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정치 성의 권리 저자 강연: 김주희

<성의 정치 성의 권리>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김주희 선생님이 강연을 합니다. 많은 참가바랍니다. 🙂
일시: 2013년 2월 26일 화. 오후 7시
장소: 자음과모음 사옥 5층 강연장(합정역 근처)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저자강연회 2013년 2월 26일, 김주희 저자의 강의 자료입니다.
 
성매매 피해 여성은, 성노동자는 누구인가?
 
* 성매매 방지법 위헌 심판 제청 논리에 잠식된 오류와 편견.
1) 형벌권 남용 >>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가 호황을 이룰 수 있게 한 국가 차원의 산업-인프라 구축의 역사를 망각한 발상.
2) 평등권에도 어긋남 >> 이런 논리라면 한국 사회의 성 문화나 성 산업의 속성, 젠더화된 노동 시장의 특징 역시 평등의 관점에서 이야기되어야 함.
3) 법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 >> 성매매가 증가하는 문제는 다종다양한 창업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성매매(산업) 증가 현상을 통해 법의 효과를 논할 것인가, 아니면 법을 통해 비로소 ‘탈-성매매’ 할 수 있었다는 여성들의 사례를 통해 법의 효과를 논할 것인가.
 
* 음성화된 성매매가 증가하고 있다는 진단 뒤 ‘풍선효과’라는 설명
– 업주가 전업해야 한다. > 강력한 단속
– 성판매 여성에 대한 생존권 고려해야 한다. > (제한적) 공창제
 
* 경제 발전의 결과가 아닌 수단으로서의 성매매
– 강남 지역에서의 유흥시설 신규 허가 장려
– 기생 관광 특별 융자, 모범 업소 특혜
– 전국 성매매 집결지 ‘환경개선작업’의 명목으로 대대적인 정비사업
 
* 판매자의 ‘자발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선불금 ‘부채’의 문제
– 족쇄로서의 선불금, 다양한 금융적 구제 활동 (책 115~116쪽)
– 신용 카드 사용하고 명품백 사는 합리적인 경제적 주체임을 주장 (책 117쪽)
– 그렇다면 이들의 ‘부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어떤 정치학을 만들어낼 것인가: 사채시장과 성매매 여성들의 금융적 구제활동 사이, 질문이 분리되어야할 필요
 
* 관계-장소성 (책 143쪽~)
– ‘루저’들의 장소
– 비시민성의 상품화 공간
– 이런 장소성이 부채 관계로 증명되는 딜레마 (책 151쪽)
 
* 노동권으로 번역하면?
– 오구라, “성매매와 자본주의적 일부다처제”, 물건들과 달리 유통 정보의 회로에 의해 구축된 심상은 성적인 서비스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 외모 문제, 성형 대출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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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대비 예약발행한 글입니다.

