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동네: 문화 상상력, 문화 감수성의 차이 / 이태원과 비교해서

아침 알바를 하러 가는데 뭔가 낯설었다. 학생들이 학교 가는 모습이 묘하게 어색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지금 사는 집엔 정면에 초등학교, 뒷쪽에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다. 그러니 출근시간과 등교시간에 학생이 많은 게 이상할 것 없다. 그런데도 어색했다. 이태원에 몇 년 살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 감각이 변한 것일까?

이태원에서 알바 갈 때도 등교하는 학생들을 마주했다. 다문화라는 의미불명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럼에도 이태원에서 다문화는 정말 적절한 수식어인데, 이태원에선 다문화가 그냥 일상이다. 다양한 언어, 출신국가, 성적 지향, 젠더 실천, 계급 등에 있어 다종다양한 방식이 공존했다. 한국 사회의 지배규범이 부재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지배규범이 많은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질서지만, 그것이 유일한 질서는 아니었다. 이를 테면 내가 살던 동네에서 “할랄”은 가게가 장사를 하는데 매우 중요한 표시였다. 이슬람 문화는 그 동네의 관습이었고 라마단 기간에 금식과 금욕을 상징하는 구절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울러 집에서 몇 분만 나가면 트랜스젠더 업소가 밀집해 있고 게이힐, 후커힐이 있었다. 그 동네의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민족 출신의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다녔다. 이태원에서 “한국인”이란 개념, “한국문화”라는 것은 규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네 자체가 재밌었다.
내게 가장 인상적 풍경은 주말 늦은 오후에 일어났다. 어느 여름날 늦은 오후 혹은 이른 저녁, 방에 앉아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모여 노는 소리가 들였다.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한국어로 떠드는 소리라고 인지했다. 무심히 그렇게 여기며,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동네라니 정말 좋다고 중얼거렸다. 내 어린 시절도 기억났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다시 들었을 때 그 언어는 아랍 계열의 언어였다. 때때로 영어로, 프랑스어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한국어가 당연하다고 믿다가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떠드는 아이들의 풍경을 마주할 때의 즐거움이란! 나의 무지와 조우하는 찰나였고 이태원에 가진 애정이 좀 더 깊어진 찰나였다(임대인만 아니었다면!!). 실제 내가 살던 동네엔 아랍계열, 중국계열 사람이 많았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인종이 동일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지금 사는 동네의 등교 풍경은, 소위 한국인이라고 불리는 인종,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식한 언어이자 상상인데, 그럼에도 이런 상상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법했다. 더군다나 교복을 입고 있기에 다들 비슷비슷한 외모, 동일한 복장이라 모두가 동질한 혹은 매우 유사한 상상력을 체화할 것만 같았다.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한 동네여서 더 이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매우 오만하고 방자한 발언임은 안다. 이태원을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태원에 사는 사람이 모두 다문화 감수성이 빼어나서 문화혐오증이 없다고, 지금 사는 동네의 학생이 모두 단일문화에 젖어 다문화 감수성이 없다고 말함도 아니다. 개개인의 변수는 크다. 하지만 이태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아이와 지금 사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아이의 문화 감수성 혹은 문화 상상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연례 행사로, 다문화 체험을 한답시고 토요일 오전에 한두 시간 이태원을 혹은 이슬람 사원을 구경하는 것(거의 매주 이태원을 ‘관광’하는 학생 집단을 마주했다)으로는 결코 지닐 수 없는 그런 문화 감수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에 살며 때론 문화혐오증을 겪고 때론 다문화를 그냥 일상으로 여기며 사는 삶이 주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태원 시절 임대인은 내게 트랜스젠더를 “여장남자”라고 부르고 “그 미친 년들” “미친 놈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해서 업소를 없애야 한다고 트랜스젠더 업소, 게이힐, 후커힐을 폐쇄해야 한다고 말하진 못 했다(물론 이태원과 보광동 재개발 사업에 트랜스젠더 업소 밀집지역, 게이힐, 후커힐, 이슬람사원 등을 없애려는 기획과 욕망이 없다고는 못 하겠다, 나는 이 지점을 강하게 의심한다). 아무리 혐오해도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지 못 하고 사적으로만 말해야 하는 어떤 문화적 무게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만약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 트랜스젠더 업소가 들어서겠다고 하면, 간판부터 ‘트랜스젠더’를 내건 업소가 들어선다면 그것이 용납될까? 학생들에게 유해한 시설이 들어선다고 당장 데모를 하지 않을까? 지하철 역 근처가 아니면 술집은커녕 편의점도 찾기 힘든 동네에선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문화다. 혐오해도 공공연하게 말할 수는 없는 곳과 혐오를 표현의 자유이자 안전하게 살 권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곳은 문화 상상력, 문화 감수성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차이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아침, 알바하러 가는 길에, 등교하는 학생 무리를 조우하며 이런 고민이 들었다. 이 동네 와서 무척 심심한 동네라고 구시렁거렸는데, 이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알바 시작

