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세상에, 어떤 위로를

지난 학기 수업 쪽글로 쓴 글인데 아직 공개를 하지 않았네요. 깜빡 잊은 건지 고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공개할 수 있을 듯하여 올립니다.
글을 다시 읽으며, 요즘 고민과 겹치면서, 어쩌면 정체성 정치에서 바이는 불가능한 범주인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합니다. 이것이 정체성 정치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겠지요. 정체성 정치학이 어떤 범주 경험을 중심으로 등장했는지를 탐문하는 작업도 필요하겠네요. 오늘날 ‘정체성 정치학’이 일종의 놀림거리처럼, 철지난 유행처럼 취급된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정체성 정치학으로 사유하고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과 같은 논쟁이 발생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이 말이, 정체성 정치가 유일한 문제란 뜻은 아니고요.) 돌이켜보면 모이드의 책은 정체성 정치를 단일 범주 구성으로만 다루고 넘어갔지만 그렇게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체성 정치학에서 바이 범주는 가능할까요? 트랜스젠더 범주는 성립할 수 있을까요? 직관적 판단이지만, 성립할 수 없는 듯합니다. 존립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정체성 정치학은 단순히 단 하나의 범주만 지닌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체성만 적법하고 적절한 범주로 사유합니다. 그래서 정체성 정치가 어떤 범주를 축으로 등장했고 정체성 정치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어떤 범주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네요. 나중에 관련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미 누군가가 이런 주제로 글을 썼을 테니 찾아봐야겠어요.
물론 다음의 쪽글 내용은 앞 문단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고요.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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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4. 수업 쪽글.
이 미친 세상에, 어떤 위로를…
-루인
과거 자신을 부치로 설명한 지인이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ftm 트랜스남성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어 이성애남성으로 얘기하는 듯하더니 곧 바이로, 다시 게이에 가까운 바이로, 나중엔 게이로 자신을 설명했다. 그에게 레즈비언의 역사, 트랜스남성의 역사, 바이의 역사, 게이의 역사는 모순이거나 별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겹치는 시기에 고민한 내용이며,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이다. 물론 모야 로이드가 지적했듯(39), 정체성 정치학에서 그는 게이거나 트랜스젠더여야 한다. 부치로 산 역사는 이제 트랜스남성이 되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으로 재편집되어야 한다. 정체성 정치학에서 개인의 삶은 단일 범주이자 태어날 때부터 확고한 것이다. 과정 중에 있을 수 없다. 반면 지인의 삶은 정체성 정치학을 되묻는다. 그에게 게이이자 트랜스남성으로 살았던 삶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다. 어떤 자리에선 게이 범주만, 다른 자리에선 트랜스남성 범주만, 또 다른 자리에선 (비트랜스로 통하는)남성 범주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략적으로 특정 공간마다 어느 한 가지 범주만 재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에게 게이 범주, 트랜스남성 범주 등은 언제나 동시에, 겹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월요일엔 게이, 화요일엔 트랜스젠더, … 일요일엔 정체성 휴업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로이드의 논의가 정체성 정치에서 혼종적 주체로 넘어가는 것은, 정체성 정치학이 단일 범주의 개인, 그리하여 하나의 범주로 환원할 수 있는 주체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학은 범주의 동질적 경험을 가정하기에 특정 범주에 속하는 개인은 그 범주의 다른 개인과 거의 동일한 경험을 지니며 그 범주에 어떤 불편[not-at-ease]을 겪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한 개인은 그 범주를 대표[representative]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 정치학은 개인의 복합적 범주를 누락하거나 덧붙이기[additive] 식으로 설명하고, 범주 경험에 위계를 정한다. 뿐만 아니라 범주 자체를 ‘자연화’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라면 인종을 겪지 않지만 이주민은 인종차별을 겪는다는 식의 인식은 정체성 정치학의 대표적 효과다. 지배 규범적 범주 경험은 경험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등은 삶에서 동시에, 그리하여 화학적 결합을 통해 작동한다. 모든 개인은 어느 하나로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경계지대에 살고 있고(48), 마리아 루고네스(María Lugones)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이 속한 세계라고 해도 그 세계에서 편하게 살 수 없는 그런 삶을 산다. 어떤 범주에도 완전하게 들어맞지 않고, 그리하여 편하지 않다. 이것이 정체성 정치학에서 혼종적 주체로 논의를 이행한 이유다.
이런 이유에서 다중적 주체, 혼종적 주체는 은유가 아니라 ‘우리’/내가 살아가는 삶의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다. 누구도 단일 범주로 살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복합적 범주를 인식할 수 없도록 하는 체화된 인식체계(부인의 체화)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혼종적 주체는 특이한 주체로 재현된다. 다른 말로, 어느 페미니스트의 지적처럼, ‘나’는 나를 미쳤다고 얘기하는 미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혼종적 주체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 세상에서 많은 개인은 우울증과 정신분열을 겪는다. 자신의 위치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을 가지면서도 때때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혼종적 주체 논의를 통해 이 우울과 정신분열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이를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잡담: 망상은 자유, 크롤러, 이요나