이태원, 순찰의 일상, 혐오와 묵인 사이

이곳에 오시는 분에게 여쭙기를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동네를 순찰하는 경찰을 몇 번 정도 보셨나요? 제가 대흥동에서 5년 정도 살던 시절 그 5년 동안 경찰차를 한 번도 못 본 듯합니다. 경찰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5년의 시간 동안 한두 번은 봤을 법한데 기억도 안 납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역시 경찰차는커녕 경찰 한 명 못 봤습니다. 물론 이곳에 살기 시작한지 몇 달 안 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인구밀집지역이고 학교도 많이 있는데 경찰서는커녕 파출소도 안 보이네요(꼭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게시판에서 읽은 글인데, 한국은 경찰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치안은 신뢰한다고 하더라고요. 밤 늦은 시간, 혹은 새벽에 거리를 안전하게 활보할 수 있는 나라는 몇 안 된다면서요. 누구의 입장에서 안전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대체로 치안이 잘 되어 있는 편이긴 합니다. 거리에 경찰이 없어도 안전하다는 막연함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 뜬금 없는 글을 쓰는 이유는 이태원 경험 때문입니다. 이태원에 장기 거주하셨다면 알고 계실 겁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경찰을 마주한다는 점을. 이태원지하철역 출구에 이태원경찰서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저의 경우 하루 두 번은 그 앞을 지나치기 때문에 경찰을 자주 마주한다고 느낀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알바를 하러 가는 길이건, 늦은 저녁 집에 들어가는 길이건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차나 경찰을 하루에 한 번은 꼭 마주쳤습니다(주말엔 미군 헌병 무리도 마주하고요). 싸이렌을 울리며 긴급출동하는 경찰차를 보는 것도 낯선 일이 아닙니다. 이태원에서 경찰의 방범 행위는 일상에 스며 있습니다. 어떤 날엔 취객과 경찰이 대치한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취객은 이태원에 거주하는 사람인지, 길바닥에 누워선 자신에게 무기가 없다는 걸 알리려는 듯 두 팔을 들고 있었고요(미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습니다). 전 경찰의 검문이 부당하다고 싸울 줄 알았는데 조용히 누워 있는 모습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또 어떤 날엔 그냥 동네 주민 싸움인데 경찰이 출동하거나 순찰 중인 경찰이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주민의 삶에 경찰의 개입, 순찰은 그냥 일상입니다.
이태원이 어떤 공간인지 이보다 더 잘 표상하는 일도 없는 듯합니다. 관광특구이고 다문화지역이고 하는 말, 다 좋아요. 하지만 공공기관에게 혹은 공권력에게 이태원은 우범지역이며 위험지역입니다. 하루에 몇 번 씩 정기적으로 경찰이 순찰을 돌아야 하는 지역입니다. 물론 모든 이태원 지역을 이렇게 순찰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았던 구역이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혹은 이슬람 사원이 있고 아랍 계열과 중국 계열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서 순찰이 잦은지도 모릅니다. 이건희가 살고 있다는 한남동에도 이런 식으로 순찰할까요?(아, 그들을 경호하려고 순찰이 잦을 수도 있겠네요). 만약 이태원의 특정 구역에만 순찰이 잦고 또 정기적이라면 단순히 유흥지역이라서가 아니라 계급과 인종/민족 혐오가 함께 하는 거겠죠. 빈민지역 혹은 여러 인종이 함께 있는 지역은 치안에 위험이 있다는 식의 복잡한 편견과 혐오가 기저에 흐르고 있는 거겠죠.
이태원은 복잡한 문화가 얽혀 있지만 그런 만큼이나 혐오와 경계도 깊은 곳이란 느낌입니다. 물론 그 혐오와 경계를 표출하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인 거죠. 그래서 이태원은 어떤 방식으로 방문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동네로 기억될 듯합니다. 주말 게이바를 찾기 위해서냐 이국 음식을 먹기 위해서냐 이슬람 사원을 구경하기 위해서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겠지요. 어떤 구역에서 거주하냐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동네로 기억할 테고요. 제게 묻는다면 경찰의 순찰이 일상인 동네라고 답하겠습니다. 트랜스젠더 업소, 게이힐, 후커힐의 공존보다 더 인상적인 풍경은 경찰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순찰이니까요. 언젠가 이 지점에서 글을 써도 좋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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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대비 예약발행한 글입니다.

