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상영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에서 진행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상영회를 연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3xFTM>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방영되었다는 <Middle Sexes>입니다. 흔하지 않은 기회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상영일자
-3xFTM : 3월 15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미들 섹스: 3월 22일 금요이 저녁 7시 30분부터
상영장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신청방법
이메일 jogakbo1315@naver.com 이나 트위터 @kscrc 로 부담없이 신청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신청하신 분 중 추첨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자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니 사전 신청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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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늘은 참 오랜 만에 고양이 사진을 몇 장 방출하려고 했는데 행사 홍보가 우선이라…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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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선 제목을 쓸 수 있지만 댓글에 쓰는 순간 필터에 걸려 등록이 안 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ㅡ_ㅡ;;

글쓰기: 다짐

나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도록, 당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들도록 글을 쓸 것이다. 당신이 안심하면서 읽는 글이 아니라 때때로 중간에 집어 던지고 싶을 그런 글을 쓰겠다.
이것은 4월 중순이 마감인 원고를 쓰기에 앞서 내게 하는 다짐이다. 물론 그 글은 완전 새로운 얘기를 하기보다 이제까지 했던 이야기를 가급적 쉽게 써야하는 기획이다. 나는 그 얘기가 지겹다고 했지만 나를 추천하고 내게 조언을 준 선생님은 새로운 독자를 만날 기회를 만들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나의 글을 읽는 독자와는 다른 독자를 만날 기회라고 조언하셨다. 그러며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접점을 만드는 데 좀 더 초점을 맞추며 글을 쓰면 좋을 거라고 했다. 트랜스젠더의 젠더 이슈는 비트랜스젠더의 젠더와 무관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트랜스젠더의 젠더 이슈를 자기 이슈로 인식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그 조언을 듣고 원고를 쓰겠다고 확정했다. 이런 기획이라도 나는 그 잡지의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슬플 것 같다.
그렇다고 당신이 틀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당신은 틀렸다’와 같은 언설은 도발도 아니고 불편함도 아니다. 그냥 소통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나는 당신의 위치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고자 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내 글을 읽고 좋다고 말씀해준 고마운 분들은 대체로 나와 비슷한 연배다. 꼭 그렇진 않지만 대체로 그렇다. 이번 원고는 나보다 한 세대 앞선 이들이 중심독자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다. 물론 안 읽으면 그만…;;

과거 기록물 읽기: 트랜스젠더 흔적 추적

1993년에 책으로 출간된 기록물을 하나 읽었다. 트랜스젠더를 게이라고 표현한 기록물이다. 처음 공개되었을 때 서울 지역 동성애자에게, 특히 남성동성애자 게이에게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 기록물이 처음 공개된 후, 그 당시 십대였던 게이는 학교에서 “너도 나중에 성전환수술을 할 거니?”란 얘기를 들었다고 하니까. 이 기록물은 게이와 트랜스젠더를 구분 못 한 시절의 기록물로만 평가받고 있다. 혹은 게이를 트랜스젠더로 오인하던 시절의 역사를 드러내는 기록물로만 언급되고 있다. 나 역시 막연하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비트랜스-게이 혹은 비트랜스-동성애자의 맥락에선 적절한 비평이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선 달리 해석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이를 간과한 건 나의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이다.
이번에 그 기록물을 읽으며,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도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주류미디어의 첫 작품이란 점을 감안하면, 놀랍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말이 없다. 비록 불쌍한 존재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트랜스젠더가 겪는 다양한 어려움을 나쁘지 않게 다루고 있다. 트랜스젠더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수렴될.때에도 사회구조적 의제로 전환해야 함을 놓치지도 않는다. 좋은 건 아니라고 해도 시대적 정황을 고려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2007년인가, 트랜스젠더 혹은 인간의 젠더는 뇌의 형태로 결정된다고 설명한 TV 방송보다는 백 배 낫다.) 1990년대는 지금보다 더딘, 덜 발달한 시대란 뜻이 아니다.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트랜스젠더를 논하고 있다. 인터뷰에선 이성애자되기를 주로 얘기하지만 설명하는 부분에선 이성애자로 한정하지 않는다. 길진 않지만 트랜스젠더가 반드시 수술을 욕망하는 건 아니란 점도 언급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좋게 평가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용어사용에 있다. 이 기록물은, 지금은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존재를 일괄 게이로 기록한다. 그 시대적 언어사용법처럼 게이와 호모로 구분한다. 재밌는 건 기록물의 집필자가 게이와 호모의 사전적 의미를 꽤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리즘, 성전환과 같은 용어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 이후에 지금은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존재를 게이란 말로 기록한다. 이것은 기록물 제작자의 오판이었을까? 실수였을까? 부족한 이해의 징표일까? 난 이것이 매우 적절한 판단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지금으로부터 21년 뒤에 젠더퀴어란 용어가 널리 쓰이고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과거 유물이 된다고 치자. 아니,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표현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폐기된다고 치자. 그럴 때 2034넌을 살고 있는 어느 이론가가 2013년에 생산된 일련의 기록물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어리석은 판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13년에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젠더퀴어란 용어가 쓰이고 있었음에도 적극 채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어리석음 혹은 무지로 제단하는 것이 가당할까?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트랜스젠더는 공동체에서, 대중문화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용어다. 때때로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적극 차용하고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용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의 게이와 호모 역시 비슷하다고 평가할 순 없을까? 호모란 용어는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트랜스젠더를 지칭하며 게이란 용어를 사용한 건 그 당시 맥락에선 최선이었으리라. 공동체 혹은 소위 당사자라고 분류하는 이들이 자신을 게이라고 분류하는데 타인이 다른 용어를 적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다른 용어를 적용하는 건 지식권력의 행사일 수 있다. 이것은 ‘당사자’의 본질적 권력때문이 아니라 범주 명명의 지식 권력을 누가 행사하는가의 이슈다. 누가 무슨 근거로 범주 명명의 옳고 그름을 규정할 수 있는가. ‘그 명명은 틀렸고 이 명명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게이-호모
트랜스젠더-게이
용어 사용의 변천은 잘못된 용법이 제대로 된 용어로 교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한 것 뿐이다. 그럼 어떤 맥락이 있었을까? 난 지금까지, LGBT 운동의 성과만 언급했는데 단지 운동의 성과라고만 해석해도 괜찮을까? 어떤 다른 변화는 없었을까? 용어의 변화는 순식간이지만 단순히 특정 집단만의 노력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누가 이 맥락을 연구하면 좋겠다.
…라고 적어봐야 누구도 안 할 거 안다. 정말 누군가가 한다면 기꺼이 사… 사… 사ㄹ.. 사탕을 드릴게요.. ;;; 정말 누군가가 연구하면 상당히 재밌을 텐데… 결국 내가 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슬플 것 같아.
덧븥이면 <캠프 트랜스> 후속 작업으로 1990년대 이태원의 역사를 읽고 싶다. 1989년으로 끝냈을 때부터 1990년대는 따로 다룰 계획이었다. 현재는 잠정 중단되었지만 관련 기록물은 꾸준히 모으고 있고. 하지만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훌륭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고작 저랑 비교해서 죄송합니다ㅠㅠ) 아울러 비슷한 주제를 여러 사람이 각자의 맥락에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재밌는 일이고! 그래서 누군가가 작업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