 )을 다시 해석할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금 마무리짓고 있는 글은 성형수술과 성전환수술의 간극을 고민하는 글인데요. 이 글을 쓰면서 규범을 다시 사유할 수 있었습니다. 24일에 공식 발표될 원고인데, 규범의 성질을 다시 고민하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고민을 밑절미 삼아, 쓰려는 세 번째 글이 기말페이퍼인데요.. 혐오와 이성애 범주의 관계, 폭력과 규범의 관계랄까요. 뭐, 대충 이런 주제로 글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잘 쓸 수 있을지 걱정도 되지만요.
아무려나 폭력, 규범, 그리고 범주를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이네요.
(이 사이사이에 리뷰, 발제문, 강의록을 써야 한다는 게 함정…)
*예약발행입니다. 🙂

주체, 범주, 죄의식

학삐리스러운 방식으로 문단으로 시작하자.
루이 알튀세르는 호명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어이, 거기 당신”이라고 부를 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는 찰나, 그 개인은 국가/경찰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한/적법한 주체가 된다는 주장이다. 어떤 부름에 호응하는 행위 자체가 그 부름을 자신의 일부로 구성하는 행위, 혹은 그 부름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란 점에서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설명을 확장하며, 주체는 양심과 죄의식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국가의 법을 대리하는 경찰의 호명에 호응하는 행위는, 해당 법에 자신이 조금도 위배되지 않음, 해당 법질서에 자신이 알맞게 살고 있음을 호소하는 행위기도 하다. 즉 법의 부름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음, 양심에 어긋남이 없음을 표출하는 방식이 ‘뒤돌아보는 행동’이다. 그러니 양심과 죄의식은 주체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그런데 양심과 죄의식이 반드시 해당 이데올로기의 적법한 주체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양심과 죄의식은 지배 규범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지만, 그래서 지배 규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도록 유도하지만 때때로 그렇지 않은 삶을 살도록 하는 동력도 된다. 비규범적 존재가 지배 규범에 적법한 존재로 살지 못 하는 삶의 양식으로 인해 어떤 ‘죄의식’을 느낀다고 해서, 그 죄의식은 규범에 투항하도록 하기보다 비규범적 삶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규범적 존재 역시 양심과 죄의식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원가족과 나의 관계에 관한 얘기다. 나는 원가족이 요구하는 이성애규범적 실천에 부합하지 못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적 없고, 도대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부를 하겠다며 빈둥거리고 있다. 원가족이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에서 나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결혼할 의지도 없다. 나의 이런 행동은 원가족이 나를 비난하거나 어떤 식으로건 압박할 근거로 작동한다. 끊임없이 관련 압박을 행사하고 규범적 미래를 확언받고자 한다. 한때 나는 이런 압박이 그저 부당한 억압이라고 해석했다. 요즘은 그저 좀 슬픈 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원가족의 어떤 욕망이거나 원가족이 느끼는 어떤 불안이란 점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원가족은 ‘완전한 가족’은 아니라도 그럭저럭 어디 전시하기에 아쉽지는 않은 가족을 구성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 하나가, 나를 제외한 원가족이 구성하고자 한 규범적 가족 구성 욕망을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 내가 구멍이다. 내가 틈이다. 내가 결격사유다.
원가족의 욕망을 지배 규범적 욕망의 내면화란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설명은 부당하다. 나 역시 기존 질서의 어떤 지점에 동조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마치 원가족의 욕망만 질서 유지 욕망이란 식으로 싸잡는 건 부당하다. 아울러 욕망은 이렇게 ‘규범 위반 vs 규범 순응’이란 식으로 간단하게 구분할 수 없다.
아울러 나는 원가족의 욕망과 그것에 부합할 의지가 없는 내 태도로 인해 어떤 슬픔과 미안함을 느낀다. 규범적 실천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나와 오랜 시간 관계를 엮어온 어떤 집단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 한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낀다. 이 미안함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양심을 자극하고 어떤 의미에서 죄책감을 야기한다. 이 양심, 이 죄책감은 원가족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 내가 나를 범주화하고 있는 어떤 명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지배 규범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나의 죄책감은 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강화하는 토대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지배 규범의 주체가 된다.
오늘이 아버지 첫 제사다. 제사는 음력이라 양력 기준으로는 이미 1년이 넘었다. 죽음과 애도가 또 다른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 좀 더 정교하게 글을 쓰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