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는 컴퓨터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자동차의 빵빵거리는 크락션은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사람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혹은 사람에겐 어떤 경고음을 들을 의지가 있다. 첫 번째 전제는 청각장애인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특히 문제고, 두 번째 전제는 현대 시대와 맞지 않아서 문제다. 두 번째 전제에 초점을 맞출 때, 갈 수록 많은 이들이 경고음을 들을 의지가 없거나 자발적으로 차단한다. 이를테면 나는 길을 걸으며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데, 이런 이유로 여러 번 교통사고를 겪을 뻔했다. 이어폰을 낄때 비로소 개인이 되는 내게 크락션의 경고음은 의미 있는 소통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리라. 외국에선 이어폰에서 출력할 수 있는 볼륨을 제한한다는 말도 있고, 청소년의 청력을 걱정하는 소리도 있다. 소리가 더 이상 의미 있는 경고체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 구글 등이 개발하고 있는 무인자동차, 구글글래스 같이 착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그 기능을 발휘하겠지. 자동차는 인공위성과 통신하며 주변의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움직일 것이고 몸에 착용한 컴퓨터 역시 장기적으로 인공위성과 통신하며 사고 가능성을 끊임없이 점검하겠지. 그래서 OS가 같건 다르건 상관없이 호환성이 매우 중요하겠지. 몸에 입는 컴퓨터가 사고를 예방하는 방식은, OS 기반이어선 안 될 테고. 이를 테면 구글무인자동차에 장착할 OS는 구글글래스 및 안드로이드폰과만 호환하고 iOS와 호환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쓸모가 없을 테니까. 앱이건 웹이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엇이건 호환성이 가장 중요하겠지.
아울러 경고의 핵심은 자동차를 제어하는데 있지 사람을 제어하는데 있진 않겠지. 길은 보행자 중심이어야지 자동차 중심이어선 안 된다. 즉, 자동차가 지나가기 때문에 사람이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나가기 때문에 자동차가 멈춰서야 한다. 그러니 무인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급정거하는 식이겠지. 이럴 때 운전자를 보호할 방안도 물론 필요하고.
(나는 청각 중심으로 얘기했지만 입는 컴퓨터는 시각장애인에게도 상당히 유용한 기술을 제공하지 않을까 싶고.)
이것이 불편한 세대도 있겠지만 아니 낯설고 어색한 세대도 있겠지만, 나 역시 지금은 상상만 하며 낯설어하지만, 어떤 세대에겐 일상이겠지. 그럼 이런 시대의 몸은 어떤 공간이자 체험의 터전일까?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단편: 니키, 수잔, 역사 연구

01
어제 아침에 들은 내부자 소식. 5월에 Nikki가 한국에 온단다.. 꺄아아아아악!!!!!!!!!!
니키, 니키, 니키, 니키가 한국에 온다니!!! 니키, 니키, 니키!!
내가 애호하는 학자 중 한국에서 본다면 쥬디거나 수잔일 줄 알았다. 그런데 니키를 먼저 만나다니. 나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할 거야. 아, 아니지. 어쩌면 등록하지 않고 참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헤헤. 니키 만나면 책에 싸인 받을 거야. 안 되는 영어로라도 꼭 말 한 마디 붙여볼 거야!!
01-1
근데 이렇게 부르니 마치 친한 친구 같구나.. 당연하지만 그분들은 저를 몰라요.. ㅠㅠㅠ 저 혼자 친한 거예요.. ㅠㅠㅠ
02
며칠 전 위키피디아에서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를 소개한 페이지를 읽다가, 짐작은 했지만 새삼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스트라이커가 1994년에 쓴 논문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이 쓴 글 중 동료리뷰 학술지에 실린 최초라고 한다.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이 쓴 첫 학술논문은 샌디 스톤의 글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다른 대중 잡지, 공동체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글은 더 많다). 스트라이커 역시 트랜스젠더 연구의 역사를 개괄할 때면 늘 샌디 스톤의 글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그리고 자신의 글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기 발간된 논문 자체가 몇 안 되기에 짐작은 했지만… 동료리뷰 학술지, 한국에선 익명 심사자의 심사를 받는 학술지에 실린, 트랜스젠더가 직접 쓴 첫 논문이라니.. 하아.. 역시 나의 스트라이커.. (음? ;;; )
그러다 한국에선 어떨까를 떠올리려다가, 그냥 관뒀다.
03
한국의 상황을 떠올리다 관둔 이유 중엔 “공개적”, 영어로는 “openly”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공개적 트랜스젠더일까? 루인으로 아는 사람은 내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알고, 루인으로 생활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나는 나를 트랜스젠더로 설명한다. 하지만 가족에겐 이런 점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나는 ‘공개적’일까 ‘비공개적’일까 ‘반공개적’일까? 다른 대중활동에선 자신의 특정 범주를 밝히지만 부모나 원가족에겐 밝히지 않는 사람과 원가족에겐 밝히지만 다른 곳에선 거의 밝히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공개적이고 덜 공개적일까? 나는 과거 한 신문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인터뷰를 했고 그 기사가 포털 메인에도 올라갔다. 이 정도면 공개적인가? 근데 원가족과 그 친족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러면 다시 공개적 커밍아웃을 안 한 것인가? 이런 복잡하고도 또 말도 안 되는 분류 때문에 “공개적”이란 표현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03-1
이래저래 귀찮으니, ‘저는 덜 공개적이고[openly] 덜 폐쇄적인[closet]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입니다’ 정도면 되려나? 아니지, 아니지. ‘저는 반개구간 혹은 반폐구간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입니다’면 되겠지? 😛
03-1-1
첨언하면, 수학에선 폐구간이 개구간을 포함한다.