오늘부터 다시 알바를 시작했다. 계약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지만 큰 일은 없겠지… 아무려나 오랜 만에 출근하는 일이 나름 스트레스였는지 자면서 한 시간 반에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 만에 꿈도 꿨고 그 내용도 스펙터클했는데 물론 스펙터클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어제 오후부터 눈이 내렸고 20cm 가량 쌓였다. 아침 출근하며, 눈이 너무 예뻐서 그대로 눈에 빠지고 싶었다. 그랬다간 지각할 것같아 참았지만.. 아니 지각은 둘째 문제고 간신히 다스리고 있는 몸살이 도질 것 같아 참았다. 어제 오늘 내려 쌓인 눈은 너무 예쁘다. 재밌는 건, 제설작업을 못한 인도에 한 명만 지나가기에 적합한 길이 나 있었다. 다들 앞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간 거지.. 흐. 발목 높이의 신은 없고 운동화가 전부기에, 나 역시 사람들이 간 길을 얌전히 따라갔다.
알바를 하러 가면서 새삼 깨달았지만, 알바라도 해야 내가 움직이고 좀 걷는구나 싶었다. 걷는 것 자체는 좋아하지만 알바를 안 하고 나갈 일이 없으면 종일 집에 콕 틀어박혀 지내다보니 걸을 일이 없다. 구글나우에 따르면 작년 12월엔 한 달 동안 12마일(대략 19km), 올 1월엔 13마일(대략 21km)을 걸었다고 한다. 알바를 하던 시기엔 한 달에 50-60km 정도를 걸었으니, 알바라도 해야 움직이는구나 싶었다. 알바할 땐 점심시간에 산책도 하니(굳이 사무실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걸을 일이 더 많기도 하고.
아무려나 다시 알바를 시작했고 11월까지는 비슷비슷한 일상을 반복하겠구나. 문제는 주5일에 수업 없는 날은 5시까지 일하기로 해서 세미나에 참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나…
그나저나 이제 하루 했는데, 지겹다. 아악… 크크. ㅠㅠㅠ

내가 사는 피부: 자아

벌써 열댓 번은 봤지만 <내가 사는 피부>는 다시 봐도 재밌다. 읽을 거리가 넘쳐나서 아직도 몇 번은 더 재밌게 볼 수 있겠다 싶다. 이런 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런 흥미로운 텍스트를 만든 감독에게 고맙고, 이런 텍스트로 글을 쓰겠다고 한 나 자신에게 안심한다. 물론 서너 번 봤는데 지겨웠다면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

영화 <내가 사는 피부>는 많은 평론가가 지적하듯 두 가지 다른 텍스트를 얘기한다. 하나는 피그말리온과 그 조각상 갈라테이아, 다른 하나는 프랑켄슈타인과 이름 없는 괴물/피조물. 영화 속 의사 로베르트는 자신이 (재)창조한 존재 베라/비센테와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괴물을 추적하듯 그렇게 로베르트는 베라/비센테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지듯 그렇게 베라/비센테를 사랑한다. 그런데 각 텍스트에서 자아가 구성되는 방식은 무척 흥미롭다.
로베르트는 자신이 제작한 대상에게 모든 감정을 쏟으면서, 베라/비센테를 통해서만 자기 삶의 의미, 자아를 확인할 수 있다. 베라/비센테는 로베르트가 제작한 외모와 비센테로 살았던 긴 삶의 공존을 모색하며 자신의 자아를 구성한다. 이때 자아는 어떤 의미인가? 각자의 자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결코 동시성을 갖지 않는다. 로베르트는 베라/비센테가 갈/노르마의 자아를 갖춘 존재길 바라고 그렇게 대한다. 베라/비센테는 베라에 오염된 비센테, 혹은 베라와 비센테의 경계 구분이 불가능한 혼종으로 살아간다. 로베르트가 베라/비센테에게서 비센테의 역사를 깨달은 것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사람 간 관계에서 서로가 기대함에도 기대에 어긋나는 자아로 마주할 때 이 관계는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KSCRC 강의에서 <내가 사는 피부>를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강좌에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아하하. ㅠㅠ
뭐, 이번엔 진짜로 강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으하하.