01
범주논쟁에서 트라우마는 나를 배제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나를 설득하려 하고, 그를 이해하고 이해시키려는 순간 발생한다.
(…라는 문장도 성립할 수 있을까? 정희진 선생님의 문장을 바꿔봤습니다.)
02
어차피 망한 인생, 마저 망해야지. 후후.
03
모 외국 저널에 실린 모든 글을 다 자료창고 메일에 저장하고 싶은데… 품이 너무 많이 들겠다 싶어 망설이고 있다. 흥미로운 특집호만 저장할 수도 있지만 검토하지 않은 권호에서 재밌는 자료가 있을 수도 있다. 아울러 지금은 접근할 수 있지만 나중엔 접근이 차단되어 필요한 자료를 필요할 때 못 볼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염려로 고민이다.
일전에 퀴어 전문 저널의 자료를 나중에 모두 저장해야겠다고 미뤘다가, 학교 도서관에서 더이상 구독을 안 해서 접근할 수 없었던 적이 있다. 그 이후 필요한 자료는 가급적 그때그때 바로 수집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자료가 상당히 많을 땐(대략 50호에 가까운 분량이다) 고민을 한다. 그럼에도 다 긁어 모을 것인가, 그냥 관심 많이 가는 특집호만 모을 것인가.
03-1
자료 수집과 관련해서 오해하실 분들이 있는데 전 자료 덕후가 아닙니다. 그렇게 열심히 모으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료를 모으는데도 위계가 있는데, 최상위에 수집가, 그 다음에 덕후, 가장 아래에 크롤러가 있습니다. 전 그저 크롤러일 뿐입니다. 자료의 필요성과 질을 결정해서 모으지 않습니다. 일단 모으고 필요성과 질은 나중에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않습니다(모은 뒤 방치합니다). 그러니 오해는 말아주세요!(응?)
04
이요나 목사님께서 2001년에 쓰신 영성 돋는 글을 읽었습니다.
(원하는 분만 펼쳐 읽으세요)

[#M_말씀 읽기|말씀은 무슨..|

“물론 그들[동성애자]의 인권과 삶의 형태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마치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합법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마약을 합법화할 때 그들은 우리 모두를 마약환자로 만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동성애를 합법화할 때 그들은 제일 먼저 성적인 판단력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접근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동성애자 내지 동성애 옹호자로 만들고 말 것이다.”
“확실히 말하여 그 당시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었다. 나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도덕성 의식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충동하는 사춘기 시절의 육체적 쾌락이 충족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성을 접할 수 없던 당시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유혹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같은 학우 사이에도 이러한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부터 나의 육체는 자제력을 잃고 걷잡을 수 없는 향락의 도시 소돔성으로 내달음질 치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이 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혹시 세심하지 못한 부모들의 관찰과 교육의 불충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60년대의 우리 부모들만큼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분들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오늘의 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하고 싶다.”

