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완자가(모완)의 윤리: 무지로 무지를 얘기하기 혹은 트랜스-바이 맥락으로 읽기 시도

참고글
ㄱ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 https://www.runtoruin.com/2138
ㄴ ‘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 https://www.runtoruin.com/2139
ㄷ 이것저것 잡담: 읽은 거, SNS, 구글플러스, 모두에게 완자가(모완), 무한도전-노홍철 https://www.runtoruin.com/2140
모두에게 완자가(모완)을 논하는 글을 썼을 때, ‘이 삐리리한 삐리리한 삐리리야’라고 쓸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모완을 읽으며 너무 싫어서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욕을 하며 비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르며 각자의 맥락에 따라 이를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하니까요.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룬 82화와 83화에 문제가 있은 표현이 상당하단 점에서 저 역시 “야이 삐리리야”라는 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 판단에 저는 그럴 위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완자 작가보다 낫다고 얘기할 부분이 없거든요.
자신이 모르는 이슈, 열심히 고민하지 않은 이슈에 있어선 ‘누구나’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수준으로 얘기한다고 정희진 선생님께서 지적한 적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이슈에 아무런 문제 없이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럴리가요. 어떤 이슈에서 저는, 저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논쟁적이고 혐오발화일 수도 있는 말을 했을 겁니다. 제가 주로 염두에 두는 맥락에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얘기를 한다고 해도 제가 염두에 두지 않은 맥락에선 문제가 될 발언이 상당합니다. 장애이슈에 있어선 어떤 ‘사건’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입니다. 제가 주로 글을 쓰고 제 전공이라고 얘기하는 트랜스젠더 이슈라고 예외일까요? 오히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훨씬 더 논쟁적인 얘길 더 많이 했을 수도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고작해야 제가 경험한 방식의 일부만 떠들 수 있을 뿐인 걸요. 저는 다른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대표하지 않으며 다른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대리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경험과 역사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의 논의가 다른 트랜스젠더에겐 문제가 많고 혐오로 독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완에 관한 논평을 쓸 때, 그 잣대를 저에게도 들이댈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얼마나 잘 할 수 있나? 자신없어요. 모완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너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는 식으로, 타인을 비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비평할 것인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트랜스젠더가 이 세상의 최대 약자, 최대 피해자라서 모든 언설을 판단하는 기준도 아닌데, 트랜스젠더 역시 다양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혐오발화를 하는데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더구나 각자의 맥락에서 얘기하자는 건, ‘나는 이게 싫어’라는 식으로 그냥 툭 내뱉자는 게 아니니까요. 나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맥락화하자는 거죠. 밑도 끝도 없이 ‘그건 혐오야’, ‘그 말이 난 불편해’라고 말하는 건, 적어도 비평적 글쓰기엔 … [그냥 생략할 게요.]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른 윤리가 있기에 제 글쓰기 윤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저 저는 이런 고민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죠. 제 기준에 제가 잘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쩌면 제가 모완을 1화부터 계속 읽었기에 이렇게 판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82화만 읽었다면 또 한 편의 트랜스혐오 텍스트가 나왔다며 “이 삐리리한”이라고 비판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이라면 1화부터 읽었고 모완이란 작품의 흐름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완자 작가는 자신의 무지를 통해 무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군가 어떤 낯선 이슈를 얘기할 때면 다양한 전략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부 <성과 사회>란 수업 조별 발표 자리에서, “저희 조는 트랜스젠더라는 (신기한)존재를 만났는데..” 운운할 수도 있죠. 혹은 “너네들 트랜스젠더 잘 모르지? 내가 어제 트랜스포머 아니 트랜스젠더를 만났는데 내가 가르쳐 줄게”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발언의 수위는 달라도 많은 경우 타인을 얘기할 때 이런 형식입니다. 말투만 조금 순화되었냐 아니냐의 차이지 내용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타자화 혹은 우아하지도 않은 혐오일 때가 많죠.
모완은 어떤가요? 조금만 세심하게 읽으면 완자 작가는 윤리적으로 그리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한 걸 짐직할 수 있습니다. 글에 나타난 문제적 표현을 잠시 덮어둘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접근하는 태도, 트랜스젠더 이슈를 얘기하려는 태도가 그러합니다. 자신이 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자신에게 어떤 무지가 있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작가의 바이 범주가 만든 성찰이지 않을까라고 추측합니다.
완자 작가는 야부와 7년 정도 파트너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 시간이라면 자신을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편이 설명하기 더 편할테고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이니까요. 완자 작가가 자신을 바이라고 밝혔음에도 모완이 동성애 웹툰으로 이해되는 걸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개별 관계에선 자신을 바이라고 얘기하면서 공적 자리에선 레즈비언이라고 밝히기도 했고요. 이것이 현재 바이 범주가 갖는 위치를 상징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제가 특강에서 얘기할 때,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는 그래도 참조할 대상이 있어서인지 고개라도 주억거리지만, 바이나 무성애 이슈에선 다들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분위기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완자 작가는 자신을 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럴 작가가 아니죠. 완자 작가는 자신이 바이란 점을 분명하게 밝혔고 바이 범주를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어느 화에서 바이에 관한 오해를 설명한 적도 있는 듯하고요(다시 정주행을 하지 않고 쓰는 글의 문제;;). 자신을 바이로 설명하면서 완자 작가는 자신의 범주 및 삶과 관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겠죠. 바이가 아닌 거의 모든 사람,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상관 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범주를 설명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감수성과 성찰이 있을 테고요. 그렇기에 타인의 삶에 대해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아는 척 얘기 할 수 없다는 걸 정말 잘 아는 듯하단 인상입니다. 이제 완자 작가가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얘기를 할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웹에서 자료 좀 검색해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직접 만나서 듣고 그 얘기를 전하는 것, 그렇게 들은 얘기로 아는 척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먼저 밝히며 무지를 통해 무지를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저는 어떤 글을 비판할 땐 “야이 삐리리야”를 글쓰기 언어로 바꿔서 쓸 때도 있습니다. 이경이나 김정란의 글을 비판할 때 그렇습니다. 비트랜스젠더는 무조건 옹호하고 트랜스젠더는 비난부터하는 글에 저는 지금까지 적은 글쓰기 기준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자는 제가 판단하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 글에 “야이 삐리리야”라는 식의 비판을 할 순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제가 모르는 이슈와 관련해서 글을 쓸 때 완자 작가 수준으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며 글을 쓸 용기가 있느냐면 아니요, 제겐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저는 완자 작가보다 잘 쓸 자신이 없습니다. 완자 작가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만 비판하라(“너희 중에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라”?)가 아닙니다. 그냥 저는 이런 판단을 했다는 것 뿐입니다.
그랬기에 트위터에 제 글이 유통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만약 둘 다 유통된다면,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보다는 “‘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가 더 많이 유통되길 바랐습니다. 지금이라면, 앞의 두 글보다 지금 이 글이 더 많이 유통되길 바라고요. 하지만 글의 소비와 유통은 제가 판단하고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죠. 제가 원한다고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도 않고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출판한 글 중에서 ‘다른 어떤 글보다 지금 이 글을 사람들이 더 많이 읽으면 좋겠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읽어주는 글은 다른 글입니다. 제가 기대하는 글보다는 다른 글을 더 좋아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 그 글 말고 이 글을 읽어주세요, 이 글을 유통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읽은 분이 판단할 사항이니까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과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은 다르단 뜻이겠지요. 그러니 지금까지 쓴 글은 당연하게도 저 한 사람의 사소한 주절거림에 불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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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알바하러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넥서스7(7인치 태블릿)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생산성 최고인 넥서스7 만세!

