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꿍얼꿍얼: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

인권과 관련해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란 구절이 있다. 종종, 어쩌면 매우 자주 이 구절을 접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거짓말…”이라고 구시렁거린다. 물론 “거짓말”이란 표현은 불편함을 표현하는 감정이지 정확한/적확한 논평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란 구절이 이른바 ‘당위’란 건 안다. 현재 상황을 기술하는 구절이 아니라 지향해야 하는 방향성을 기술한 구절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내가 혹은 인권 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가지면 다 된 것인가?
좀 과장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도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권리는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권리를 동일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다. 당위적 권리가 없어서라기보다 권리와 늘 같이 작용하는 권력 개념을 무시하는 게 문제다. 단적으로 나와 박근혜는 같은 권리를 가진다. 나와 이건희도 같은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박근혜나 이건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실천 양상은 다르다. 때로 박근혜와 이건희는 실천하지 말아야 할 일을 권리로 실천한다. 과소권리도 문제지만 과잉/과도한 권리 실천도 문제란 얘기다.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어떤 권리를 가져야 하는지, 권리를 투명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 즉 내가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말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말하는 것과 대형 교회 목사가 트랜스혐오 발화를 표현의 자유로 말하는 것은 결코 동일한 실천이 아님에도 이를 등가의 행위로 여기는 태도가 문제란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가져선 안 된다. 권력 개념을 탈락한 권리 개념은 정말 공염불일 뿐이다.
…라고 자주 구시렁거린다. 그냥 꿍얼꿍얼, 꽁알꽁알거리는 게 지겨워서 이렇게 메모를..

성구매, 낙인

며칠 전 모 연예사병이 안마방에 갔다는 이슈가 문제가 되었는데.. 이 이슈를 두고, 성구매자에게도 낙인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라는 해석이 있어 당황했다. 어떻게 이 이슈가 성구매자의 낙인을 입증할까?
그런데 궁금한 건, 성구매자에게 낙인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이 성판매자/성노동장에게 가해지는 낙인을 무화 혹은 완화시킬까? 성구매자에게도 낙인이 있고 그리하여 성매매 전체에 가해지는 낙인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한다고 할 때, 이 목적으로 성구매자가 성판매자/성노동자와 동일한 지향에서 운동에 동참할까? 이 운동은 성판매자/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낙인은 여전한 상태에서 성구매자에게 가해지는 어떤 부정적 인식만 줄이는 효과만 야기하진 않을까?
뭐.. 이런 고민이 들었다. 혹은 궁금함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해석과…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파니 “시스젠더 몸의 탄생 : <미녀는 괴로워>가 젠더경합을 무마하는 방식에 대하여”
내 이름이 자주 등장하여 쑥쓰럽지만 흥미롭고 또 잘 쓴 글이라 여기에 슬쩍 링크.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시스젠더 몸/범주의 탄생으로 재해석한 글인데,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본 나로선 이 해석이 무척 좋다. 읽으며 ‘그래.. 그렇지’하며 감탄하기도 했다. 이렇게 흥미로운 해석을 이제야 읽다니!
물론 몇 군데 선뜻 동의하기 힘든 구절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젠더 (정)체화 과정은 규범을 불안정하게 패러디하며 몸을 변형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젠더주체는 트랜스-젠더가 된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문단의 논의 맥락에선 이 구절이 문제가 없다. 아울러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트랜스-젠더”라고 표기하고 있기도 하고. 그럼에도 모든 주체를 트랜스젠더 주체로 재해석할 때, 나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링크한 글의 문제란 뜻이 아니다). 이를 테면 성전환수술로 분류되는 일련의 의료적 조치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떻게든 다른 경험을 한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분류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과 조우하는 방식도 분명 다르다. 그런데도 ‘모든 젠더 주체는 트랜스젠더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면 의료적 조치를 선택한 트랜스젠더가 겪는 또 다른 경험이 희석되거나 누락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갈등한다. 서로를 분리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경험의 층위를 무화시키지 않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파니 님의 글은 2010년 12월에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 석사학위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응? 어떻게 읽으신 거지? 석사학위 논문을 워낙 적게 인쇄했기에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배포했다. 아울러 도서관에서 파일 다운로드를 막았기에 읽은 사람이 정말 몇 명 없고 구할 방법도 마땅찮았다. 이 블로그에 공개한 것도 2012년 여름이었고. 그런데 무려 2010년에 쓴 글인데 석사논문을 읽으셨다니.. 어떻게 구하신 거지? 어떻게???
파니 님 블로그에 직접 여쭈려다 부끄럽기도 하고 수줍기도 해서.. 소심하게 여기에만 조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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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초면이 아니면 어떡하지… 내가 워낙 사람 얼굴과 이름 기억을 못 해서..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