트랜스젠더, 수술/의료적 조치, 그리고 저어함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구성원 모드로: 건너뛰어도 무방한 구절.]
트랜스젠더 이론가 중 유난히 애호하는 두 명이 있다.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며 역사학자고 영화감독이기도 한 수잔 스트라이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여러 편 읽으며 매번 감탄했고 종종 울었다. 논문을 읽으며 울 수도 있음을 스트라이커를 통해 배웠다. ftm 트랜스젠더며 철학 전공인 제이콥 헤일의 1990년대 글은 내가 사유하는데 많은 토대를 제공했다(2000년대 들어선 글을 거의 안 쓰고 있다 -_-). 특히 범주 논쟁에 있어 그의 글은 탁월하고 때때로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 둘은 친구기도 한데, 각자의 글에서 우정을 표현하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둘의 의견이 항상 일치함은 아니다. 의료적 조치를 결정하는 이슈에서 특히 그러하다. 스트라이커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를 최종 결정할 사람은 트랜스젠더 자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가 요구한다면 의사는 그 요구에 따라 의료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헤일은, 그의 1990년대 중후반 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와 달리 2000년대 후반에 쓴 글에서, 최종 결정은 의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와 의사는 충분히 상담해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트랜스젠더의 의견이 존중 받아야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의사가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의사가 왜 개인의 젠더를 결정할 권한을 지니는가?’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스트라이커의 의견에 가깝다. 의료적 조치 시행을 의사나 행정기관이 결정해선 안 된다. 의료적 조치를 요구하는 트랜스젠더 본인이 결정하고 요청하고, 이 요청은 정당한 요구여야 한다.
[변방의 이름 없는 블로거 루인 모드로]
며칠 전 강의에서 김비 님은 논쟁적 의견을 제시했다. 청소년과 기혼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 특히 수술은 관계를 생각해서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논쟁적인지 알고 있으며 그래서 이 이슈로 논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의견에 ‘동의’한다. 청소년과 기혼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의료적 조치가 능사인가란 고민에서 ‘동의’한다. 이렇게 적으면, 전혀 다른 두 입장을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 같지만 어떤 염려의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듯하여 연속선 상에 둘 수도 있으리라.
나의 고민은, 엄밀하게 청소년 및 기혼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 일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 일반에 해당한다. 트랜스젠더 운동이 더 활발해지고 사회적 분위가 변해, 나이 어린 mtf 트랜스젠더가 여성스러운 행동 양식을 실천하고 자신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수술을 요구하면 의사가 “좋아, 당신은 수술을 요구하는 트랜스젠더니까 의료적 조치를 해야지”라는 식으로 진단과 수술 처방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만족할 일일까? 지금은 예상 못할 어떤 또 다른 규범을 재생산하지는 않을까? 혹은 어떤 수준의 고통, 어떤 수준의 진정성을 경쟁하고 전시하도록 하지는 않을까? 이를 테면 가급적 어린 나이에 의료적 조치를 요구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트랜스젠더의 표상이고, 나이 쉰에 의료적 조치를 요구한다면 ‘너무 늦게 깨달았다’며 의심하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까? 수술이 트랜스젠더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확정되지는 않을까? 나의 이런 염려는 너무 조급하거나 쓸데 없는것일까?
물론 의료적 조치를 해야 한다면 가급적 빨리,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의료적 조치를 해야 그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고 삶을 영위하기에 조금은 더 수월하단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삶의 편안함이란 측면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니 의료적 조치를 원한다면 원하는 시점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적 조치 요구를 이행하는데 있어, 성인이어야 한다거나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요건은 없어야 한다. 7-8살이어도 본인이 원한다면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너무 어린 나이에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한다면 이것이 큰 수술이기에(어쨌거나 간단한 수술은 아니기에) 아이에게 해로울 수도 있다며 반대할 수 있다. 특히 의료 관계자가 수술의 위험을 얘기하며 더 강하게 반대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다면 인터섹스의 경우엔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때때로 18개월 미만일 때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시행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현재 논하는 의료적 조치의 한계는 나이가 아니라 이원 젠더 규범이다. 아동 운운, 청소년 운운하며 반대하는 발언에서 핵심은 나이가 아니라 지배 규범의 재생산이다. 어린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태어날 때 지정 받은 규범적 젠더를 일평생 유지해야 한다는 이원 젠더 규범이 의료적 조치를 금하는 핵심 근거다. 그러니 나이가 한계일 수 없고 나이로 한계를 정할 수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의료적 조치를 받은 후 나이 들어 후회하면 어떡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오지랖은 접어 두시라고 답하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드는 질문은, 의료적 조치가 정말 유일한 선택이자 조언이어야 할까? 나는 트랜스젠더의 요구에 따라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의사는 상담가 역할이지 판사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과 믿음이 다른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한 가지로 수렴해버리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될 우려가 있어서 수술 이슈엔 늘 양가적 감정을 갖는다. 6살 아이의 의료적 조치 요구를 적극 지원하고 지지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이것이 또 다른 어떤 규범을 재생산할 우려는 없는지 끊임없이 탐문해야 하는데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우려 혹은 걱정은, 지금 바로 이런 식의 고민이 트랜스젠더 이슈와 의료적 조치를 등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도 있다. 의료적 조치는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일시적 사건, 통과지점이지 종착점이 아님에도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의 유일하고 최종 목표로 논의된다. 이것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고 상상할 수 없는 범주로 내몬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하리수 씨를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모델로 만든다. 의료적 조치를 수월하게 하는 것이 능사인가란 고민은, 그 저어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감정이리라.
수술 혹은 의료적 조치가 능사가 아니라고 저어하는 내 몸과 의료적 조치는 트랜스젠더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 몸은 ‘모순’이 아니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 뭘까?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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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E 님과 관련 얘기를 하다가, 상당히 어설프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글로 정리할 필요도 있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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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약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