바이 모임, 두 번째

두 번째 바이모임을 연다고 합니다.
언젠가 20번째, 200번째 모임을 알리는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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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모임 두 번째. 연애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쩌면 엄청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연애.
바이와 바이를 둘러싼 우리들은 연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두 번째 바이 모임에서는 “연애”를 주제로
수다수다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
이번 수다방은 4개의 작은 수다방으로 나눠 이야기를 한 뒤,
다시 큰 수다를 떠는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작은 수다 주제>
*바이가 아닌 내 애인
*내가 안/못 해본 연애
*썸
*나의 바이 애인
일시: 2013년 4월 13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
장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참가비: 비청소년 6,000원 / 청소년 4,000원
(참가비는 대관료와 간식비로 쓰입니다. 뒷풀이 비용은 따로!)
인원 파악을 위해 꼭! 미리 신청해주세요.
신청: bi.moim.kr@gmail.com
트위터 @bimoim

[#M_ more.. | l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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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웹자보에 이런 글 쓰기 참 그렇지만… 그래서 지나치기 쉽게 more/less로 글을 쓰자면…
웹자보는 예쁜데요…
웹자보가 작아요.. 그러다보니 글자 크기도 작아서 읽기가 힘들어요.. ㅠㅠ
아울러 제가 색약이라서 그렇겠지만, 지금 색깔 배치로는 글자를 읽기가 어려워요..
홍보할 때 이미지 웹자보와 텍스트 파일은 언제나 함께!
방문자가 몇 안 되는 이곳이지만 혹시나 웹자보를 제작하는 분이 여기에 들리신다면, 그리고 지금 이 메모를 읽으신다면 이 점 참고해주셔요. 🙂