_M#]

이런 주옥 같은 문장과 표현이 가득합니다. 다들 목사님의 글을 읽고 영성 충만한 시간을 보내봐요.
+참고로 아카이빙 용으로 올렸습니다. 블로그에 올려두면 나중에 찾기 쉽거든요.
05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의 수익 사업으로..는 아니고(유료지만 실제 사용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연구소가 어쨌거나 뭐라도 하고 있으며 누구라도 활용할 수 있음을 상시적으로 알리는 수단으로 자료 검색 서비스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다. 몇 가지 조건 하에 시작하면 사용하겠다는 분은 있을까? 물론 서비스 시행 목적은 연구소가 글쓰고 강의하는 일 말고도 뭔가를 한다는 걸 알림이니 사용자가 얼마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흐흐 문제는 이런 서비스를 개시했을 때 내가 재밌을까? 의미나 가치 같은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내가 재밌게 할 수 있을까를 며칠 고민해봐야지.

이성애주의자 LGBT: 결혼과 이성애주의 이슈에서

결혼 자체가 이성애주의가 아니라 결혼한 사람은 모두 이성애자라는 인식이 이성애주의다. 이런 인식이 모든 결혼한 사람에게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을 자연질서로 강제한다. 따라서 ‘내’가 레즈비언이건 게이건 다른 어떤 범주건 상관없이 이런 식으로 사유한다면 이성애자는 아닐지언정 이성애주의자이긴 하다.
이런 선언문 같이 거친 말을 하는 건 이성애주의가 마치 퀴어 공동체엔 없다는 것처럼, 혹은 기혼이반이나 결혼하는 바이에게만 관련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태도, 이성애주의가 레즈비언 등에겐 관련 없다는 식으로 발화하는 방식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여러 번 얘기 했지만 한국에서 동성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언설은 트랜스젠더를 부정하거나 배제한다. 많은(이것은 고의적 수식어다) 트랜스젠더가 동성결혼을 한다.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지면 태어났을 때 지정 받은 젠더로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이나 주변의 강요로, 혹은 파트너와의 합의 하에 호적 상 성별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결혼을 한다. 피상적으로 이 결혼은 이성애 결혼 같겠지만 이성애 결혼이 아니다. 어떤 결혼은 명백한 동성결혼이고 어떤 결혼은 비이성애 형태의 결혼이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동성결혼이 불가능하진 않다. 동성결혼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결혼이 이성애 결혼으로 인식되면서 주요 이슈로 다뤄지기보단 누락된다. 혹은 트랜스젠더의 경험은 여전히 특수하거나 LGBT 공동체에서도 주변부 이슈로 인식되기에 쉽게 간과되는 것일까? 퀴어 삶의, LGBT 삶의 복잡성을 간과하고 결혼을 이성애주의로 등치하는 태도 및 인식이야 말로 이성애주의의 반복이자, 모든 사회적 제도를 규범적 이성애가 독점하는 기획에 동참하는 행위다. 이런 반복과 동참이 “결혼=이성애”란 공식을 자연화한다.
‘동성결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동성결혼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제도적 허용 여부로 가부를 판단하고 결혼의 형태를 상상할 이유는 없다. 동성결혼의 제도화를 둘러싼 논의와는 별도로 결혼 자체를 어떤 경험 맥락에서 상상하고 있는지를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바이와 결혼을 곧장 등치시키고 이를 이성애 권력과 붙이는 식의 언설을 반복한다면,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의 퀴어정치와 LGBT란 용어 사용을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LGBT란 용어 사용은 단순히 동성애자 외에 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는 식이어선 안 된다. 기존 상상력 자체, ‘이성애 vs 동성애’라는 이분법적 상상력과 그에 따른 언어 자체를 재검토함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