04
지난 주말,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이슈, 동아시아의 섹슈얼리티 역사 등을 연구하는 T. H. 교수와 만나 얘기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며 많은 자극을 받았고 또 안타까웠다. 안타까움의 핵심은 한국에서 퀴어 관련 역사, 트랜스젠더의 역사, 퀴어 범주 논쟁의 역사와 관련한 논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퀴어 이슈 관련 역사가 거의 없다. 이해솔 씨, 한채윤 님, 그리고 끼리끼리, 친구사이 등에서 낸, 운동 중심의 소논문 분량인 글이 몇 편 있다. 하지만 학위논문 수준에서, 다른 말로 단행본 수준의 분량으로 역사를 다룬 연구는 없다. 이 점을 마치 처음 알았던 것처럼 깨달았고 아쉬웠다. 한국에서 첫 레즈비언 학위논문이 1995년에 나왔으니 이제 얼추 20년 정도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레즈비언의 긴 역사를 학위논문 수준에서 다룬 논문을 쓸 법도 한데.. 박차의 박사학위 논문을 기대해야 하나? 후후.
이상하게도 나는 역사를 공부한 적 단 한번도 없는데, 역사와 관련한 논문이 더 많이 나오길 바라고 있다.

여기에 트랜스젠더의, 퀴어의 역사가 있다.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헌책방 한 곳을 들렀다.우연이었다. 그저 어떤 책이 있나 싶어 특정 카테고리에서 책을 훑었다. 어어… 내가 원할 법한 책이 가득했다. 목차를 확인할 수 없으니 내가 원할 책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해 촉이 가는 책이 많았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제목 뿐이었지만 제목만으로도 촉이 왔다. 몇 권은 실패할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그럼에도 촉을 믿고 여러 권을 주문했다. 며칠 전 받았고 개봉했다.
위의 사진처럼, 너무도 지저분해서 소독이라도 하면 좋겠다 싶은 책. 비닐장갑을 껴야만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책. 1,000원에서 2,000원 사이, 비싸면 2,500원이지만 찾는 사람은 거의 없을 법한 책. 이런 책 속에 트랜스젠더의 역사가 있고 LGBT의 흔적이 있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LGBT의 삶은 그 시절 출간된 학술지나 문예계간지, 여성학 서적에 실려 있지 않다. 사진처럼, 버려지기 쉬운 책 속에 남아 있다. 유물을 발굴하듯 오직 촉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을 통해 의외의 기록을 찾는다. 이를테면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어느 책에선, 국내에서도 가끔 레즈비언 부부가 탄생한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해도 이런 기록은 지금은 잊힌 책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태원 트랜스젠더의 흔적 역시 이렇게 낡은 책에서 찾았다.
1980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기록도 이런 책에 주로 나온다. 물론 매우 짜증나는 관점이라, 당대 이런 책을 접했다면 무시했을 기록이다. 지금은 매우 귀한 내용이다. 당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단행본 분량으로 다룬 기록이 이런 종류의 책이라 아쉬울 따름이다. 그 시절에도 쟁쟁한 여성학 도서와 잡지가 있었지만 섹슈얼리티는 관심이 아니었거나 단속의 대상이었다. 1985년 초 1호를 발간한 <또 하나의 문화>는 아동양육, 자녀양육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후에도 비슷한 이슈를 중심으로 다뤘다. 1985년 말에는 <여성>이란 제호의 잡지가 나왔다. 다루는 주제는 여성노동운동이었다. 여성노동운동은 1980년대 전반에 걸친 관심이었고 그 시기 나온 여성학 도서 상당수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다뤘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로자 룩셈브루크와 같은 인물의 전기가 출판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각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저 여성의 다양한 성적 실천 이슈가 누락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소위 “가부장제 남성의 관점”이라고 불리는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닌,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쓴 여성의 섹슈얼리티 관련 글을 읽고 싶은 욕심이 있어, 드는 아쉬움이다. 훈계 형식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기록물을 안 읽어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아쉬움이 가득해도, 여성을 훈계하는 태도가 엄청난 짜증을 유발한다고 해도, 이 낡은 책은 모두 내게 귀하다. 이런 책마저 없다면 나의 혹은 우리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언젠가 트랜스젠더가, 레즈비언이나 바이가, 혹은 호스트바에서 놀았던 ‘여성’이 직접 쓴 글을 찾을 수 있기를. 아니, 관련 글은 분명 있을 테니 이를 어떻게 찾고 발굴하나 싶다.
+
근데 이번에 집중해서 찾고 있는 주제의 기록이 없다는 건 함정..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