+
지난 번 LGBT 인권포럼 웹자보 사이즈가 상당히 작은 편이라(그 많은 내용이 들어있는데도 사이즈를 작게 해서 내용을 읽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웹자보 홍보는 포기했는데요..
이게 모든 홍보를 SNS에서 한다는 개념에 따른 걸까요? 블로그에서 홍보한다는 개념으로 웹자보를 제작할 때와 트위터에서 홍보한다는 개념으로 웹자보를 제작할 때 이미지의 크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모바일을 통해 트위터 같은(페이스북은 안 써봐서 모르겠고) SNS에서 홍보할 때 적절한 크기의 이미지로 제작하다보니 작은 사이즈의 웹자보가 제작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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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과 관련해서..

블로그 리퍼러로그를 통해 요즘 표절이 이슈란 걸 새삼 깨닫고 있다. 검색어 유입에 표절, 참고문헌, 인용, 각주와 같은 것이 적지 않다. 아마 ‘글쓰기 기본 강의’란 글 네 편이 포털검색에 걸리나보다.
참고로..
글쓰기 기본 강의 1: 표절 https://www.runtoruin.com/2113
글쓰기 기본 강의 2: 인용 https://www.runtoruin.com/2114
표절이 이슈가 되는 걸 보면 어쨌거나 좋은 일이긴 하다. 그 사람에게 학위가 어떤 의미건 표절은 해선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 시간이 지날 수록 이전엔 ‘관례’였던 일이 표절로 논란이 되겠지. 지금의 논란이 표절이 무엇인지 배우는 시간이면 좋을텐데.
나로선 표절이 무엇인지, 인용을 어떻게 하는지 꼼꼼하게 가르치는 지도교수를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내내 인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아울러 학제에서 통용되는 지식이라고 해도 그냥 쓰면 표절로 해석될 수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배우지 않았다면 모든 걸 감으로 해결했겠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표절과 인용을 꼼꼼하게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났다고 했지, 내가 이 부분을 배운대로 제대로 잘 하는 학생이라고는 안 했다… ㅠㅠㅠ)
표절을 피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인용만 꼼꼼하게 하면 된다. 이 문장은 누구의 논문에서 빌렸고, 이 문장은 누구의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빌렸고.. 이렇게 출처만 분명하게 하면 된다. 참 쉽다. 아니다. 쉽지 않다. 글을 쓰기 위해 특정 논문을 집중해서 읽을 땐 인용 표기가 정말 쉽지만 시간이 지나면 헷갈리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주장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엔 ㄱ이란 학자의 글에서 배웠지만 몇 년 지난 지금은 그것이 내 삶에서 체득한 나의 앎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인용해야 할까? 그냥 나의 주장으로 넘어가도 될까? 원칙적으로는 인용해야하지만 나의 고민이 더 많이 묻어서 인용으로 처리하기엔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찰나에 나는 갈등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내용은 이것이 내 주장인지 인용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지금 쓴 어떤 문장이 내가 한 말인지 예전에 읽은 논문의 한 구절인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글을 쓸 때는 ‘오, 내가 이런 멋진 문장을 쓰다니’라며 잠시 잠깐 자뻑하지만 몇 달 뒤 혹은 몇 년 뒤, 어떤 논문을 읽다가 자뻑한 문장이 이 학자의 문장이란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원칙적으로 이것 역시 표절이다. 표절은 맞는데… 이런 고민으로, 표절을 피하며 글을 쓰려는 입장에선 쉽지 않은 순간이 온다.
가장 어려운 건 자기표절이다. 나 역시 자기표절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내가 쓴 많은 글은 자기복제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변주하면서 반복하고 있다. 자기표절로 걸려면 걸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생산한 글이 다 다른 목적에서 쓰였고 학제 기준에 맞춰 쓴 글은 거의 없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어떤 선생님이 비슷한 시기에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다른 두 곳에서 출판한 글을 읽은 적 있고 그때 자기표절은 어떤 점에서 인간의 한계인가 싶기도 했다.
어렵다. 어려우니 표절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표절에 엄격해야 한다는 말이다. 엄격하려다보니 쉽지 않고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고보면 내가 쓴 글의 목록을 스스로 정리하고 공개한 건 미친짓이었구나. ㅠㅠㅠㅠㅠ
미리 말하자면 저는 자기복제에 있어 甲 of 甲, 전설의 레전드입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